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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Mar 22. 2017

12 탁월한 나라, 탁월한 영혼 : 플라톤 2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본질에 대한 물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되 빛을 동경한다. 이들이 동경하는 빛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거짓과 허상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사물의 그림자가 아닌 사물의 실상, 즉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의 성향에 관해서는, 이 점에 대해 우리가 합의한 걸로 해 두세나. 즉, 이들은 언제나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때문에 헤매지 않고 늘 [머물러] 있는 저 본질을 자신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배움을 사랑한다는 것 말일세.”(플라톤, <국가>, 6권 485a-b.)     


한 사물에는 여러 특성이 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란 유동적인 성질을 말한다. 가령 내가 갖고 있는 컵을 보면 몇 가지 특성이 눈에 띈다. 높이는 5센티 정도인데 손잡이가 달려 있으며 흰색 바탕에 식료품 가게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런 성질은 유동적이다. 높이가 10센티미터에 손잡이가 없고 노란색 바탕에 스누피 그림이 있는 컵도 있다. 이런 유동적인 성질은 컵의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인 특성일 뿐이다. 

한편 사물에는 “늘 머물러 있는” 특성도 있다. 이것이 사라지면 사물은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본질은 ‘어떤 것을 그것이 되게 하는 고유한 특성’이다. 그렇다면 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을 담을 수 있는 성질’이다. 색깔이나 모양 따위가 어떻든 물을 담을 수 없다면 컵이라 할 수 없다.

컵처럼 언제나 사물의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는 않다. 가령, 승무원의 본질은 무엇인가? 스무 살 무렵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미국 항공사의 비행기였는데), 나는 40대쯤으로 보이는 꽤 뚱뚱한 스튜어디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전까지 ‘날씬한 몸매와 예쁜 얼굴’이 스튜어디스의 본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갖고 있던 생각을 폐기하고 이런 의문을 가졌다. ‘왜 스튜어디스가…… 날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어떤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찾자면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스튜어디스는 다 날씬하고 예쁜 20대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진짜 스튜어디스로 착각한 것뿐이다. 

국가의 본질을 물어보자. 세월호 침몰 후, 팽목항 방파제에는 ‘국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은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문구를 표지에 내걸었다. 사실 국가는 사고 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다. 침몰한 것은 ‘국가’에 의해 출항이 허가된 배였으며 배가 침몰한 장소는 ‘국가’의 영해였다. ‘국가’의 공권력인 해양 경찰이 사고 현장 주위를 맴돌았고,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공직자들이 팽목항을 수시로 드나들며 사진을 찍고 방송에 출연했다. 이 모든 것이 ‘국가’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국가가 어디에 있느냐고, 이것이 국가냐고 물었다. 참사 현장에서 ‘국가의 본질’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통해 본질을 발견하는가     


빛을 등지고 동굴 속 그림자만 쳐다보는 죄수들처럼, 많은 사람은 본질이 아닌 가상에 몰두한다.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컵이든 승무원이든 국가든 그것이 수행하는 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다.       


“말에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오?”(플라톤, <국가>, 1권 352d.)   

  

말[馬]에는 키, 무게, 몸길이, 털 색깔 등등 여러 성질이 있다. 그런데 플라톤이 보기에 이런 성질은 유동적이고 부수적이다. 말이 되게 하는 특성, 곧 말의 본질은 말이 할 수 있는 (에르곤, ergon),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말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든, 그것의 일을 이런 것으로,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그것에 의해서라야만) 할 수 있는 또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보겠소?”(플라톤, <국가>, 1권 352e.)    

 

다른 존재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의 시각으로 세계를 둘러보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저마다 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일 테다. 침대는 내 몸을 받치고 있다. 가로등은 거리에서 불빛을 비추고 있다. 리어카는 폐지를 나르고 있다. 개나리는 꽃을 피우고 있다. 비둘기는 빌딩 위로 날아오르고 있다. 이것이 존재하는 것 각각의 정체성이다. 이렇듯 사물의 본질을 그것의 일에서 찾는 플라톤은 사물의 좋은 상태도 그것의 일에서 찾으려 한다. 

     

“어떤 일이 부여되어 있기도 한 각각의 것에는 탁월함(aretē) 또한 있다고 생각되지 않소? …… 우리는 눈의 어떤 일이 있다고 말하죠? …… 그렇다면 눈의 탁월함 또한 있겠구려? …… 그럼 다음은? 귀의 어떤 일이 있다고 했죠? …… 그러니까 그것의 탁월함 또한 있겠군요? ……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 관련해서는 어떻소? 마찬가지가 아니겠소?”(플라톤, <국가>, 1권 353b.)     


탁월함이라고 옮긴 아레테(aretē)는 ‘훌륭한 상태’를 뜻하는 말로 보통 ‘덕’으로 옮긴다. 그런데 위에서 보듯이 ‘아레테’는 일차적으로 기능적 탁월함을 뜻한다. 이런 용법은 <일리아스>에서도 발견된다. 호메로스는 말의 아레테와 전사의 아레테에 대해 말하는데, 이때 아레테는 ‘자기 일을 잘 하는 상태’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날랜 말들이 다시 잿빛 바다를 향하여 돌아서서 
마지막 주로를 달릴 때는 각자의 기량(aretē)이 뚜렷이 
드러났고, 말들은 몸을 뻗으며 달렸다.(호메로스, <일리아스>, 23권 373-375행.)      


훨씬 못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그는 달리기며 전쟁이며 
모든 재능(aretē)에서 아버지보다 더 나은 아들이었고, 
지혜에 있어서도, 뮈케네인들 사이에서 제일인자들 속에 들었다.(호메로스, <일리아스>, 15권 641-643행.)     

훌륭함이란 자기 고유의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이 가치관은 플라톤에 의해 명확하게 표현된다. 이제 플라톤은 눈의 아레테, 귀의 아레테,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니고 있는 탁월함에 대해 말한다. 어떤 존재가 좋은 상태, 훌륭한 상태에 있는가? 자기 본연의 일을 탁월하게 잘 해내는 존재다.      


통치자의 조건     


플라톤은 나라의 존재도 기능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폴리스가 생겨나는 것은 사람들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살면서도 필요한 것은 많고 다양하지만 이것을 혼자 힘으로 다 얻기는 어렵다. 그래서 한데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기능: ergon)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으로 제공”한다.(플라톤, <국가>, 2권 369e.) 이를테면 농부는 자신의 농사일을, 상인은 자신의 상업 활동을, 다른 구성원 또한 각자 자기의 일을 공동의 것으로 제공함으로써 모두의 삶이 영위된다. 즉 폴리스의 구성원들은 서로 협력 관계(koinonia)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기능은 점점 더 세분화되고, 다양한 문화가 형성된다.

고대 국가의 중요한 업무는 전쟁이었다. 폴리스가 큰 규모로 성장할수록 넉넉한 영토를 필요로 했고, 전쟁은 땅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계층인 ‘수호자들’의 역할이 부각된다. 플라톤 역시, “실로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 할 가장 중대한 일”이기에 “수호자들의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플라톤, <국가>, 2권 374c-d.) 플라톤은 수호자의 자질을 갖춘 이들을 선발, 교육,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hoi aristoi)을 통치자로 선발해야 하고, 이들은 특히 지혜에 탁월해야 한다. 언제나 나라를 운영하는 가장 좋은 길을 택해야 하는 통치자의 직책은 이런 지혜로운 자들이 맡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한 훌륭한 나라는 시민들 각 부류, 곧 생산자, 수호자, 통치자 계층이 자기의 고유 업무를 탁월하게 수행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나라다. 플라톤은 직무에 능한 이들을 길러내기 위해 특히 지배 계층의 교육을 강조한다. 수호자들은 십대 후반에 시가(詩歌)와 체육 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 통치자 후보생으로 선발되면 20대에 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을 배운다. 30세부터는 약 5년간 철학을 익힌다. 그 후에는 15년간 실무 훈련을 받아야 하며,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라를 통치하는 일을 맡는다.

탁월한 업무 수행을 중시하는 플라톤의 관점은 ‘여성들의 수호자 교육’에 관한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아테네에서 여성은 시민의 지위를 갖지 못했고 정치적 공무에 참여할 수 없었다. 뜻밖에도 플라톤은 자질 있는 여성에게 ‘수호자’ 계층이 될 수 있는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당시 관습에서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주장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은 자기 주장이 터무니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치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단언한다. 여성도 수호자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주장은 여성들이 수호자에서 더 나아가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길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관례를 무시하며 여성들의 교육을 주장한 까닭은 무엇인가? 훌륭한 나라는 탁월한 사람들이 활약하는 나라이며, 여성들이 교육을 받아 탁월한 이들이 되면 이는 당연히 나라에 이롭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남녀들이 나라 안에 생기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일이 있는가?”(플라톤, <국가>, 5권 456e.) 플라톤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장을 한 것은 그가 사물의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그 실상을 파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수행하는 일  


모든 사물에 본질이 있다면 사람에게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 생각대로라면 이것 역시 사람의 고유한 일에서 발견된다. 나이나 성별, 외모, 출생지는 부수적인 성질에 불과하다. 본질은 그가 수행하는 일에 있다. 

그렇다면 직업이 가장 중요한 특성일까?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직업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곤 한다. 이때 우리가 보는 것은 그가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벌어들이는 돈이다. 대학 교수는 버스 기사보다 훌륭한가? 그렇게 여긴다면 대학 교수가 버스 기사보다 돈을 많이 벌어서일 것이다. 노르웨이처럼 버스 기사의 수입이 대학 교수와 비슷하다면 어떤가? 혹은 버스 기사의 수입이 더 많다면? 

플라톤은 사람의 가치가 그가 벌어들이는 수입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한다. 수입은 유동적이고 부수적인 가치이며, 본질적인 것은 ‘일 자체’다. 여객선 선장은 일반 승무원보다 봉급이 많다. 그러나 선장은 배가 침몰할 때 승객들을 버려둔 채 탈출하고, 남아서 승객들을 구하려고 고군분투한 사람이 승무원이라면 누가 훌륭하다고 할 것인가?

더 근본적으로 사람의 가치는 그가 사회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을 넘어서 ‘사람으로서’ 수행하는 일에 달려 있다. 버스 기사의 일, 대학 교수의 일, 배관공의 일, 마트 점원의 일을 넘어선 ‘사람의 일’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라고 한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플라톤에게 사람의 일을 묻는 것은 영혼의 일을 묻는 것이다.      

“영혼에는 선생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써도 해낼 수 없는 그런 어떤 일이 있소?”(플라톤, <국가>, 1권 353d.)     


영혼에도 기능이 있다.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 심사숙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일이 있는 모든 것은 제 나름의 탁월함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영혼에도 어떤 탁월함이 있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겠소?”(플라톤, <국가>, 1권 353d.)     


영혼의 탁월함이란 무엇인가? 사실 대답은 단순하지 않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은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의 일과 그 탁월함도 단순한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 능력, 격정 능력, 욕망 능력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혼은 이성 능력을 통해 배우고, 격정 능력을 통해 격정을 발하며, 욕망 능력을 통해 욕구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각각의 능력에는 각자에게 어울리는 탁월함도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성적인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할 때 그를 ‘지혜’롭다고 한다. 격정적인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할 때 그를 ‘용기’있는 사람이라 한다. 자신의 욕망이 분수를 넘지 않도록 다스릴 때 그를 ‘절제’하는 사람이라 한다.      

 

“적어도 이 점은, 즉 실상 이 나라가 올발랐던 것이 그 안에 있는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함’에 의해서였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잊지 않고 있을 게 확실하이. …… 따라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우리 각자의 경우에도, 자신 안에 있는 부분들의 각각이 제 일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올바른 사람으로, 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될 것이라는 점일세.”(플라톤, <국가>, 4권 441d-e.)     


세 능력의 통합체인 영혼의 탁월함은 세 능력의 탁월함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발현된다. 이 전체적 탁월함을 ‘올바름’ 또는 ‘정의’라 한다. 글라우콘도 처음에는 올바름을 일종의 조화로움으로 이해했다. 그가 이해한 올바름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조화로움이었다. 반면 플라톤은 나의 내적 자기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조화로 올바름을 이해한다.     


“올바름(정의)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의 수행’, 즉 참된 자기 자신 그리고 참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영혼의 각 부분이 서로를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마치 영락없는 음계의 세 음정 즉 최저음과 최고음 그리고 중간음처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플라톤, <국가>, 4권 443c-d.)     


화음을 구성하는 음들처럼,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들은 각기 제 몫을 하면서 전체로서 조화를 이룬다. 이것이 플라톤이 생각한 영혼의 탁월함이다. 사람다움이란 이러한 본래적 기능들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문적인 일은 잘 해내지만 인간으로서의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사려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 의지력이 강하지 못한 사람, 절제하지 못하고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은 부수적인 일을 아무리 잘 해내더라도 사람으로서 본연의 일을 탁월하게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반면 훌륭한 삶이란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는 삶, 곧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삶이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이해하는 법을, 나아가 나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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