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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Jun 15. 2017

24 행복은 곧 즐거움이다: 에피쿠로스 1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카르페 디엠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시간은 흘러 오늘 핀 꽃이 내일이면 질 것이다.     


학생이 시를 읽고 나자 교사가 말했다. “이 말을 라틴어로 표현하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지. 현재를 붙잡으라,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왜 시인이 이런 말을 썼을까?” 교사는 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냐면 우리의 몸은 언젠가 벌레가 먹게 될 테니까. 이 방에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언젠가 숨이 멎고 차가워지고 죽을 테니까.”


그들이 서 있는 방의 캐비닛 안에는 옛 학생들의 사진이 액자에 들어 있었다. “이쪽으로 와서 과거의 얼굴들을 봐. 저 얼굴들을 여러 번 지나쳤겠지만 자세히 본 적은 없을 거야.” 학생들이 캐비닛 앞으로 다가가서 수십 년 전 이 학교를 다닌 학생들의 사진을 본다. “너희들과 별로 다르지 않지? 머리모양도 같고, 너희처럼 활기가 가득하고, 너희처럼 패기만만하지. 세상이 그들의 것이야. 너희들이 대개 그렇듯이, 자기들이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한 사명을 타고났다고 믿고 있어. 눈이 희망으로 가득하지, 너희들처럼.” 


학생들은 환하게 웃고 있거나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사진 속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무 오래 기다렸을까? 삶에서 자기 능력을 한 점이라도 발휘할 수 있는 그 시기를 놓쳐버렸을까?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사람들은 이미 땅에 묻혀 거름이 되고 있어.” 과거의 얼굴들은 현재의 얼굴들에게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붙잡으라…….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이것이 교사의 첫 수업이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유명한 장면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현재를 붙잡으라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에 정원을 마련해놓고 거기서 작은 공동체를 꾸려 철학을 익히고 가르쳤다. 그에게서 시작된 이 철학운동을 에피쿠로스학파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과 달리 에피쿠로스의 정원 공동체는 폴리스를 개혁하거나 전체 학문의 체계를 완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높은 창공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라고 가르쳤다.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때 가장 먼저 자각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삶이 짧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지금 막 태어난 것처럼 세상을 떠난다.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스토아학파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그것은 인생의 유한함, 곧 죽음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에도 팽창하는 세계 제국 속에서 왜소해진 자의식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것은 먼저 세월의 무상함에 대한 자각으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달리 에피쿠로스는 죽은 후에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한 번 태어나며 두 번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영원을 통틀어 다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당신은 행복을 뒤로 미루고 있다. 앞일을 통제할 수도 없으면서 말이다. 미루는 동안 인생은 허비되고 우리 각자는 여가를 누리지도 못하고 죽어간다.      


우리에게 허용된 삶은 한 번뿐이다. 우리는 막 입학한 것처럼 졸업한다. 막 만난 것처럼 이별한다. 막 태어난 것처럼 죽는다. 이를 몸서리치게 자각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의 최고선이 행복이라고 못 박은 이래, 많은 이들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왔다. 에피쿠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에피쿠로스가 행복 못지않게 중요하게 물은 것이 있다. 대체 우리는 언제 그 행복을 누리는가?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위해 온종일 일하고 귀갓길에 오른 당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다. “오늘 당신은 행복했는가? 나중이 아니고 바로 오늘, 바로 오늘 당신은 행복했는가?”


에피쿠로스의 관찰에 따르면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룬다! 그 나중이 언제 오는지는 알 수 없는데 시간은 깜짝 놀랄 정도로 빨리 흐른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까? 바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바쁜가? 먹고 살기 위해 우리는 늘 바쁘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바쁘다니?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생계 수단을 모은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 죽음의 약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대로라면 우리가 얻기 위해 애쓰는 것들은 ‘목적으로서 좋은 것’이라기보다 ‘수단으로서 좋은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은연중에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시간적으로 이해한다. 현재 우리가 상대하는 것들은 수단이고 목적은 미래의 몫이다. 이를테면 ‘지금’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미래’에 대학에 가기 위해서다. 이런 구도에서 참으로 좋은 것들은 모두 미래의 일이다. 현재는 좋은 것을 준비하는 단계다. 따라서 현재에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는 것은 사치다. 


하지만 이 구도대로라면 현재를 저당 잡아 얻은 미래도 실은 또 다른 미래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현재’가 된 ‘미래’를 ‘또 다른 미래’를 위해 다시 저당 잡힌다. 그런데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진짜로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우리의 삶은 ‘언제나’ 빚진 삶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에피쿠로스는 ‘바로 지금’에 주목할 것을 가르친다. 카르페 디엠.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바라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망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도 행운의 선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즐거움, 행복의 시작과 끝

  

바로 지금 실현되어야 할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미래에 올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런데 여기에 난점이 있다. ‘현재’는 참으로 존재하는 시간이지만, 고정되어 있는 시간이 아니다. ‘지금’이라고 시점을 찍는 순간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현재는 언제나 움직이는 것,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가장 큰 축복은 생성되는 동시에 향유되는 것이다.” 생성되고 소멸되는 동시에 향유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즐거움이다.      


음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려고 노력한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44쪽)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으면 즐겁다. 그런데 이 즐거움은 씹는 동안만 향유된다.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생성되었다가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입 안에서 음식을 한 시간씩 씹는다고 즐거움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앉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식사를 한다고 즐거움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식사를 즐기는 사람은 식사 시간을 늘리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식사하는 그 순간순간을 즐기려 애쓴다. 


다른 예를 들자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 노래 부르기가 아무리 즐겁다 해도 노래 부르는 순간을 정지시켜 놓은 채 노래를 즐길 수는 없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소절이 있다고 해서 그 소절만 고정시켜 놓기 어렵다. 노래는 흘러가고 지나가야만 향유된다. 노래의 본성은 생성되고 소멸되어야만 향유될 수 있는 것이다. 즐거움도 그렇다. 그리하여 현재라는 시간에 집중할 것을 권하는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이 곧 즐거운 삶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즐거움이 행복한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기로 즐거움은 우리가 타고난 첫 번째 좋은 것이며, 우리는 뭔가를 선택하거나 기피하는 행동을 할 때 즐거움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어린 아이의 행동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은 다른 무엇보다 일차적으로는 쾌락을 기준으로 해서 이뤄진다. 이러한 관찰에 따라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삶의 원리라고 보았다. 이것이 고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에피쿠로스를 입방아에 오르게 했다.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뭐 이런 천박한 말이 다 있담!” “자연적인 본능에 따르는 것이 행복이라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게 뭔가?” 뭐라고 평가하든 간에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윤리학의 역사에 새긴 지울 수 없는 흔적임은 틀림없다. 철학자들의 아름다운 삶, 탁월한 삶 등을 찬양할 때 에피쿠로스는 즐거운 삶을 권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은 즐거움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아름다움과 탁월함 등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쾌락>, 40쪽)   

   

에피쿠로스

물론 에피쿠로스도 쾌락이 무조건적으로 좋으며 고통이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볼 만큼 단순하지는 않았다. 이미 소크라테스가 구분했듯이 나에게 좋게 여겨지는 것이 실제로도 좋고 나에게 나쁘게 여겨지는 것이 실제로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을 주고 운동을 하는 것은 괴로움을 주지만 사람들은 때로 맛있는 음식을 멀리 하기도 하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기도 한다. 내 입에 즐거운 음식이 건강에는 나쁠 수 있고, 내 몸에 괴로운 운동이 건강에는 유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쾌락을 선택하지 않으며, 어떤 때에는 (가령 그 쾌락의 결과로서 더 큰 불편이 생겨날 때) 많은 쾌락들을 그냥 지나친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많은 고통들이 쾌락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고통을 참으면 더 큰 쾌락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양자를 비교함으로써 또한 이득이 되는 것과 해가 되는 것을 고려해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선을 악으로 다루며, 반대로 악을 선으로 다루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왜 쾌락을 지나치고 고통을 감수하는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그것은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해, 또는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건강을 위해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왜 건강을 추구하는가? 건강한 상태가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쾌락과 고통에 대해 이득과 해를 고려하고 판단할 때, 그 판단의 기준 역시 쾌락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피쿠로스에게는 쾌락이 시작이요,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물음은 단순하지만 치명적이다. 삶에는 많은 좋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성취한다 해도 즐겁지 않다면 대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즐거움이라는 것이 다른 가치를 위해 그렇게 쉽게 무시될 수 있는가? 다른 가치들을 추구한 뒤에 자투리 시간에 잠시 누리는 것이 즐거움인가? 그러나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이 오히려 즐거움 아닌가? 따라서 모든 가치가 즐거움을 위해 복무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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