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반.
부엌은 이미 전쟁터였다. 압력밥솥에서 김이 빠지고, 전자레인지 위에는 데우다 만 이유식 그릇이 올려져 있고, 테이블 한쪽에는 반쯤 열려 있는 노트북에서 메일 알림이 깜빡이고 있었다.
[인사팀] 육아휴직 복직 예정자 안내 및 연장 신청 안내
민과장은 손가락 끝으로 터치패드를 톡톡 건드렸다. 노트북의 커서를 제목 위에 올려두고 한참을 누르지 못했다. 그때 채린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엄마아아—!”
놀이방에서 기어나온 채린이가 민과장 다리에 매달렸다. 어느새 채린이는 껌딱지 처럼 엄마에게 붙어 안아달라 보채는 게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잠깐만 사라져도 엄마를 찾는 탓에 요즘 민과장은 화장실도 마음 편히 가지 못한다.
“알았어, 알았어. 잠깐만, 이거 끄고…”
급하게 압력솥의 불을 줄이려다 냄비 손잡이에 손등이 살짝 닿았다. 뜨거운 열기가 민과장의 손등을 스치고 말았다.
“앗, 뜨거!”
순간 짜증 섞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민과장은 입술을 꾹 깨물며 삼켰다.
'또 버럭할 뻔했네.'
감정일지 첫 페이지에 적었던 ‘오늘도 화냈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날 밤의 부끄러움까지 같이 떠오른듯 했다.
“채린아, 엄마 이거만 하고 안아줄게.”
아이를 달래며 부엌을 정리하는 손끝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이 상태로 복직해서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채린이는 또 어쩌지?'
한바탕 전쟁 같은 아침 이유식이 끝나고 채린이가 잠시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민과장은 서둘러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민소희님은 ‘육아휴직 18개월 사용 후 복직 예정자’에 해당되며, 1차 복직대상자 또는 추가 6개월 연장 신청이 가능합니다.
(중략)
복직 희망 시 : O월 OO일까지 복직일 확정 회신
연장 희망 시 : O월 OO일까지 연장 신청서 제출
복직이냐, 연장이냐.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민과장은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다가 손을 멈췄다.
'6개월을 더 쓸 수 있다.' 이 말은 '아이랑 더 있을 수 있다'와 같은 뜻이었고, 동시에 '회사와 그만큼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돌 전에 어린이집은 절대 안 보낸다며 임신했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신념은 거의 맹세처럼 굳어졌다. 아이는 엄마가 직접 키워야 한다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
문제는 몸이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밤마다 깨는 아이, 어느새 커져버린 집안일, 복직을 둘러싼 불안과 구조조정 소식이 뒤섞인 머릿속. 이 상태로 복직하는 게 현명한 건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러다 민과장은 천천히 노트북을 덮었다. 결정을 미루는 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민과장은 답답한 마음에 서둘러 채린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웠고, 하늘의 구름도 많아 낮인데도 우중충 했다. 단지 입구를 지나자 커다란 나무 아래 건물 하나가 보였다.
‘꿈마을 어린이집’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관리동 어린이집이었다. 준우와의 대화가 있은 후, 며칠 전부터 어린이집 간판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민과장은 애써 시선을 피하곤 했었다.
'아니아. 우린 아직 아니지. 적어도 채린이 돌 지나고 생각하자.'
그렇게 오늘도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어린이집 현관 앞에 세워진 입간판 문구가 눈에 탁 들어왔다.
오전 적응반 / 육아휴직 복직 예정자 상담
“복직…” 아까 메일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과장님?”
돌아보니 편의점 쪽에서 봉지를 하나 든 준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 준우야..”
“산책 나왔어요? 채린이 안녕~”
채린이가 유모차 안에서 손을 휘저었다.
“이제 채린이도 어린이집 보내시려고요?“
준우가 간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민과장은 멋적은듯 괜히 한 마디 내뱉었다.
“그냥 뭔가 궁금해서 본거야.”
준우가 민과장 표정을 한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오늘 오후에 설명회 있는데 부담 없이 들어보세요. 저도 처음엔 ‘나랑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들어갔다가 생각이 달라진거였거든요.”
“아냐. 난 아직 맡길 생각 없어.”
준우는 더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복직하면 어린이집 도움 필요하잖아요. 저는 땡구 데리러고 가야할 시간이라 먼저 갈게요. 아! 지금 저랑 같이 가보실래요?"
"지금? 그..그럴까? 그냥 구경만 하고 갈까?”
민과장은 스스로에게까지 변명하듯 말하며 준우를 따라 어린이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이집 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바닥에는 푹신한 매트, 벽에는 동물 그림과 아이들 사진. 작은 창문으로 오전 햇살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원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다가와 인사했다.
“상담 예약하셨나요?”
“아, 원장님. 저희 회사 선배님이신데, 어린이집 상담 받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모셔왔어요."
원장은 반갑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셨구나. 들어오세요. 앉아서 말씀 나누실까요?”
민과장을 작은 상담실로 안내한 원장이 테이블에 앉으며 먼저 물었다.
“아이는 몇 개월이에요?”
“곧 돌이예요. 다음 달이면 열두 달.”
“아, 그럼 지금이 엄마가 제일 지칠 시기네요.”
민과장이 고개를 들었다.
“지친다고요?”
“네. 기어다니고, 잡고 일어서고, 넘어지고, 안아달라 울고. 낮잠은 줄어들고, 밥은 제대로 안 먹고.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도 저녁이 되면 ‘오늘 도대체 뭐 한 거지?’ 싶은 시기가 딱 그때예요.”
“다른 아이들도 그러나요?”
민과장은 쪽집개 같이 알아 맞히는 원장이 신기한듯 빤히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요. 다 똑같아요. 처음 오신 어머님들은 대부분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아이 때문이 너무 힘들어서 맡기러 왔다’고요. 근데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사실은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오신 분들이 훨씬 많아요.”
민과장은 자기 이야기인가 싶어 괜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원장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요즘은 내가 다 해내야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아, 사실 저도 그런 편이에요.”
민과장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살짝 당황스러웠다. 눈치라도 챈 듯 원장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민과장에게 물었다.
“어떤 점이요?”
“음…”
잠시 말을 고르던 민과장은 습관적으로 상황 설명부터 시작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보자. 마음을 고쳐 보았다. 불현듯 감정모임에서 지적받았던 부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황이 아니라 내 마음부터 말해보기.
“사실은 도움을 받는 게 불편해요.”
원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민과장 말에 집중했다. 민과장은 무언의 지지에 힘을 받은 듯 자신의 이야기를 불쑥 꺼내 보였다.
“어릴 때부터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이런 말을 많이 듣기도 했고 회사 다니면서도 웬만하면 혼자 해결해 버티는 스타일이라 누군가에게 ‘이거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게 그냥… 찜찜해요.”
“찜찜이요?”
“네. 부탁하는 순간 내가 못난 사람 된 것 같고, 능력 없는 사람 된 것 같고. 그래서 아이도 제 손으로 복직때까지 키우고 싶었어요. 돌 전에는 어린이집 절대 안 보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말할수록 민과장 본인의 고집이 문장으로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근데…”
민과장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은 몸이 너무 힘드네요. 밤마다 깨고, 낮에는 계속 안아달라고 매달리고…복직 생각하면 갑갑하고."
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민과장을 바라보았다.
“제가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엄마’는 어떤 엄마예요?”
민과장은 준비된 답처럼 말했다.
“아이를 남한테 떠맡기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엄마요.”
“끝까지요?”
“네. 애가 어릴수록 특히 더. 그래야하지 않나요?”
원장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런 엄마가 분명히 필요한 순간들이 있죠. 그런데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요. 좋은 엄마의 기준이 ‘얼마나 많이 같이 있었냐’가 아니라 ‘같이 있을 때 어떤 표정이었냐’일 수도 있다고요.”
민과장은 원장의 말에 이해되지 않는듯 눈을 깜빡였다.
“어떤… 표정이요?”
“하루 종일 같이 있지만 지쳐 있고, 불안하고,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아이를 보는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은 적어도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하고 늘 웃는 얼굴로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엄마. 어느 쪽이 더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세요?”
“후자죠.”
“그렇죠?”
원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많은 엄마들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시더라고요. ‘내가 다 해내야 한다’, ‘버티는 만큼 내가 가치 있다’는 식으로요.”
민과장은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듯 말하는 원장의 이야기에 긴장한듯 손을 자기도 모르게 꽉 쥐었다. 원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건 아이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나 혼자 다 하겠다’는 생각을 조금 내려놓는 선택이기도 해요. 엄마도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어린이집을 나오며 민과장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민과장은 아이를 낳으면서 슈퍼맘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일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고, 집안일도 잘 해야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속에 빠져 살았다. 그런데 그 믿음이 원장과의 상담을 통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다음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