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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Mar 29. 2017

13 두 세계에 속한 시민 : 플라톤 3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는 인간의 이야기지만 틈틈이 신의 세계도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일리아스>를 낭독극으로 각색하면서 신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모두 빼버렸다. “대단히 박진감 넘칠 만한 순간에 이 대목들은 종종 그런 박진감을 떨어뜨리며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버리기 일쑤”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일리가 있다. 인간 이야기와 신의 이야기는 호흡과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태양이 조용히 흐르는 오케아노스의 깊은 흐름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며 들판 위에 새로운 빛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 양군이 서로 마주쳤다. 

이때는 시신들을 일일이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그들은 상처에서 흘러내린 핏덩이를 물로 씻어 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시신들을 짐수레에 실었다.(호메로스, <일리아스>, 7권 421-426행)     


호메로스가 그리는 인간의 삶은 끝없는 전투의 연속이다. 온종일 몸이 부서져라 싸우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겨우 싸움을 중단하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지.’ 그러나 새로운 태양이 떠올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새날을 시작할 수는 없다. 전투의 흔적을 수습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고통은 오늘의 눈물로 이어지고, 오늘은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신들의 세계는 어떤가? 지상의 인간들은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피를 흘리고 싸우지만 이미 불멸의 존재인 신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남은 일은 기꺼이 영원성을 즐기는 것.     


헤파이스토스가 궁전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는

축복받은 신들 사이에 그칠 줄 모르는 웃음이 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잔치를 벌였다. 

진수성찬을 나누어 먹은 데다 아폴론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포르밍크스를 연주하고 무사 여신들이 번갈아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니 모두들 마음에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호메로스, <일리아스>, 1권 599-604행)     

인간이 영화의 주연이라면 신들은 관객과 같다. 등장인물은 저마다 운명이라는 정해진 각본에 따라 죽을 고생을 하지만 관객은 소파에 드러누워 팝콘을 먹으면서 킬킬거린다. 그 순간 그들은 “마음에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간과 신의 세계의 대비는 플라톤의 저작에서도 나타난다. 플라톤이 바라본 인간 세계는 무지한 죄수들이 어두운 동굴에 갇혀 그림자만 바라보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반면 플라톤이 그린 천상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하늘의 위대한 영도자 제우스는 날개 달린 마차를 몰고 선두에서 나아가면서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다스리고 돌본다네. 그 뒤를 신들과 신령들의 군대가 열한대의 분대로 정렬해서 따라가지. …… 지상의 시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지금껏 천궁 위의 구역을 찬양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에 합당한 찬양을 하지 못할 걸세. …… 색깔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만질 수도 없는 본질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니, 그것은 오로지 영혼의 인도자 지성에게만 보이고 참된 인식의 부류와 짝하는데, 그런 것이 그 구역을 차지한다네.(플라톤, 조대호 옮김, <파이드로스>(문예출판사, 2008), 246e-247d)     


고대인들이 상상한 우주는 신들이 질서 있게 운행하는 천체를 날아다니는 그림 같은 형상이었다. 플라톤이 그린 천상계에서도 신들은 제우스를 선두로 질서정연하게 하늘을 날아다닌다. 이런 장면은 <일리아스>에도 나오는데 천상 세계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천궁 위의 구역”에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 “색깔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만질 수도 없는” 본질들. 호메로스의 신들은 진수성찬을 먹고 술을 마시며 웃음꽃을 피우지만 플라톤의 신들은 진리를 관조하면서 기뻐한다. 지상의 인간은 동굴에 갇힌 죄수처럼 저마다의 소견으로 사물을 바라보지만 천상의 신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참된 존재를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가 있다면 어떤 곳일까? 하늘나라는 인간의 꿈, 희망, 즉 인간이 동경하는 이상적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플라톤의 꿈은 존재의 완성이었다. 따라서 그가 꿈꾼 하늘나라는 완전하고 참된 존재가 있는 곳이었다.     


윤회하는 영혼     


플라톤이 그린 신의 세계는 호메로스의 그것과 다른 모습이다. 한데 둘 사이에는 더 큰 차이가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인간은 신이 누리는 축복에 감히 참여하지 못한다. 신은 ‘불멸의 존재’이고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본래 신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인간의 영혼이 신과 함께하려면 ‘불멸성’을 지녀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가 소멸해도 영혼이 죽지 않고 존재한다. 영혼은 저승에 머물다가 다시 육신을 입은 채 이승에서 살아가고, 육신이 죽은 후에는 또다시 저승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플라톤의 주장은 인식론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즉 사물의 본질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식의 출처를 설명하기 위해 ‘영혼의 윤회’를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있다고 하는가? 아니면 전혀 없다고 하는가?”

“단연코 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어떤 것과 좋은 어떤 것 역시도?”

“어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자네는 그것들 중 어떤 것을 눈으로 본 적이 있나?”

“결코 없습니다.”(플라톤, 전헌상 옮김, <파이돈>(이제이북스, 2013), 65d)     


우리는 정의 자체,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은 눈으로, 즉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 개념을 얻게 되었을까? 영혼이 윤회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은 이것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몇 사람이 인천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 “인천에 야구장이 하나 있죠” 하면 사람들은 ‘야구를 좋아하나 보지? 텔레비전에서 봤나 보군’ 하고 생각할 것이다. “야구장 바로 옆에 관교동이라고, 거기 동부아파트랑 쌍용아파트가 있어요. 걸어서 한 십 분쯤? 예전에는 야구 경기가 7회부터 무료입장이라 동네 사람들이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보다가 6회 말쯤에 야구장으로 가곤 했죠.” 그러면 사람들이 “아, 인천에 사셨나 봐요?” 하고 물을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은 대부분 경험을 통해서다. 그런데 경험 없이 뭔가를 알고 있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야’, ‘저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지’라는 의견은 경험으로 얻게 되지만 ‘정의 자체’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알고 있다. 플라톤은 우리가 경험 이전, 즉 전생에 그것을 배웠으며 그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고 본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학당>의 중심에 서 있는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언제 우리의 영혼이 그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고 나서는 분명 아닐 테고.”

“물론 아니지요.”

“그럼 그 이전이겠군?”

“예.”

“그럼 영혼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기 전에도 몸들과 떨어진 채 있었고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군, 심미아스.”(플라톤, <파이돈>, 76c)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기 전에 영혼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신들이 날개 달린 마차를 타고 하늘의 궤도를 따라 천상계를 순환하면서 날아다니면 인간의 영혼들도 그 뒤를 따른다. 신들과 더불어 영혼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관조하고 즐거워한다.     


순환로 위에서 영혼은 정의 자체를 바라보고, 절제를 바라보며, 인식을 바라보는데, 이 인식에는 생성도 속하지 않고 우리가 지금 있는 것들이라고 부르는 각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일도 없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에 속하는 인식이지.(플라톤, <파이드로스>, 247d-e)     


영혼은 정의 자체를, 절제 자체를, 앎 자체를 목격한다.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변화하는 일들 따위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별적인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다. 영혼은 왜곡되거나 감춰지지 않은 채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는 존재의 진리를 직접 목격한다. 이것이 천상의 세계에서 신들과 함께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신과 달리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의 영혼에도 날개가 있지만 이것은 신의 것처럼 튼튼하지 못하다. 그 때문에 천상계를 날아다니다가 날개가 떨어져 나간다. 날개를 잃은 영혼은 땅으로 추락하고, 육신을 입게 되고, 인간으로서 지상의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삶이다.     

 

자기에게 돌아가는 영혼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이 윤회한다는 것은 소멸하지 않고 존재를 계속 이어간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영혼이 초경험적인 진리를 지니고 있음을 뜻하는 것만도 아니다. 영혼은 두 세계를 오간다. 비유하자면 이중국적을 가진 것이다. 천상계의 시민과 지상계의 시민이라는 두 정체성을 동시에 갖는다. 

두 정체성이 똑같은 가치를 갖지도 않는다. 영혼의 본적은 천상계다. 지상에서 우리의 삶은  비본래적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나 살고 있으므로 이 땅의 시민이다. 하지만 이방인이기도 하다. 본래 천상계의 시민인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신들의 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지상의 삶을 시작하면서 천상계의 시민이라는 본래적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정체성 상실의 가장 큰 징표는 기억 상실이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쓰이는 그것 말이다. 만화 영화 <독고탁 다시 찾은 마운드>에서 고교야구 최고의 투수 독고탁이 기억을 잃고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종업원이 된다든가, 영화 <롱 키스 굿나잇>에서 첩보기관의 전투요원이었던 사만다가 기억을 잃은 후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간다든가……. 이런 영화 속 인물들은 본래 자기를 기억하지 못해서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영혼도 그러하다. 천상계에 있을 때 신들과 함께 진리를 관조했지만 지상에 다시 태어나면서 그것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영혼은 진리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지만 스스로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감각적인 것들에 물들어 살아간다. 정의 자체, 아름다운 자체, 좋음 자체를 망각한 채 정의로워 보이는 것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 좋아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우연히 야구공을 만지게 된 독고탁은 엄청난 속도로 공을 던져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당근도 제대로 못 썰던 서툰 주부 사만다는 어느 날 갑자기 귀신같은 솜씨로 칼을 다루어 남편을 놀라게 한다. 야구공과 칼을 쥐었을 때의 감각이 내재되어 있던 기억을 깨운 것이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천상계에 대한 기억을 깨우는 무언가를 접촉하는 순간이 있다. 아름다운 노래에 흔들리면서 ‘아름다움 자체’에 마음을 열게 되거나 불의에 맞서는 의로운 행동을 보면서 ‘정의 자체’에 대해 열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신과 함께 여행하면서 우리가 지금 있다고 말하는 것들 너머로 눈을 돌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쳐다보았을 때 보았던 것들에 대한 상기이네.(플라톤, <파이드로스>, 249c)     


나의 본래적인 정체성은 천상의 시민이다. 따라서 천상에서 본 것들을 상기하는 것은 참된 나 자신으로 복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리를 추구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기억을 되찾는 일이고, 이것은 참된 자기 자신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지상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은 천상의 기억을 품은 채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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