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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Mar 15. 2017

11 어둠과 빛 : 플라톤 1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거짓된 세계

     

어느 봄에 나는 8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앉은 대학 강당에서 호메로스에서 칸트까지 이어지는 윤리학의 역사를 강의했다. 한 학기 동안 진리와 선, 자유에 관한 담론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학생들은 강의도 듣고 숙제도 내고 페이퍼도 썼다. 드물지만 질문도 했다. 일정대로 순조롭게 수업이 진행되었고 출석부 정리도 이상이 없었다. 어느 대학에서나 볼 수 있는 ‘멀쩡하고 그럴듯한’ 수업 광경이었다.  

기말고사를 치른 날, 나는 답안지를 걷어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몇 장 읽다가 내 실수를 직감했다. 사람은 자기 경험을 미루어 남을 보는 법. 나는 대학시절의 경험만 갖고 시험 감독을 했는데, 그 바람에 중요한 점을 놓치고 말았다. 요즘 학생들에게는 스마트폰이 있다는 것을. 학생들이 고전 윤리학 이론을 적어놓은 문장에는 첨단 기기의 도움을 받은 커닝의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번 학기 윤리학 강의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그렇게 실천하는 것은 불의를 저지를 수 없는 무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지요. 이 점을 가장 잘 이해하려면 머릿속으로 다음과 같이 가정해 보면 됩니다.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각각에게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 다음에, 각자의 욕망이 각각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그들을 따라가며 관찰해 볼 수 있을 겁니다.”(플라톤, 박종현 옮김, <국가>(서광사, 1997), 2권 359b-c.)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글라우콘이라는 청년이 한 말이다. 글라우콘은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 유명한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꺼낸다. 어떤 양치기가 우연히 반지 하나를 발견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반지는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신통력이 있는 요물이었다. 양치기는 반지의 힘을 빌려 왕비와 내통하고 왕을 살해한 뒤 스스로 왕이 된다. 글라우콘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만약에 이런 반지가 두 개 생겨서 하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의한 사람이 끼게 된다면, 이런 경우에 정의 속에 머무르면서 남의 것을 멀리하고 그것에 손을 대지 않을 정도로 철석같은 마음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플라톤, <국가>, 2권 360b.)     


나도 가끔 학생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이 기게스의 반지를 갖는다면 어디에 쓰고 싶나요?” 어떤 얼굴에는 슬며시 미소가 비치기도 한다. “아, 입 밖에 내진 말고 생각만 하세요. 서로 상처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 학생들은 멋쩍은 듯 깔깔 웃는다. 긴 말 필요 없이, 그 웃음이 글라우콘에게 동의를 표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반지를 꼈을 때와 끼지 않았을 때 행동에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글라우콘에 따르면 이런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모여서 산다. 그런데 서로 해를 가하면 손해니까 해를 가하지 않기로 약정을 맺는다. 글라우콘은 이것이 이른바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해를 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를 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만약 은밀하게 불의를 범해서 은밀한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불의를 행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글라우콘의 형 아데이만토스도 이렇게 덧붙인다.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그리고 누군가를 돌보는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도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긴 하는데, 그러는 그들은 올바름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해 생기는 평판을 찬양하는 것입니다.”(플라톤, <국가>, 2권 362e-363a.)     


그렇다면 세계는 겉보기에는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속내는 결국 거짓투성이란 말이 아닌가? 나는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고 불의를 범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내 삶은 위선에 불과한 걸까?     


동굴 속 그림자     


이 똑똑한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 형제에게 동생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집안 좋고 잘생긴 데다 글 솜씨도 뛰어나고 체격도 좋은 청년이었다. 아테네의 많은 청년이 그랬듯이 플라톤도 정치의 장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나도 젊은 시절 정말 많은 사람과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난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면 곧바로 나라의 공적 활동에 뛰어들겠노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플라톤, ‘일곱째 편지’, 강철웅‧김주일‧이정호 옮김, <편지들>(이제이북스, 2009), 324b.)
플라톤

두 형의 영향이었을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난다. 그 역시 소크라테스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와 비극을 곧잘 쓰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난 뒤에 습작 노트를 불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따라다니며 철학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소크라테스는 이미 60대였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크리톤이나 일찍 사망한 카이레폰은 접어두고라도 아이스키네스나 아폴로도로스 같은 제자들에 비해서도 플라톤은 막내 급이었다. 하지만 이 총명한 청년은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한껏 흡수했다. 그러다 갑자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소크라테스가 고발을 당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무슨 운명에선지 또다시 몇 사람의 권력자가 우리의 친구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것도 가장 불경한 그리고 누구보다도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죄목을 씌워서 말입니다. 즉 그들은 그를 불경죄로 고발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유죄표를 던져 사형에 처하게 했던 것입니다.(플라톤, ‘일곱째 편지’, 325b-c.)     

스승의 죽음이 플라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에 딱히 불만이 없었는지, 자신이 사형을 당한 것은 ‘아테네의 법이 잘못되어서라기보다 사람들이 판결을 잘못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달랐다. 그는 패전 이후 아테네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결국 지금의 나라 일 전체 상황과 관련하여 그것들이 온통 잘못 다스려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플라톤, ‘일곱째 편지’, 326a.)     


플라톤에게 세계는 자신의 꿈을 펼칠 장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세계가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세계일까?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몇몇 사람이 이상하다면 묵묵히 내 길을 가면 된다. 그런데 세계 자체가 이상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플라톤의 세계 인식은 비관적이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한 아테네였지만 조국에 대한 플라톤의 눈은 냉철했다.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플라톤, <국가>, 7권 514a.)      


플라톤의 눈에 비친 아테네, 아니 인간 세계의 모습은 죄수들이 갇혀 있는 지하 동굴 같았다. 동굴 안 죄수들은 마음대로 머리를 돌리지도 못하고 앞만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플라톤이 주목하는 것은 신체의 결박이 아니라 정신의 결박이다. 가장 자유로운 나라라고 자부하던 아테네였지만, 플라톤이 보기에 아테네인들은 정신이 결박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네. 또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고 이 길을 따라 담이 세워져 있다고 상상해 보게. …… 또 상상해 보게나.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물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그리고 이런저런 재료로 만들어진 사람이나 동물의 상들을 담 위로 쳐들고 담을 따라 지나가는 걸 말일세.”(플라톤, <국가>, 7권 514b-515a.)      


결박당한 사람들의 눈앞에서 이 물건들의 그림자가 동굴 벽에 비친다. 손으로 여우나 오리 모양을 만드는 그림자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그림자놀이를 할 때 우리는 벽에 비친 오리 형상이 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달랐다

.      

“이런 사람들이 인공적인 제작물의 그림자 이외의 다른 것을 진짜라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걸세.”(플라톤, <국가>, 7권 515c.)      


눈앞에 보이는 허상을 진짜로 믿고 살아가는 세계. 그것이 플라톤이 그린 동굴 속 세계였다. 이는 플라톤이 생각한 현실 세계의 모습이기도 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세계가 이토록 거짓과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크라테스는 육신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플라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추악한 이승을 떠나 내세로 갈 것을 기대해야 할까? 아닌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그린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을 보면,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동경하는 듯한 말을 한다.      


“철학에 올바르게 종사해 온 사람들이 다름 아닌 죽음과 죽어 있음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플라톤, 전헌상 옮김, <파이돈>(이제이북스, 2013), 64a.)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파이돈>은 플라톤 자신의 견해가 강하게 반영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많은 독자는 위와 같은 구절에 근거해서 플라톤이 ‘염세주의자’라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구절에서는 생동하는 세계를 떠나 적막한 죽음의 세계를 동경하는 음침한 수도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 말의 의도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에서 드러난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그들이 생애 동안 다른 아닌 이것을 열망하면서도 정작 오랫동안 열망하고 추구해 온 것이 닥쳐왔을 때 그것에 노여워한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일 걸세.”(같은 곳.)     


‘철학자는 죽음을 동경한다’라는 플라톤의 말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삶을 버리고 죽음을 향하라’고 조언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죽음을 맞이하라’고 삶의 끝자락에 섰을 때 취해야 할 태도를 제안한 것이다.   

플라톤의 태도는 어땠을까? 그는 누군가 동굴을 벗어나 바깥세상을 볼 것이라 믿었다. 그림자와 인공물이 아닌, 살아 있는 자연물이 숨 쉬는 진짜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환하게 비춰주는 태양이 있는 세계.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좋음 자체’가 있는 세계.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동굴에서 위로 올라와 이 진짜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그러니까 나라의 수립자들인 우리의 할 일은 가장 훌륭한 성향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앞서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 배움에 이르도록, 그래서 ‘좋음’을 보게끔 그 오르막을 오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되, 이들이 일단 이 길을 올라, 그것을 충분히 보게 되면, 이제 이들이 허용 받고 있는 걸 이들에게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것일세.”
“그게 어떤 것인데요?”
“바로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할 뿐, 저들 죄수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서 저들과 함께 노고와 명예를, 이게 다소 하찮은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간에,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일세.”(플라톤, <국가>, 7권 519c-d.)     


플라톤은 동굴 밖으로 올라가서 진리를 인식한 사람이 반드시 다시 동굴 안으로 내려가서 동료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 세계에 대해 절망했지만 그 세계를 떠나려 하지는 않았다. 이상의 빛을 품은 채 현실의 어둠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플라톤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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