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초기 기독교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현재 이집트 문화권인 알렉산드리아, 이스라엘 문화권인 예루살렘, 터키 문화권인 안디옥, 그리스 문화권인 콘스탄티노플, 이탈리아 문화권인 로마가 교회의 대표적인 근거지였다. 그런데 이곳이 아닌 변방의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 태어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테르툴리아누스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약 160년경 태어나 225년 세상을 떠난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로마의 침략을 받고 식민지화가 진행되며 라틴어가 강제된 첫 지역으로 제2의 로마라 부리며 전 영역에서 로마의 라틴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아버지는 그런 시대에 총독 관저의 백부장으로 일했다. 그 영향으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법률 공부를 해 로마의 변호사가 된다. 당시 세상을 지배했던 로마의 대표적인 사상이 바로 ‘로마법’ 이었다. 로마는 로마법이야 말로 세상의 기준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로마와 로마법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발전한 ‘서방교회’와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동방교회’가 초기 기독교가 갈라지게 되는 가장 극명한 기준이 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러한 로마법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해석해 ‘서방교회’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로마법을 기준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기독교를 이해한 그는 공리주의적인 기독교를 표방하게 되고, 이는 훗날 서방 교회 즉 로마 가톨릭이 상당히 공리주의 성향을 띠게 되어 종교 개혁의 빌미가 되는 ‘은총론’과 충돌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였던 것이다. 아테네라는 말은 바로 그리스철학을 말하는 것이었고, 기독교를 그리스철학으로 이해하려 했던 소위 ‘동방교회’의 사고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을 하며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를 왜곡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북아프리카는 기독교 박해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었다. 로마의 공격에 식민지가 된 북아프리카는 1백년 가까이 로마의 식민지 정책을 통해 그 지역의 문화를 뿌리 채 뽑아 라틴문화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 지역에서 로마의 녹을 먹던 아버지를 보며 로마의 법을 공부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강직한 성격에 법을 공부한 그는 법정에서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며 전환점을 갖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강직하고 정의롭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했던 로마의 문화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끊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간혹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빈번히 벌어지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스스로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고 아무런 변명 없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기독교인들을 대신해 변호의 글을 남긴다. 그의 글에는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면 안 되는 이유를 변증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변증한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 이라는 말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자신의 신앙 고백일 뿐 아니라 자신이 변호사로 법정에서 목격한 사실에 대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어간 순교자들이 교회의 확정과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대해 장 피에르라는 신학자는 “진리에 미친 자”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로 대단히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로마의 법률 학자이며 북아프리카의 엄격한 신학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이 세속화 되고 있다며 도덕적, 윤리적 수준 자체가 낮아진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을 막지 못하면 곧 배교로 향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극장에 가거나 검투사의 싸움을 관람 하는 것을 금지해야 하고,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하거나 아고라의 토론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독특한 금욕을 내세우기도 했다. 성서에서 결혼을 허락 했지만 결혼 생활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결혼을 했지만 부부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종교적인 성숙을 보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은 현재 가톨릭 사제들의 독신주의의 시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그는 독특한 금욕주의를 주장하며 교회의 타락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며 자신만의 로마 법률에 근거한 기독교 체계를 만들어 갔다. 그러다 ‘마르시온’이라는 기독교 초기의 인물과 논쟁을 펼치며 그를 기독교 최초의 이단으로 정죄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신은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신이고 신약의 신은 사랑의 신이라고 주장하며 구약을 배제하고 유대교의 전통이 있는 복음서를 제외하고 바울이 쓴 편지를 중심으로 정경을 발표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마르시온의 구약과 신약의 신이 모순된다는 주장에 대해 테르툴리아누스는 “나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해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삼위 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세운 인물은 4세기 교부 아타나시우스 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이 개념을 말하지 않았다면 4세기에 체계화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인격체로 보았다. 이것은 로마법의 개념이기도 했다. 로마에서 성인 남자는 인격체 이지만 여자, 아이, 노예는 인간이긴 해도 인격체가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독립성을 띤 책임자인 인격체로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인격체가 친밀한 관계성 속에서 하나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은 로마의 신과는 달리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에게 신앙은 신과 얼마나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없는가? 로 구분되는데, 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철저한 금욕적인 삶이 요청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테르툴리아누스가 말년에 몬타누스파에 빠졌다고 전해지는데 몬타누스파는 초기 기독교가 이단으로 정죄했던 곳이기도 하다. 마르시온의 이단 정죄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교회를 변증했던 그가 시간이 지나고 몬타누스파에 빠졌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기도 하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몬타누스파에 귀화 한 것인지 아니면 몬타누스파의 개혁적이고 금욕적인 측면을 옹호해 주었던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은 이런 이유로 테르툴리아누스를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가 믿고 전파하는 것이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은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전승 받았고,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권위를 받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 받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 밖으로 부터의 그 어떤 진리도 받아들여서는 않된다고 외치며 ‘마르시온’의 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서방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지금 까지 로마 가톨릭의 중요한 인물로 인정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과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이단’에 빠진 인물로 낙인 찍혔던 것일까?
** 더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세요. https://youtu.be/ICJEJ2ROy4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