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삼총사의 추석맞이 멍빨
멍빨을 아시나요?
개집사라면 ‘멍빨’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 멍빨은 흔히 ‘멍멍이 빨래’의 줄임말로 개를 목욕시킨다는 말이다. 왜 멍빨이냐 하면.. 목욕보다는 빨래에 가깝다.
금동이는 마당에 살아서 1년에 두 번(설날, 추석)
명절맞이 멍빨을 당하는 편이다. 목욕탕에 데려오는 순간 ‘내가 뭘 잘못했나요?’ 표정이 되던 금동이.
개의치 않고 미지근하면서도 살짝 뜨뜻한 무릉도원 물온도를 맞추고 털을 적신다.
첫 목욕 때 질색팔색 도망가던 금동이는 이제야
가만히 있어야 금방 끝나는 것을 안다.
이번 추석에는 씻기지 말까 생각했지만
추석이 다가오면 신기하게 더러워진다.
이공이 역시 ‘내가 뭐 잘못했냐’ 표정이 되었다.
브런치에 글 쓸 때 쓰려고 찰칵- 사진을 찍다
굳어가는 표정에 슬며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열심히
주물주물 거품을 내었다.
멍빨을 하면 깨끗해져서 집에서 며칠 잘 수 있는데
이공이는 이 기회에 집에 눌러앉을 계획인지,
추석이 끝나고도 산책이 끝나면
곧장 집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라고 주둥이로 문을 가리켰다. ‘열어~’
손에 절대 잡히지 않던 꼬미는
추석이 지나고 비가 많이 오던 날
금동이를 따라 제 발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난 꼬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도 오늘 멍빨이야~‘
꼬미는 생각보다 목욕을 잘했고, 그 뒤로 용기가 생겼는지 현관문 앞에서 누워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덜 무서워졌는지 더 가까이 다가오기도 한다.
개나 사람이나 두려움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법.
그렇게 개들의 추석이 무사히 지나가고
고양이들의 추석은.
터줏대감 춘배와 바보 냥이들
우리 집 터줏대감 춘배는 요새 새로운 고양이들이
오면 집주인 행세를 한다.
흰냥이 외 다른 냥이가 오면
사료도 못 먹게 하고 자기 밥을 지키는데,
오는 고양이들이 왜 하나같이 바보인지.
바보 고양이들만 우리 집에 오는 것 같다.
하루는 춘배보다 덩치가 두 배 큰 노랑이가 오더니
그 큰 덩치로 춘배 눈치를 보며, 사료는 못 먹고
옆에 물만 할짝거리는데.
노랑이를 보고 있자면 덩치 큰 바보가 생각난다.
나를 향해 불쌍한 눈빛을 발사하며
야옹야옹 거리는데 해석이 어려웠다.
끝까지 사료를 못 먹길래 치워버렸다.
사료를 안치우면 고양이들이 늘어나서
춘배랑 흰냥이가 올 때만 꺼내준다.
대신 다른 고양이들이 춘배가 밥 다 먹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냥 먹게 둔다.
흰냥이는 춘배바라기이자
애교냥이가 되었다.
가끔 내 손가락을 툭 치고 한번 깨물었다.
자기는 놀자고 피 안 나도록 살짝 문 것인데
고양이 이빨이 얼마나 뾰족한지 난 아파서
악 소리를 질렀다.
흰냥이는 마당에 오는 타이밍을 못 맞춰서
개삼총사에게 쫓긴 적도 있다.
막내 강아지 꼬미만 있을 때는
의기양양 누워 쉬기까지 하면서
형 강아지들을 보면 꽁지 빠지게 도망간다.
춘배는 타이밍을 잘 맞춰서 개삼총사와는
잘 마주치지 않는다.
흰냥이는 아직 어린이인지, 집 마당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상가에도 들어와 보며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양동이(밑 사진 왼쪽)
안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새벽에
노란 조명빛이 비치는 두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춘배가 암컷이면 우짜지(이름을 춘배라 지어버려서 그게 자꾸 걱정된다.) 쓸데없는 걱정도 하고, 흰냥이 중성화를 해야 하나 현실적인 고민에 휩싸인다.
춘배는 귀 한쪽이 잘려 중성화 표시가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밥을 준 것인데
중성화가 안 된 흰냥이까지
터줏대감의 부인이 되어 이 집에 살게 되었다.
이러다 마음에 안 들면 떠나갈 수도 있는
고양이들이지만,
개삼총사에게 쫓겨도 그때뿐
다시 우리 집 마당에 누워있는 길냥이 커플이다.
가끔은 이 두 마리가 고대 이집트의 귀족 고양이인데
길냥이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환생한 게 아닌가
그런 착각도 든다.
새벽마다 우리 집 마당을 소극장으로 만들어주는
두 고양이들이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지
감상에 빠진다.
개는 긴 여정의 미학,
고양이는 지금 이 순간의 미학을 보여주는
생명체란 생각이 든다.
개랑 있으면 앞으로 다가올 날이 궁금하기도 하고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면 참 길었구나 생각이 든다.
또 고양이랑 있으면 반복되는 하루 속
별 다를 것 없는 그 순간이 색다르게 느껴진다.
갑자기 내가 이 순간, 바로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게 와닿는다.
결론은 둘 다 막상막하로 좋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