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Jun 13. 2021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소설의 마법

건강하고 즐거운 소설은 마법을 부리곤 한다. 코를 풀고 버린 휴지처럼 바닥에 구겨져 있다가도 좋은 소설을 보면 '그래, 세상에 이렇게 재미난 게 많았지!' 하고 벌떡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좋은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봐도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나온 듯이 개운해지곤 하지만, 벅찬 감동과 오랜 여운에 젖어 삶의 관점까지 어느 정도 바뀐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소설을 봤을 때만 그렇다.


요전에는 "잡동사니의 역습"이라는, 저장 강박에 대한 교양서를 '우리 가족이 다 이런데요?'하고 아주 심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정신쪽으로든 육체쪽으로든 건강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쩔 수 없는 법인지 잠을 미룰 정도로 몰입해서 열심히 봤다. 하지만 감동에 젖거나 활력이 샘솟지는 않았다. 애초에 ‘저장 강박, 이렇게 하면 반드시 극복한다’ 또는 ‘아무리 쌓아놔도 괜찮아’ 라는 식의 작품은 아니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튼 텍스트마다 역할이 다르다는 뜻이다.


며칠 전에는 영화로도 유명한 "마션"의 작가 앤디 위어의 신작,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몹시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야 할 때 자기가 싫어지는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요즘은 마음에 들 정도로 재미난 것을 발견해도 케이크 위의 딸기를 나중에 먹듯이 아껴서 조금씩 보는 경우가 많은데, 도무지 그런 인내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재주 좋게 마음에 쏙 드는 책만 골라 읽는다 해도 올해 안에 이보다 더 재미있게 읽을 소설을 찾긴 어렵지 않을까?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초반은 이렇다. 주인공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깨어나서 기억 상실에 시달린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과학 지식에는 아주 해박해서 이런 지식과 추론을 바탕으로 자기 상황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데, 주인공 그레이스는 알고 보니 과학자고, 우주에 빛을 흡수해버리는 괴생명체 군집이 나타나서 멸망할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해 다른 별까지 자살 임무를 수행하러 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반부터는 '아스트로파지'라 명명한 이 전대미문의 외계 미생물을 연구하고 이용해서 태양과 지구를 살릴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어떻게 추진되었는지 떠올리는 동시에, 많은 별들 중에서 아무 문제가 없는 별은 대체 왜 멀쩡한 것인지  알아내는 온갖 간난신고가 펼쳐진다. '마션'을 이미 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할 만한 전개다. 과학적 지식을 쥐어짜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미처 생각 못한 문제가 터져서 목숨이 위험해지고, 문제를 최종적으로 알아낸 다음 계획을 수정하고, 그러면 또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이런 식이다.


이러한 방식의 이야기 전개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즐거움은 합리적 사고의 명쾌함이다. 의문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정답을 도출해나가는  과정은 내가 그것을 잘 따라가든 따라가지 못하든 지적으로 감탄하게 만든다. 복잡한 퍼즐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기쁨이 있다. 이 분야에선 앤디 위어가 확실히 빼어나다.


하지만 사람이란, 특히 요즘 사람이란 쉽게 지루해지는 법이라 이 패턴도 단조롭게 반복되다 보면 '똑똑한 놈이 똑똑한 짓 해서 똑똑하게 살아남겠지 나랑 뭔 상관이야' 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나도 초중반에서 이런 느낌을 받아 '그렇게까지 엄청난 작품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중반부터 이야기가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중후반부부터는 합리적 사고와 판단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실수와 감정과 불합리한 판단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내가 잠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저러면 안 될텐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럴 수가' 하는 결정이 돌고 돌아서 결국 옳은 결과로 돌아오는 순간의 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다.


나처럼 어쩔 수 없는 근원적 나약함을 버리지 못한 인물이 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선함도 버리지 못해서 나름대로 보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참 진부하지만,  그만큼 마음에 위안이 된다. 아마 모질고 약삭빠른 인간이 되기보다는 보편적 선을 추구하는 편이 나에게 익숙하고 쉬우며, 선이 나에게 득될 게 없다고 냉소적으로 굴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선 그것을 옳고 바른 일이라 믿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 스포일러)


작품과 관련 없지만 제법 그럴듯한 이미지

(이하 스포일러)


모호한 말만 늘어놓기는 뭣하니 슬슬 좀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나는 완벽히 절대적인 고독 속에 버려진 인간이 같은 처지의 외계인을 만나 교류하는 순간부터 이 소설을 엄청나게 재미있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서로가 목숨을 거의 내던지면서 상대를 번갈아 구조하는 부분부터는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게 된 그레이스가 처참한 고심 끝에 자기의 목숨 대신 위기에 처한 외계인 친구와 그의 세계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그러고도 살아남는 결말에 크게 감동했다. 요약해 놓으니 제법 뻔한 전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감동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자. 가족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건 반사적으로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평생의 친구가 아닌 친구를 위해서 희생하긴 좀 어렵다. 그런데 그레이스는 얼마 전까진 말이 통하긴커녕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거미형 외계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심지어 나중엔 자신의 선택이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라 계산하면서도 지구로 돌아가는 대신 외계인과 그의 세계를 구하기로 정한다. 죽기 싫어서 프로젝트 참가를 거부했다가 약물로 기억을 소거당한 채 먼 우주까지 발사된 나약한 인간이 그런 결정을 내리고도 살아남고 나름대로 행복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한 인간의 성장담인 동시에 이타성에 대한 미담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삶에 대한 긍정론이기도 하다.  상처받고 도망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말과, 남을 위한 희생이 그저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동시에 ‘말이 되게’ 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나저나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이런 부분과 별개로 새삼 놀란 부분이 있다. 내가 엘프나 드워프처럼 친근한 것도 아니고 그런 게 있을 거라는 상상 한 번 안 해본 거미형 외계인에 대해 상당한 연민과 정을 품게 되었다는 점이다. 방사선을 몰라서 임무에 투입된 외계인들이 ‘로키’ 하나 빼고 모두 죽어버렸다는 대목에서는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고, 그레이스와 로키가 다시 만날 수 없음을 확인하고 헤어지는 대목에서도 참으로 괴로웠으며, 그레이스가 사고를 당한 로키를 구출하러 가서 재회하는 대목에서는 로키처럼 뛸듯이 기뻤다. 정말로 나와 별 공통점도 없고, 표현하기에 따라서는 ‘우주 괴물’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외계인에게도 감정이입하게 되는 기적은 소설의 힘인가, 작가의 필력인가, 아니면 인간 본연의 특성인가……  아무튼 이런 작품을 보면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것도,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허구로도 삶이 지탱되곤 한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쿠키런 킹덤을 지웠다 깔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