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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22. 2023

중고 거래의 빌런들(3)


6. 지나치게 잘 사는 집

별로 비싸지 않으면서 재미도 확실한 보드게임이 심지어 한글판으로 쏟아지는 요즘은 입문자들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유행 초창기에는 중고 장터에서 저렴한 게임을 한꺼번에 많이 사서 다양한 게임을 해보는 게 이득인 것처럼 느껴졌다. 관점에 따라선 요즘도 맞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돈도 기력도 시간도 다 잃어버린 요즈음에는 나와 친구들 마음에 쏙 드는 게임을 몇 개만 발굴해서 무난히 오래 즐기는 게 가성비 측면에서도, 심리적 만족 측면에서도 나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산해진미를 먹고 싶더라도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면 확실히 맛있는 음식만 찾고 싶어지는 게 당연할 것 같으니, 받아들여야 할 변화이리라.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작년부터 게임을 꾸준히 정리했는데, 하루는 구매자 한 명이 게임 세 개인가를 한꺼번에 살 테니 55000원쯤 하는 걸 5만원에 줄 수 없겠냐는 요청을 했다. 보드게임을 사고 팔 때 역시 이런 흥정은 싫다. 그러나 게임을 한꺼번에 세 개나 사며 값을 깎는 것을 보니 어린 입문자겠구나 싶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좋은 경험을 쌓아서 훌륭한 소비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포장도 제법 신경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료가 별로 없는 취미를 즐기면 자연히 이렇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포장을 마치고 택배 접수를 하다가 주소에 나온 아파트 이름이 어쩐지 익숙하다 싶어서 검색해봤더니…… 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호화스럽고 비싼 아파트 이름이었다. 은근히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아무리 비싼 집에 산다 해도 돈이 전혀 안 아깝진 않을 것이다. 가족의 구박을 조금이라도 덜 받기 위해 딱 5만 원만 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수도 있을 테고, 칼같이 지키는 취미활동 예산에서 남은 돈이 정확히 5만 원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거주 환경만으로 화를 내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돈도 없고 공간도 없어서 귀한 게임을 한꺼번에 처분하는 나로서는 재래시장의 조그만 매대에서 흥정 끝에 과일을 싸게 한 상자 산 다음 롤스로이스를 타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본듯한 느낌이 들어 영 개운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7. 이보다 더 쿨한 거래는 없다

의복이나 신발처럼, 몸에 꼭 맞지 않으면 사기 직전에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되는 물건이 적지 않다. 이런 것을 사고 팔 때면 사려다 포기할 때도 팔려다 실패할 때도, 미안해서든 실망해서든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예전에 운동화를 사러 지하철을 타고 온 어르신이 안 맞아서 못 사겠다고 허허 웃고 돌아가는 모습을 봤을 때는, 많이 싸게 파는데 적당히 대충 신으시면 안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발에 어느 정도로 끼는지 더 잘 써놓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직거래가 헛걸음이 될 때는 마음이 빌런이 될락말락한다.


그런데 작년 봄인가에 안 입는 패딩을 한 벌 싸게 팔았을 때는 정반대 이유로 불안해졌다. 그 이유란 이랬다. 도착했다는 연락이 예상보다 빨리 왔기에 옷을 허겁지겁 쇼핑백에 넣어 나가 보니, 약속 장소의 거래 상대는 쌀쌀한데도 외투 없는 후드 차림이었다.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거래만 하러 나온 분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패딩을 꺼내서 보여주자, 그는 쇼핑백은 필요없다면서 패딩을 척척 걸쳐 입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어 건네주고는 그대로 멀리 떠나가버렸다.


멀쩡한 옷이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듯한 그 태도는 영화 속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도망치다가 아무 옷이나 대충 집어 입는 주인공이나 보일 법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애초에 집을 나설 때부터 거래한 옷을 입을 작정으로 옷을 얇게 입고 나왔다는 뜻인데, 맞을지 안 맞을지도 모르는 옷을 어떻게 그토록 자신있게 구입하기로 정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가 옷을 입어보니 어디가 마음에 안 든다고 따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시달렸다. 그렇게까지 물건을 시원스럽게 사서 쓰는 경우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의 따위는 전혀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쿨거래’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8.더러움과 사용감의 차이

눈여겨보긴 했지만 굳이 살 건 없다고 포기한 물건이 중고로 저렴한 값에 올라오면 반사적으로 사고 싶게 된다. 몇 달 전에는 10년 정도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보드게임과, 12년 정도 과거에 재미있게 하다가 여건이 맞지 않아 처분했던 보드게임이 엄청나게 싸게 올라와서 중고로 사고 말았다.


그런데 내용물이 마구 덜그럭대는 소리가 들려 영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관리를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지퍼백을 사서 잡다한 구성품을 종류별로 나눠놓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정리벽 따위가 있지 않더라도 게임을 몇 판만 해보면 그렇게 간단한 정리는 해놓는 게 다음에 또 할 때 편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기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이 게임의 상태는 별로 신뢰할 수 없었다. 집에서 구성품을 확인해 보니 예상이 반쯤 맞았다. 잃어버린 물건은 없었지만 모든 게 다 때가 타서 더러웠던 것이다. 거의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설명에는 ‘사용감이 좀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건 ‘더럽다’는 표현이 훨씬 적합한 수준이었다. 동아리방에 방치한 게임이 이렇게 더러워진 것을 본 적이 있어 짐작하는데, 이 물건들은 그 누구도 책임지고 관리하지 않은 물건이 분명했다.


나는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게임들을 무슨 손걸레처럼 다룬 사람들에게 분노하며 카드를 한 장 한 장 물티슈와 휴지로 최대한 깨끗이 닦고, 카드 손상을 막는 비닐인 프로텍터를 씌웠다. 우리는 가치 있는 물건을 가치 있게 다루는 사람이 바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임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보드게임 귀한 줄 모르는 이에게 저주 있으리.



(물건을 다루는 자세에서도 됨됨이가 보인다)


9. 모델명이 달라

구글에서 구글 포토라는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것은 사진을 온라인 저장소에 저장할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로, 인물과 사물 따위를 구분해서 묶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위치 표시와 자동 보정 따위 기능도 빼어나서 많은 사람이 애용했다. 그런데 이미지 분석 공부를 할 만큼 한 것인지, 구글이 무료 제공을 중단하고 말았다. 구글 포토는 물론이고 학교 계정에 주어지던 무료 저장 공간도 다 잘려나갔다. 공짜로 풀었다가 유료로 전환해서 원숭이 꽃신을 만드는 것은 요즘 너무 당연한 상술이지만, 당연하다고 치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러운 놈들.


그러나 구글 포토를 무료로 이용할 방법이 딱 하나 남아있긴 했으니, 바로 구글에서 만든 스마트폰인 구글 픽셀 1을 쓰는 것이다. 후속 기종은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무료 이용을 남발했다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제한을 점점 더 크게 둔 반면에, 처음으로 만든 픽셀 1은 통 크게 구글 포토 무료를 공언했고, 지금도 유효하다. 때문에 사진 저장과 정리에 골머리를 썩히는 사진쟁이들이 이것을 구해서 중고로 쓰곤 하는데, 근래에 나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사진은 늘어만 가고, 더 나은 저장 방법은 없는데, 마침 좋은 매물을 발견한 탓이다. 


원래는 직거래로 보고 살 작정이었다. 그런데 거리도 그리 가깝지 않고, 거래 가능한 시간도 신통치 않아서 포기하고 택배 거래를 택했다. 거래 이력도 훌륭하고, 제품의 배터리 충전 수준이 이상적인 상태로 유지되도록 다른 장비까지 구비했다는 사실이 믿음직했기 때문이다. 어찌나 훌륭한 사람인지, 내가 길게 묻지 않고 바로 구입하자 택배비를 내주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나도 사진 저장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긴 했는데…… 제품을 받아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일반형이 아니라 큰 사이즈라고 올라온 것을 샀는데 너무 작았던 것이다. 검색해서 사양표를 보니, 아니나다를까 내가 받은 것은 일반형이었다. 


이건 물론 어엿한 사기였으나, 제품의 상태나 관리 정도를 봐도 고의로 사람을 속였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어찌되었는지 물으니, 판매자는 줄곧 큰 사이즈라고 생각하고 썼다고 했다. 자주 들여다보며 쓴 게 아니라 사진을 저장하는 거치형 서버 기기로 썼기에 여태 크기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었다. 판매자는 정말 미안하다며 환불해주겠다고 했는데,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을 오가야 하는 상태였던 나는 새 기기를 구해 다시 세팅하기가 너무나 귀찮아서, 업체가 판매하는 일반형 가격 수준에 맞춰 차액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대략 15000원 정도였다. 그러나 판매자는 곧 원래 가격에도 구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그건 안 되겠다고 답했다. 오발송한 물건을 회수하는 비용을 빼고 나면 다른 구매자에게 팔고 남는 돈이라고 해봐야 12000원 정도일 텐데 이렇게까지 회수하려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의문이 강하게 들긴 했지만, 판매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분명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다. 아무리 물건을 착각해서 팔았다곤 하지만 기껏 좋은 물건을 팔면서 택배비까지 빼줬는데 한참 더 깎아달라고 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떤 물건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그것을 그 가치에 적합하지 않은 값에 처분하는 일을 안타깝게 여겨 꺼리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판매자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요컨대 내가 건수를 잡아 값을 깎아대는 빌런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까도 말했듯이 배터리 상태까지 철저히 관리한 매물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깎지 않은 값에 샀다 해도 충분히 좋은 거래였으므로 나는 그냥 물건을 그 값에 사기로 결정했다. 나 역시 물건 이름을 착각해서 잘못 보낸 적이 있기도 했고. 


그러자 판매자는 고맙다며, 분명 자기가 실수한 건 맞다고 5천 원을 돌려주었다. 결과적으로 예상과는 달라진 게 아쉽긴 하지만 충분히 좋은 거래였다. 스마트폰 배터리 관리를 위해 별도의 장비까지 구입하는 기기의 수호자는 존중 받을 자격이 있는데, 내가 팔 때 겪은 일들은 생각 못하고 너무 인색하게 군 것 같아 후회스럽다.



결론

책에서 중고 거래의 매력에 대해 떠들어놓고 뒤로는 불만을 길게 떠드는 사람이 되었구나 싶을 정도로 긴 시리즈가 되고 말았다. 아무튼 가치 있는 사람을 잘 알아보고 대우하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라는 건 모두가 알지만, 가치 있는 물건을 존중하고 아껴 쓰는 사람도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좋은 물건을 잘 쓰고 사고 팔 때도 매너가 있는 사람이 되고, 또 그런 거래 상대를 만나고 싶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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