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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17. 2019

맛있는 음식이 갖는 가치와 캘리브레이션

‘뭐 먹을까’ 하는 질문이 던져졌을 때 아무 거나 괜찮다고 하면서 막상 뭘 먹자고 하면 ‘그건 재료에 비해 가성비가 어쩌고’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이 동네 뭐가 맛있다던데 먹으러 가자!’라고 하는 사람이 되는 게 여러모로 좋은 일이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노력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 포스트잇에 써서 잘 붙여놓았다. 이유가 어쨌든 무슨 일에 자꾸 어깃장을 놓는 사람은 영 같이 있고 싶지도 않은 법이라는 걸 나는 오래도록 체득해 왔으니.


그러나 본의 아니게 자꾸만 어깃장을 놓는 부정적인 인간이 되고 마는 때가 종종 있는데,  맛있는 음식 먹기를 아주 즐기는 식도락가와 함께 메뉴를 정할 때가 그렇다.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 유행하는 음식이라면 얼마가 되었든 전혀 개의치 않고 가서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야 물론 이상할 게 전혀 없고, 나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당연히 좋아한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맛있는 음식의 우선 순위는 저 밑에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문제가 되고 만다. 간단히 말해서 누가 뭘 먹자고 했을 때 ‘아니, 그렇게까지 비싼 걸 꼭 먹어야 하나?’ 라는 생각부터 떠오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건 일단 내 재정 상황이 도무지 신통치 않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하루에 천만 원쯤 버는 사람이라면 무슨 음식을 먹는들 돈 생각이 나겠는가? 그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니까 여기선 넘어가기로 하자. 말해봤자 우울해지기만 하고.


그러니 남다른 이유를 찾자면, 내가 8년 이상 점심을 거의 먹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슨 고행을 하거나 돈을 아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고, 한때 대학에서 점심 먹을 시간이 도통 나지 않아서 두유로 대충 때우기 시작했는데 이게 의외로 생활에 아무 지장도 없어서 그대로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집에서 아침을 잘 먹기에 가능한 ‘1세계식 검약’ 같은 이야기라 마냥 자랑할 수도 부끄러워할 수도 없지만, 어쨌든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내게 두 끼를 초과하는 식사(주로 점심)도 그렇고 식사 자체도 어쩐지 번거로운 허례허식처럼 느껴질 때가 많게 된 것이다.


물론 이건 삐끗하면 ‘뭐? 핸드폰? 그깟 거 카톡 되고 전화만 되면 그만이지 뭐 비싼 걸 쓴다는 거야!’ 하는 식으로 모든 문명을 부정하는 패턴으로 빠지기 쉬운 사고방식이라 남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긴 하지만, 여차하면 나는 ‘가성비(치떨리는 단어다)’가 괜찮은 메뉴로 여론을 몰아가 자신의 잔고와 마음을 지키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그런 노력 때문에 내 주변에서 먹고 싶던 것 대신 타협안을 택하게 된 사람도 여럿 있을 것이다. 솔직히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 돌아오면 나는 몇 번이고 똑같은 짓을 할 게 분명하다. 그쪽은 쾌락을 놓치는 것이지만 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하면…… 이해해 주려나?


한때는 스키야키나 샤브샤브를 왜들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위장의 스무살...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식사의 가치를 낮게 두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높게 두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님을 절실히 느낀 적이 있다. 예전에 연말 모임 장소를 잡느라 모처의 음식점을 잘 아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친구만 믿고 썩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막상 앉아서 메뉴판을 펼쳐 보니 멀쩡히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도 입이 벌어지는 값이라 간단한 음식 몇 개만 시켜서 대충 먹고 도망나와야 했던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생활에 가깝게 즐기는 분야에선 감각이 마비되는 법이니, 역시 남들 가치관도 잘 들어가면서 사는 게 제일이다.


그런데 혹시 나이를 먹으면서 가치관은 물론이고 식성도 바뀌는 걸 실감하고 계시는지? 최근에는 퍽 저렴한 피자 뷔페와 그럭저럭 저렴한 스키야키 집 두 곳에 다녀왔는데, 피자 뷔페는 ‘전성기를 추억하려는 선수가 다시 필드에 나갔다가 고통받는’ 심정이었다. 분명 값도 싸고 맛도 좋았는데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하는 실감이 오기 전에 턱 막히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즐겁긴 했지만 또 가겠느냐면 그건 아니올시다였다. 한편으로 스키야키 집은 딱히 배부르지도 않고 엄청나게 맛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고 열심히 잘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다. 심지어 먹기 전에 처참하게 피곤하고 우울했던 것이 가시는 기분도 들었다. 덕분에 나도 몸에 잘 맞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며, 이제 식생활 스트라이크 존에 가성비킹 어쩌고 하는 뷔페가 아니라 냉면과 스키야키, 빙수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역시 극단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종종 캘리브레이션, 혹은 영점 조절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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