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선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좋은 삶이란 마음속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총체적으로 좋은 삶’을 추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음의 좋음, 신체의 좋음, 외부 조건들의 좋음이 모두 필요하다고 한 것은 고대인들의 평균적인 상식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그중 마음의 좋음만을 유일한 선으로 간주한 것은 고대인들의 가치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명예를 생각해보자. 호메로스의 영웅들에게 명예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같은 중대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머나먼 트로이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리고 아가멤논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자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전장을 이탈한다. 아킬레우스에게는 ‘명예’라는 형식을 통해 타인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관에 균열이 생긴다. ‘개’라고 욕먹기를 마다하지 않고 일부러 기행을 일삼으면서 사회의 가치관을 거스르는 퀴니코스 철학자들의 행태는 호메로스의 영웅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몰상식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등장한 스토아학파는 명예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무관한 것’으로 분류해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길길이 날뛰는 아킬레우스는 사소한 것에 격분하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남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어떻게 사소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기억하라. 너를 모욕하는 것은 너에게 욕을 퍼붓는 사람이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모욕하고 있다고 하는, 이 사람들에 관한 너의 믿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를 화나게 할 때 실은 너의 머릿속 생각이 너를 화나게 만드는 것임을 알라.(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20)
에픽테토스의 말이다. 노예 출신의 이 철학자는 아마도 남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아킬레우스보다 훨씬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모욕당하는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모욕이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라면 그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모욕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모욕이 내 안에서 비롯한다면 그것은 내가 없앨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모욕은 내 안에서 비롯한다!
걸음마를 연습하던 아기가 넘어지면서 의자에 부딪쳐 운다. 달려온 어른들은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의자를 때린다. “누가 그랬어? 의자가 그랬어? 떼찌떼찌!” 엄마 아빠의 소심한 복수에 아이는 마음이 풀려 울음을 그친다. 물론 어른들은 이런 행동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말 못하는 물건이라지만 의자가 무슨 죄가 있나? 사실상 누구도 아이를 해코지하지 않았으며 아이의 괴로움은 그 스스로 초래한 것임을 어른들도 안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 ‘내 괴로움은 내 미숙함 탓이다’라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어른들은 그 고통의 출처를 외부로 돌려서 간접적으로 아이를 위로하는 것이다. 아이가 좀 더 자라면 알 것이다. 밥을 먹다가 혀를 깨물어 고통스러웠지만 딱히 화를 낼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아이는 자신의 괴로움이 누구의 탓도 아닐 수 있음을 배울 것이다.
아이들만 그렇지는 않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괴로움을 외부 탓으로 돌리는 습성이 있다. 이때 무의식적으로 전개되는 논리가 대체로 이렇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에도 원인이 있다. 그런데 이 고통은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통의 원인은 내 밖의 다른 누군가/무엇일 것이다.’ 이 논리에 스스로 설득된 우리는 나에게 일어난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차분히 대응책을 찾기보다는 그 사태의 외부적 원인을 찾아내 그것을 원망하면서 오히려 괴로움을 키우곤 한다.
비철학자의 태도와 특징은 이렇다. 이익이나 손해를 결코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바깥에서 찾는다. 반면 철학자의 태도와 성품은 이렇다. 이익이나 손해를 항상 자신에게서 찾는다.(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48)
살면서 누구나 괴로움을 겪는다. 그런데 스토아 철학자들은 타인을 비롯한 모든 외부의 것들을 ‘내가 부딪친 의자’로 간주한다. 타자가 나에게 위해를 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괴로움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 모욕감도 그렇다. 겉보기에는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에게 위해를 가하여 모욕감을 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욕감은 ‘내가 모욕을 당했다’는 아킬레우스 자신의 판단에서 비롯했으며, 따라서 아킬레우스가 겪은 모욕은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명예나 모욕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사실상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좋고 나쁜 것들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에 따라 좋거나 나쁜 것들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이것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이 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달려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태와 맞닥뜨려도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그래서 해를 입지 않는 사람이다.
상처받지 않는다 함은, 맞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맞아도 손해를 입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이를 당신에게 현자의 특징이라고 제시하겠습니다.(세네카, 「현자의 항덕에 관하여」, 3)
이렇듯 선은 스토아학파에 이르러 외부적 조건이나 관계에 따라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 마음의 작용에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철저히 내면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선에 대한 이런 관점은 세계에 존재하는 불행과 악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대답으로 생겨난 것이다. 삶에서 뜻하지 않은 불행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토아학파는 불운을 겪는 것을 실패한 인생으로 간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만약 타인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좋은 삶이라면,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아킬레우스는 그 자신이 탁월한 전공을 세웠어도 열등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만약 만인에게 존경받으면서 천수를 누리는 것이 좋은 삶이라면 사형 당한 소크라테스는 좋은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스토아학파는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좋고 나쁜 것은 외부적으로 어떤 일을 겪느냐에 결정되지 않고 내면에서 어떤 일을 겪느냐에 달렸다고 역설한 것이다.
선과 악이 내면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스토아학파는 인간 내면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이성적 존재는 상상에 따라 행동한다. 상상(phantasia)이란 어떤 행위에 대해 마음속으로 갖는 인상/관념을 뜻한다. 이를테면 나무는 스스로 ‘오늘쯤 꽃을 피워야지’라는 표상을 떠올리면서 꽃을 피우지는 않는다. 나무가 꽃을 피우는 과정은 필연적인 이법에 따라 발생하는 자연적 과정이다.
반면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일정한 표상을 떠올린다. 이 표상은 마음속에서 모종의 충동(hormē)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충동에 따라 우리는 행위를 한다. 예컨대 내가 밤늦게 책을 읽다가 ‘출출한데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라고 상상을 하면 이 상상이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그에 따라 나는 곧장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상상이 충동을 낳고 충동이 행동으로 발현되는 이 과정은 나무가 꽃을 피우듯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이성이 개입한다. 이성은 내가 떠올린 상상이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 상상이 충동을 거쳐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합의한다. 이것을 ‘이성의 합의’라고 한다. 내가 실제로 라면을 끓이는 행동을 감행한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난 충동에 대해 이성을 통해 합의했기 때문이다. 반면, 라면을 먹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성이 ‘늦은 시간에 라면을 먹으면 속이 거북할 테니 좋지 않다’라고 판단하여 합의를 하지 않는다면 충동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도 이러한 메커니즘에 따른다. 감정이란 과도한 충동이며, 영혼의 비이성적인 동요이다. 이것은 그릇된 상상으로 일어난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점심시간에 잠깐 교무실로 오라’고 하면 나는 온갖 상상을 하면서 마음이 불안해진다. 또는 내가 몰래 짝사랑하던 상대가 어느 날 ‘할 말이 있으니까 이따 보자’라고 하면 나는 온갖 즐거운 상상을 하며 마음이 흔들린다. 스토아학파는 이런 즐거운 감정도 경계한다. 근거 없는 기대로 부푼 마음은 결국 실망감이라는 쓰라린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결국 내 마음이 겪는 감정의 동요는 상상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스토아학파는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판단과 의견을 중단하라고 권유한다.
네 의견을 버려라. 그러면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사라지면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7)
내가 입었다고 여기는 피해는 그 자체로 객관적인 사태가 아니라 실은 ‘느낌’이라는 주관적인 사태다. 그리고 느낌은 나의 판단과 의견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실제로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부르면 왜 불안하고, 짝사랑 상대가 부르면 왜 설렐까? 그 사태를 ‘나쁜 일’ 또는 ‘좋은 일’이라고 판단하는 나의 의견 때문이다.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나쁜 일, 이를테면 죽음과 같은 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을 동요케 하는 것은 사건들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들에 대한 의견과 판단이다. 예를 들어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그 자체로서 두려운 것이었다면 소크라테스에게도 그렇게 보여야만 했을 것이다.) 다만 두려운 것은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마음의 동요와 슬픔 때문에 방해받는다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다시 말해 우리의 의견과 판단에 돌리도록 하자.(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5)
스토아학파는 ‘나에게 달린 것’과 ‘나에게 달리지 않은 것’을 구별한다. 나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세상일, 나에게 닥쳐오는 세상일은 내가 결정할 수 없으므로 내가 좌우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갖는 의견과 판단은 온전히 나에게 달렸으며 내가 주도할 수 있다. 그런데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사태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판단에 달렸으므로 결국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다. 이런 관점으로 스토아학파는 일견 나쁘게 보이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초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의 힘을 갖게 되었다. 어떤 사태에 대해서 초연한 마음을 유지하는 경지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한다. 파토스(pathos), 즉 감정의 동요를 극복한 상태라는 뜻이다.
결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내가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말라. 다만 ‘나는 그것을 되돌려주었다’고 말하라. 너의 아이가 죽었는가? 되돌려준 것이다. 너의 아내가 죽었는가? 되돌려준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땅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그것 또한 되돌려준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서 땅을 빼앗은 사람은 악당이다.’ 하지만 너에게 그것을 주었던 자가 누구를 통해 너에게서 그것을 되찾아가든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이 너에게 맡겨져 있는 동안, 마치 남의 물건을 대하듯이 그것을 대하라. 마치 여행자가 여관을 대하듯이.(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11)
선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관점은 매우 엄격하고 극단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토아학파는 이런 엄격한 도덕관을 내세워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 영역으로 선을 옮겨놓았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삶을 위해 신체나 외부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면 병이 있거나 돈이 없는 사람, 보잘 것 없는 지위를 가진 사람은 훌륭한 삶을 살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노예 출신의 장애인 에픽테토스 같은 이가 현자로 존경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스토아학파는 선을 마음의 일로 돌려놓음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선을 향한 문을 열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