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Jun 17. 2021

피규어 모으기의 난해함

피규어를 조금씩 모으고 있다. 조그만 여행 기념품 같은 것 말고, 보편적으로 ‘피규어’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만화/애니메이션/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의 형상 얘기다.


어떤 소비나 수집도 비슷할 텐데, 처음에는 수집한다는 생각으로 산 것도 아니었고, 거액을 들이거나 아주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피규어를 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뽑기에서 적당한 것을 뽑거나 일본 여행을 갔다가 평소에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의 관련 상품으로 손바닥만한 것을 기념 삼아 사오는 정도였다.


이 정도 선이라면 어지간히 개수가 많지 않은 이상 수집이라고 주장하기도 좀 뭣한 감이 있고,  공간적으로 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전시할 것만 내놓고 나머지는 상자에 몰아넣어 적당히 쑤셔박아도 무방하고, 심리적인 제약이나 저항감도 거의 없다.


문제는 이보다 큰 것들에 손을 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더 큰 피규어에 입문하게 되는 계기는 여러가지가 있을 테지만, 나는 경품급 피규어가 결정적이었다. 경품 피규어란 크레인 게임 같은 부류의 게임형 자판기에 들어가거나 추첨 이벤트 등으로 주는 피규어인데 그냥 유통되는 경우도 많고, 요즈음에는 경품 피규어와 비슷한 사이즈(높이 22센티미터 가량)에 썩 나쁘지 않은 품질로 제작되는 것들도 많다. 나는 이것들을 ‘경품급 피규어’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이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피규어의 특장점은 놀라운 가성비다. 누가 봐도 얼굴 조형이 이상하다든가 하는 문제는 딱히 없이 제법 크고 품질이 나쁘지 않으면서 가격은 1만원 중반에서 3만원 내외라, 보자마자 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런 거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고급 피규어들은 20만에서 30만원을 호가해서 ‘돈도 없고 둘 데도 없어!’라는 이유로 신포도 취급해야 했는데, 여기서 돈 문제가 사라지고 나니 공간은 어떻게든 만들면 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리하여 나는 적당히 넣어두기 힘든 크기의 피규어를 돈이 없다고 탄식하면서도 하나둘 사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수집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피규어 모으기 행위를 하게 되면서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인데, 가장 큰 문제는 공간적 제약이다. 지름 12센티, 높이 22센티쯤 되는 공간이 숫자로 보면 대단치 않은 것 같아도 생각보다 확보하기 힘들다. 소설책 대여섯 권이 꽂힐 공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게다가 라멘집처럼 되는대로 막 갖다 놨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면 주변을 좀 비워줘야 하니 실제로는 제약이 훨씬 심하다. 게다가 한 군데에 여럿을 진열하는 것도 좀 민망스러워서 적당히 분산하다 보니 슬슬 위치 선정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몇 개만 꺼내놓고 나머지는 잘 보관하는 방법을 택하곤 있지만, 내 방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은 대체로 보드게임이 점유하고 있어서 이것도 한계다. 창고가 따로 있거나 자기 공간이 어지간히 큰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책/보드게임/피규어 모두를 모은다는 것은 일종의 공간적 자해가 아닐까……


공간적 제약 못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이 심리적 제약이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나쁜 영향을 주는 게 아닐까 싶지만, 피규어를 모으는 행위의 사회적 이미지가 너무 나쁘다. 도라에몽처럼 대중적으로 귀여움을 받는 캐릭터나 슈퍼히어로 캐릭터의 피규어를 모은다면 ‘이야, 대단한 마니아구나!’하고 넘어갈 텐데, 미소녀 피규어를 모은다면 ‘어휴, 오타쿠네…….’하고 경멸당할 것 같다.


물론, 이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고 세간의 인식은 많이 바뀌어서 전혀 숨길 게 없는 취향, 취미로 인정받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독서 모임 같은 곳에서 이러저러한 피규어를 모은다고 당당히 나서서 소개하지는 못하겠다. 미소녀 캐릭터와 결혼식을 올리는 등의 이벤트나 상황을 가리지 않고 밈을 남발하는 문화로 인해 고착화된 ‘오타쿠의 이미지’ 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일본발 미소녀 캐릭터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성적인 기호나 함의를 내포하고 있거나, 그런 인식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몇 달 전에는 온라인으로 모임을 하던 와중에 어쩌다보니 내가 모은 피규어를 자랑하게 된 적이 있는데,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면서도 불과 몇 초만에 괜한 짓을 했다고 은근히 후회했다. 설마하니 그 친구들이 ‘알고 보니 그 양반, 취향이 아주 저속하더라니까?’하고 욕하지야 않겠지만,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짓이었다. 전시도 자랑도 잘 생각해서 할 일이다. 취향이 절대 저속하지 않다고 100퍼센트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그런데 피규어를 사 모으는 사람은 대체 왜 이런 것들을 사는 것일까? 그리고 왜 여럿을 사는 것일까? 공간을 꾸밀 목적이라면 한두 개만 있으면 해결될 텐데?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는데, 나는 무엇보다 화면 너머, 과장해서 표현하면 ‘다른 차원’에 있는 캐릭터를 나와 같은 장소, 차원에 구현해 놓는 것이 멋진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어려운 표현을 써서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던 것을 실제로 그려보거나, 그림으로만 놔둔 것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일은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고대부터 신의 가르침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리는 것, 그림만 그리지 않고 조각으로 만드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질계에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이상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나처럼 물질로 존재하길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됐고 왜 여러개를 자꾸 사냐고? 다신교 숭배자가 신상을 하나만 가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요즘은 ‘일종의 다신교 숭배자’로서 신실하고 재미나게 사는 것도 물리적 한계가 심하다는 느낌이 절실해서, 아주 실감나는 디지털 피규어가 나와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가 아니라 증강현실 안경 너머에 존재한다면 실제 물건을 장식해둔 것과 그럭저럭 엇비슷하지 않을까? 내 눈에만 보이는 귀신처럼 디지털 피규어가 책장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면 자리를 확보할 걱정도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걱정도 없고, 심지어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다. 아니, 혼자 허공을 보고 히죽거리는 꼬락서니를 생각하면 이건 인류에게 이른 기술이려나……


아무튼 옛날에 대항해시대 게임에서는 뱃머리에 부착하는 선수상에 따라 특별한 효과를 누리기도 했는데, 책상에 놓은 피규어를 보면 명시적인 효과만 없다 뿐이지 선수상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일상이라는 항해의 선수상이라…… 이렇게 표현하면 하나쯤 사보고 싶지 않으신지?

작가의 이전글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소설의 마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