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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19. 2023

중고 거래의 빌런들 (2)



5.반값에 주세요

중고 거래 앱으로 번개장터와 당근마켓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할 때가 많다. 당근마켓은 지역 기반 직거래가 기본에 가까워 구매자 찾기가 더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등산용 배낭처럼 견물생심으로 사기보다는 검색으로 찾아서 살 물건은 대체로 그렇게 팔린다. 얼마 전에도 집에서 사용되지 않고 대충 처박혀 있던 배낭을 팔게 되었는데, 올리고 이틀인가 지나자 누군가 번개장터로 메시지를 보냈다. 사람들 반응이 영 없어서 낙담하던 터라 반색하며 열어보았으나…… 내용이 가관이었다. 8만 원쯤에 올린 것을 4만 원쯤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격 흥정 불가로 올린 물건에 이런 문의가 들어오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이런 행위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고 물품이란 판매자가 영 안 팔린다 싶으면 가격을 내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굳이 먼저 값을 깎으려 드는 것은 남이 구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심지어 더 싸게 구하려는 욕망을 이루겠다는 뜻이 아닌가. 먼저 행동한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판매자가 흥정 불가로 정해놓았다면 가격이 내리길 기다렸다가 찾아오라는 이용 규칙을 내건 셈이다. 이것을 마음대로 어기며 남의 스마트폰에 알림을 보내는 건 부당한 일이다. 게다가 이런 ‘선 흥정’이 보편화되면 판매자가 세운 규칙을 지켜 가만히 있던 구매 대기자들이 손해를 보는 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냥 심하게 시달렸는지 모르겠지만, 판매자들 중에는 ‘네고 금지 개새끼야’ 따위 육두문자를 설명에 박아놓은 사람도 있을 지경이다.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치울 물건을 빨리 치우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라 어지간해선 나도 흥정에 응하는 편인데, 그래도 물건을 판매가의 반값에 사겠다는 건 상도덕이 아니었다. 바가지로 유명한 관광지에서 기념품 사는 것도 아니고, 반값은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문의를 보낸 상대에게 그건 너무 거저로 사려는 것 아니냐고, 그건 어렵겠다고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내려다, 내가 왜 이런 자와 상종해야 하나 싶어서 상대를 그냥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 이번에는 당근마켓으로 완전히 똑같은 문의가 날아왔다. 하필이면 근처에 사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이쯤되면 불쾌하기만 한 게 아니라 무서울 지경이다. 또다시 차단했다. 이런 사람은 어디서 호되게 욕을 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6. 지금을 증명하는 법

현재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설이 있다고 들었다. 하기야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기반으로 하여 북반구 기준으로 만든 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시각일 뿐이지, 엄밀한 의미의 시간 자체는 대체 그게 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바로 지금 사진을 찍었다는 증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드물게 생기기도 한다. 온갖 시간선을 넘나드는 시간 여행자도 아닌데 대체 무슨 시간 증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겪은 일은 이랬다. 비싼 책을 몇 권 팔려고 내놓았더니 구매자가 오늘 찍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사진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중고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뜬금없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사기 방지 대책의 일환이다. 있지도 않은 물건을 남의 사진만 가져와서 올려놓고 구매자가 보낸 돈을 챙겨 사라지는 사기꾼이 있는데, 구매 문의 이후의 시각에 요구에 따라 상품 촬영을 새로 했음을 알 수 있으면 사진을 어디서 퍼와서 파는 경우는 막을 수 있다.


의도는 이해했으니까 나는 별 불만 없이 사진을 찍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런 사진을 찍었다는 증명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사진 파일에 들어가는 메타 데이터도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고, 스마트폰 시계 역시 마음대로 맞출 수 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슬슬 철학적인 문제로 넘어갈 판이었는데, 예전에 읽은 소설에서 주인공이 언제 어느 도시에 있었는지 증명하려고 그날의 신문과 랜드마크가 나오게 사진을 찍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신문도 안 볼 뿐더러 신문에 시각은 나오지 않으니 그 방법은 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손댈 수 없으며 시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매체는 어떨까?


고심 끝에 나는 상품 사진에 생방송 뉴스 화면도 나오도록 스마트폰 화면을 곁들인 사진을 찍었다. 생방송 뉴스가 나오는 시간대는 내가 조절할 수 없으니 사진을 찍은 때와 뉴스 시간이 겹친다는 증명이 되지 않는가. 그리하여 사진을 받아본 구매자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낸 임금님처럼 감탄하며 책을 샀고, 나는 내가 존재하는 시간대의 증명 방법을 알게되어 만족했다는 일화다.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7. 택배를 싸게 보내는 방법

당근마켓 덕분에 직거래가 대유행하게 되었고 나도 이를 종종 이용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택배 거래를 선호한다. 중고 거래를 보드게임 거래로 시작한 탓에 택배 거래가 몸에 익었기 때문이다. 2004년 보드게임 카페 열풍부터 시작해서 여러 업체가 한글화 발매에 주력한 덕에 요즘은 보드게임이 많이 익숙한 문화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니악한 전략 게임 따위를 팔려면 전국을 대상으로 택배 거래를 하는 게 빠르다.


대상이 동네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빼더라도 택배 거래는 약속을 따로 잡을 필요가 없다는 게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포장과 배송, 그리고 그에 따른 비용이 여간 큰 장벽이 아니다. 나처럼 포장재를 상비해 둘 정도로 거래에 이골이 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박스를 구하는 것도 일이고, 택배비도 만만치 않다.


2023년 4월에는 오만가지 이벤트로 이용자를 끌어모으기로 유명한 토스에서 편의점 택배비를 할인해주는 이벤트를 했다. 덕분에 나도 잡다한 물건을 몰아서 처리했는데, 이때쯤 보드게임을 사겠다는 사람 중에 아주 친절한 사람이 나타났다. 계좌를 토스로 알려줬더니 토스를 쓰면 택배비를 싸게 보낼 수 있으니 이용해보라고 알려주는 게 아닌가. 사실 그때는 5월이 되어 할인 이벤트가 끝났지만, 그래도 이렇게 좋은 정보를 알려주는 친절한 구매자는 처음 봐서 반갑기 그지 없었다. 별별 이상한 사람이나 사기꾼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보드게임계의 도리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고맙다고 하자마자 ‘택배비를 아꼈으니 5천 원만 깎아달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것도 중고 거래 20여년간 처음 듣는 요구였다. 좀 양보해서 생각하면 자기가 제공한 정보로 자기가 이득을 보겠다는 게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까지는 아니었으나, 유효 기간이 지난 정보였던 데다가, 애초에 이 거래는 택배비를 내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올려놓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게임을 많이 사니 택배비는 내가 부담해서 값을 좀 더 깎아주겠다고 해준 상황인데, 거기다 대고 자기가 부담을 줄여줬으니 더 깎아달라고 하는 건 상당히 정떨어지는 요청이었다.


그래서 당장 깎아준 것을 또 깎아달라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따지려다…… 다른 구매자 기다리기가 피곤해서 그냥 깎아주겠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모두가 당장 편한 대로 행동하면 이 바닥의 상도덕도 나날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는데 쉽게 포기해 버린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토스가 짧은 이벤트를 마친 지금은 ‘택배파인더’를 쓰고 있다. 저렴한 것도 모자라서 송장 정보로 포인트도 받을 수 있고 결제도 편의점이 아닌 앱 연결 계좌로 처리되어 아주 좋다. 그 구매자는 열심히 토스나 쓰라지.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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