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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Feb 08. 2017

06 소멸의 운명 앞에 선 인간: 호메로스 3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아킬레우스의 선택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용감하게 싸워 얻고자 한 것은 명예다. 왜 명예일까? 어떤 가치의 의미는 그것과 대비되는 것과 견주어볼 때 잘 드러난다. 이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킬레우스다. 호메로스는 명예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운명을 독특하게 설정하였다.      


“나의 어머니 은족(銀足)의 여신 테티스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나를 죽음의 종말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소. 

내가 만약 이 곳에 머물러 트로이아 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만약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죽음의 종말이 나를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일리아스>, 9권 410-416행)     


아킬레우스는 양자택일의 운명을 부여받았다. ① 끝까지 전투에 임한다면 큰 공을 세워 불멸의 명성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는 못한다. ② 전쟁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는 대신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고향에 돌아간다면 프티아 지역의 통치자로 오랫동안 부와 권력을 누릴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어쩌면 이 선택이 <일리아스>를 끌고 가는 가장 큰 물음일 수도 있다. 대답은 간단치 않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아 전쟁에 참여한 것을 보면 일단 그는 불멸의 명성을 택한 셈이다. (이 과정도 단순치는 않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아들이 단명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테티스가 트로이아 원정대가 결성될 때 아킬레우스를 숨겨놓았는데 오뒷세우스가 그를 찾아내서 원정대에 합류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가멤논과 다투면서 심사가 뒤틀린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선택을 회의한다. 그는 전투에 참여하기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결국 아킬레우스가 최종 결단을 내리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을 대신해서 전장에 나갔다가 헥토르의 손에 죽게 된 것이다. 슬픔과 분노에 몸을 떨던 아킬레우스는 결국 출전할 결심을 굳히고 어머니에게 말한다.       


“이제 저는 나가겠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헥토르를 

만나기 위해서. 제 죽음의 운명은 제우스와 다른 불사신들께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때에 언제든지 받아들이겠어요. 

…… 하나 지금은 훌륭한 명성을 

얻고 싶어요.”(<일리아스>, 18권 114-122행)     


아킬레우스는 아카이아 군 진영으로 돌아가 복귀를 선언하고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급히 화해한다. 그러고는 전차를 타고 전장으로 달려간다. 이때 아킬레우스는 말 두 마리가 끄는 이륜차를 탔는데, 그중 크산토스라는 말이 이런 말을 한다.       


“강력한 아킬레우스님!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가 그대를 무사히

데려다줄 것이나 그대에게는 파멸의 날이 임박했어요.

하지만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위대한 신과 강력한

운명에게 있지요. …… 그대는 한 신과 

한 인간의 손에 전사할 운명이에요.”(<일리아스>, 19권 408-417행)    

 

크산토스가 아킬레우스에게 “파멸의 날이 임박”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킬레우스의 특별한 운명 때문이다. 이제 전투에 나가면 아킬레우스는 결국 헥토르와 마주칠 것이고, 끝내 그를 죽일 것이다. 이는 아킬레우스에게 가장 큰 명예를 안겨주는 공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승리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이 사실을 일깨워준 크산토스에게 아킬레우스는 화를 내며 꾸짖는다.     


“크산토스여! 내게 왜 죽음을 예언하는가? 정말 너답지 않구나.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죽을 운명임은

나도 잘 아는 바다. 그렇다 하더라도 트로이아인들에게 전쟁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해주기 전에는 나는 결코 쉬지 않으리라.”(<일리아스>, 19권 420-423행)     


아킬레우스의 선택은 전장으로 돌아가 적들을 맹렬하게 쓰러뜨리는 것이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와 맞닥뜨리고 그를 쓰러뜨린다. 


아킬레이온 성 메인홀의 상단부 프레스코화. 승리한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성문 앞에서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 뒤에 매달고 가는 모습.

죽음과 운명


아킬레우스는 왜 이토록 명성에 집착할까? 아가멤논과 다툰 직후에 아킬레우스가 어머니 테티스 여신에게 쏟아내는 말을 들어보자.      


“어머니, 어머니께서 저를 단명하도록 낳아 주셨으니, 

높은 곳에서 천둥을 치시는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는 제게 명예만이라도 

주셨어야 할 거예요. 하거늘 지금 그분께서는 작은 명예도 

주시지 않았어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저를 모욕하여, 제 명예의 선물을 빼앗아 가졌으니 말예요.”(<일리아스>, 1권 352-356행)     


아킬레우스는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명예로운 삶을 바란다. 왜냐하면 자신이 ‘단명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예는 아킬레우스의 짧은 수명에 대한 보상물로 간주된다. 그에게 긴 수명이 주어진다면 그는 온갖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다. 반면 단명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허망할 뿐이다. 하여 아킬레우스는 자신에게 “명예만이라도” 허락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렇게 보자면 명예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일 수밖에 없다.

아킬레우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했다. 원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 천수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선택지가 없다는 듯 말한다. 왜일까? 아킬레우스 앞에 놓인 문제는 사실 ‘죽느냐 사느냐’라기보다 ‘곧 죽을 것이냐, 아니면 나중에 죽을 것이냐’다. 전투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정해진 수명이 (그런 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이든, 우리는 누구나 죽음 앞에 서 있다. <일리아스>의 인물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시 사르페돈이 글라우코스에게 선두로 나갈 것을 제안하는 대목을 보자. 사르페돈이 이어서 하는 말이 있다.     

 

“친구여, 만일 우리가 이 싸움을 피함으로써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운명이라면야, 

나 자신도 선두대열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또 남자의 영광을 높여 주는 싸움터로 그대를 내보내지도 않을 것이오. 

하나 인간으로서는 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무수한 죽음의 운명이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자, 나갑시다. 

우리가 적에게 명성을 주든, 아니면 적이 우리에게 주든.”(<일리아스>, 12권 322-328행)     


싸움이 임박했다. 이 싸움을 피하면 살 수 있다. 피하지 않는다면 죽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삶과 죽음이 숨 가쁘게 오가는 전쟁터에서는 당장의 죽음을 피하는 것이 절대적 목표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르페돈은 더 멀리 바라본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 죽음의 운명은 지금 당장 모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인간으로서는 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운명을 뜻하는 희랍어는 모이라(moira)다. 1차적인 의미는 ‘할당된 몫/부분’이라는 뜻이다. “아르고스 인들이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에 갇혀, 땅의 작은 부분(moira)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면……”(16권 67-68행),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moira)을 받고……”(9권 318행) 등등의 용례로 쓰이는데, ‘나에게 할당된 삶의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수명’을 뜻하기도 하고, 가장 넓은 의미에서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뜻한다. 우리는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라든지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러나 희랍인들이 인식하는 운명이란 ‘바꿀 수 없는 것’,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르페돈이 최후를 맞이하는 대목을 보면 이런 사정이 잘 드러난다. 트로이아 군이 맹렬한 공세를 펼쳐 아카이아 진영을 거세게 밀어붙이자 아카이아 인들은 큰 혼란에 빠진다. 아킬레우스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멀찍이 떨어져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다. 보다 못한 그의 동료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 대신 전우들을 구하러 달려온다. 그러고는 트로이아 인들의 선두 대열에 서 있던 사르페돈과 맞닥뜨린다. 여기서 사르페돈은 파트로클로스에게 죽게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사르페돈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이가 있다. 바로 제우스다. 소문난 바람둥이 제우스는 많은 인간 여인과 아이를 낳았는데 사르페돈도 그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제우스는 ‘사르페돈의 운명’을 거슬러 그를 구해줄지 말지를 고민한다. 그러자 아내 헤라가 제우스를 나무란다.     


“가장 두려운 크로노스의 아들이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미 오래 전에 운명이 정해진 한낱 죽게 마련인 인간을 

가증스런 죽음에서 도로 구하시겠다는 것인가요?”(<일리아스>, 16권 440-442행)     


사르페돈이 파트로클로스과 맞서 싸우다 죽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운명이 정해진” 일이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조차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헤라의 타박에 제우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나 사르페돈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전능한 신’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 희랍인들이 운명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다. 어쩔 수 없는 것, 신들조차도 바꿀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사르페돈은 자신이 ‘파트로클로스의 손’에 죽을 운명임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죽는다는 사실은 분명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선두 대열에 나서서 싸웠던 것이다.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다. 그의 앞에 놓인 선택지란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을 마지못해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것인가?’이다.   

    

비극적 윤리     


명예는 귀족적인 가치, 그야말로 고귀한 자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다. <일리아스>의 영웅들은 자긍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품고 있는 명예욕은 동료뿐 아니라 적들에게, 심지어 후세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고귀함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어찌 보면 대단한 자아도취의 산물이다. 

그런데 명예에 대한 이들의 갈망 이면에는 깊은 절망감이 숨겨져 있다. 이 절망감은 자신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 즉 아무리 고귀한 영웅일지라도 결국은 “죽게 마련인 한낱 인간”(5권 361행)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불멸의 명예에 대한 갈망과 소멸에 대한 공포는 동전의 양면이다.      


“자, 친구여, 그대도 죽을지어다. 왜 이렇게 비탄하고 있는가?

그대보다 훨씬 나은 파트로클로스도 죽었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나 또한 얼마나 잘 생기고 큰지?

나의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고,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는

여신이시다. 하나 내 위에도 죽음과 강력한 운명이 걸려 있다.”(<일리아스>, 21권 106-110행)     


아킬레우스가 살려달라고 비는 적에게 하는 말에는 호메로스의 비극적 세계관이 배어 있다. 고귀한 이들도 결국 모두 죽는다.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사는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명예, 그것은 소멸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새겨 넣는 유일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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