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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로디 Jun 28. 2020

영지주의와 기독교 이단의 역사

기독교가 영지주의를 이단으로만 바라보는 이유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만큼 '이단'이 많은 종교가 또 있을까?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참 많은 이단들이 태동했고 사라졌다. 그런데 그 '이단'들이 모두 진짜 이단 이었을까? 라고 질문하기 전에 과연 2천년 기독교는 얼마나 종교 본연의 모습을 지켜왔을까? 라는 질문을 먼저 하면 앞서 던진 질문에 대해 훨씬 열린 대답을 찾게 된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오랜 시간 동안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진실'과는 상관 없이 죄인이 되듯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이단'의 낙인은 그 보다 더한 프레임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종교 본연의 자리에서 벗어나 부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정적들에게 프레임을 씌워오거나 자신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희생양'을 삼기 위해 '이단 프레임'을 사용해 온 것을 부정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신천지'의 '이만희'같은 별종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넓은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의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단을 살펴 보는 것은 기독교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가장 분명한 증거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아 2천년 넘게 대표적인 기독교 이단으로 알려진 '영지주의'를 살펴 보려고 한다. 어쩌면 지금의 기독교의 모습이 2천년의 이단 정죄의 시작으로 부터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4세기 이후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영지주의’를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이단이라고 전한다. 그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직접 기록한 문서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대표적인 초대 교부인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가 쓴 영지주의에 대한 기록을 의존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영지주의를 기독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이단으로 정죄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영지주의와 기독교


영지주의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가던 때 쯤 생겨나 2~3세기경 가장 번창 했다. 그러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초대 교부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고 5세기경에 이르러 거의 존재감이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18세기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영지주의 문서들이 쏟아져 나오며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기록에 의존해 평가했던 영지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나그함마디 문서 뿐 아니라 2세기의 다양한 영지주의 문서가 비슷한 시기에 곳곳에서 발굴되며 영지주의 문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영지주의 문서를 연구한 학자들은 영지주의가 초기 교부들이 단정적으로 이단이라고 정의했던 것에 비해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영지주의의 다양성을 고려해 보면 ‘영지주의는 아예 없다는 편이 낫다’는 말까지 하게 된다. 영지주의는 일관된 사상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각각의 영지주의 관련 집단 마다 가르침과 문화와 관습이 달라고, 다양한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혼합주의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런 영지주의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러다 최근에는 영지주의가 유대교의 신비주의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왜냐하면 초기 영지주의 문서에서 발견되는 천사들의 위계, 주술과 주문, 상징 등의 특징이 유대교의 특징과 대단히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유대교의 신비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영지주의는 2세기의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 이집트의 헤르메스주의의 주술적 조합, 조로아스터교의 선과 악의 극명한 대립, 페르시아와 인도 철학의 깨달음과 영혼의 윤회 등의 다양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영지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기독교였다. 그래서 영지주의는 2~3세기 기독교의 성장과 더불어 강력하게 성장하게 된다. 기독교가 영지주의의 나쁜 영향을 받아 기독교 이단이 탄생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기독교가 영지주의에 다양한 영향을 준 것이었다. 학자들은 특히나 2~3세기 기독교와 영지주의는 상당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영지주의는 기독교가 태동하던 땅에서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태어나고 성장하고 꽃을 피웠다. 그래서 영지주의가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곳은 바로 ‘기독교 영지주의’였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이 18세기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의 상당부분이 2세기 기독교 영지주의 문서였다. 그리고 기독교 영지주의 문서에는 스승인 예수가 자신의 제자공동체와 나눈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이런 나그함마디 문서는 예수의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지만 기독교 이외의 다양한 사상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하다. 그러니까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과 이집트의 사상을 혼합해 태어난 영지주의는 1세기와 2세기에 세상을 강타한 기독교의 영향을 받게 되며 그 당시 철학과 문화에 깊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한편 2세기~4세기의 영지주의를 이단이라 정죄했던 교부들은 영지주의 문서가 후대의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예수의 가르침인양 위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 문서의 예수의 모습은 거짓이며 가르침 또한 왜곡되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서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그래서 로마의 시민이며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의 전문가였던 바울이 자신의 해석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재해석 한 것이라면, 그리스 철학만큼 그 당시 큰 사상의 흐름이었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해석으로 쓴 문서가 완벽한 이단 문서라고 정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일까? 



영지주의는 악마의 속삭임 이었나? 


보편적으로 영지주의는 최상위 신이 있고, 창조신이 있고, 인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상위 신은 완벽한 존재인데 창조신이 제멋대로 세상을 창조해 불완전한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신의 불완전함을 넘어서 최상의 신에게로 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이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이나 학습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깨달음, 영적 체험 같은 감성적인 영역이었다. 


로마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정통 교회는 그때까지만 해도 개인적인 구원 보다는 선민이라 여겼던 민족의 구원 개념이 교회를 통한 구원 개념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개인의 깨달음과 체험을 통해 직접 신과 하나가 되는 구원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교회나 민족 이라는 집단을 통한 구원이 아닌 개인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가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아닌 개인의 구원만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허물고 성직자의 권위를 흔드는 이단의 사상이었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는 현세보다 이데아 즉 영적세계가 중요했고, 그래서 세상의 질서, 체계, 조직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여기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세상은 선과 악의 극명한 대립인데 선은 오직 최상신이 있는 영적인 세계에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영지주의 분파 중에서는 기독교의 예수가 악한 육체로 존재 했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정통교회가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보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하지만 나그함마디 문서에 등장하는 기독교 영지주의 문서에는 예수를 스승으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아마 나그함마디 문서에 있는 기독교 영지주의 문서를 쓴 이들에게 이 문서를 어떻게 집필하게 되었냐고 물어보면 영적인 계시를 통해 적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이 어떻게 쓰인 것이라고 묻는다면 성경 저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쓴 것이라고 고백 할 것이다. 빨간색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다 빨간색으로 보이고 그래서 큰 일 났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실상은 세상이 빨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안경을 벗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예수가 인간으로 온 것을 부정한 영지주의자들도 존재 했지만,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 영지주의자들도 있었다. 기독교를 부정하고 박해했던 그리스 철학자들도 있었지만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을 활용한 이들도 있었다. 바울 뿐 아니라 초기 교부들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로 재해석한 인물들 이었다. 그러니 최소한 영지주의와 기독교 영지주의는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도 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영지주의를 한 가지 안경으로만 보고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악마의 속삭임으로만 보려고 했던 것 일까?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잘 알아서 그랬을까? 



희생양 혹은 마녀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속성은 영적인 것이 선이고 세상은 악하다는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이다. 여기에 진리는 은밀하게 소수에 의해 전파된다는 생각이 더해 졌다. 그래서 영지주의 자들은 악한 세상을 등져야 했기에 금욕적인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악한 세상을 따르지 않게 영적인 깨달음과 체험을 통해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고, 이런 체험과 삶을 통해 진리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은밀한 소수를 통해 이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2세기 대표적인 영지주의 이단으로 정죄 받은 ‘마르시온’은 정통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 특히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벗어나 유대교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전통과 로마의 제국주의에 물들어 세속적으로 복음을 변질 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유대교의 전통이 담긴 구약 성경과 복음서를 제외한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한 정경 작업을 하며 기독교 최초의 종교개혁 운동을 시도한 인물이다. 특히 마르시온은 2세기 유대교와 로마의 전통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고 여성 사제를 세우는데 앞장서며 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물론 정통교회가 지적하는 문제점도 있었지만 만약 그가 여성 리더십을 주장하지 않고 정통 교회의 리더십을 존중 하고 타락한 교회의 개혁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단으로 정죄 되었을까?   


이런 의문을 갖는 이유는 12세기에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12세기 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며 등장한 ‘카타리파’는 부와 권력에 빠진 교회와 성직자들과 달리 철저한 금욕주의를 실천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들 카타리파가 초기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종교인 마니교의 교리와 유사하다며 영지주의 이단으로 정죄한다. 하지만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와 달리 금욕적인 모습으로 순수함을 지향하던 카타리파를 보며 대중들은 열광했다. 그래서 교회는 카타리파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켜 이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또다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16세기 종교개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중세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태동하게 된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마르시온의 종교개혁 운동이나 카타리파의 종교개혁과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했다. 종교 개혁 역시 영지주의 운동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통 교회를 전복시키기 위한 영지주의의 끊임없는 도전의 연장선상 이라는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성서를 성직자만 읽고 가르칠 수 있다는 전통을 뒤 엎고 모든 이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성직자들의 권위의 핵심 이었던 성서 해석권을 무너뜨리며 대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지주의는 태생부터 혼합주의였고, 워낙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 영지주의의 신화에서 크게 영감을 받아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고, 심지어 현대의 프리메이슨 운동에도 영지주의의 영향이 미쳤다고 보고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에서 영지주의는 초대 교부들의 이단 정죄에만 기대어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악마의 속삭임으로 단정지어 왔다. 그리고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어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세기 교부들의 생각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려 하지 않고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희생양’이 필요했던 이들에게 더 없이 좋은 희생양이 되었다. 

어쩌면 권력이 되어버린 종교가 2천년이 넘도록 자신의 위기 때 마다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희생양’이 영지주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첫 모델이 예수의 수제자 ‘막달라 마리아’였고, 

중세에는 ‘마녀’였던 것처럼...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치부하고 공과 과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아 교회가 얻은 것이 많을까? 잃은 것이 많을까? 이것이 ‘사실’이다 주장하기 보다는, 무엇이 ‘진실’일까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종교가 가져야 할 중요한 미덕이 아닐까? 


** 이 내용은 도서 송혜경 저 <영지주의, 그 민낯과의 만남>을 비롯한 몇권의 도서를 참고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의 영상을 참고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BbmNmFgQMnk&t=1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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