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May 25. 2023

살쪘냐는 말들에 대하여



찌기는 쉽고 빼기는 어려운 게 우주의 이치인 것 같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세상에는 기아로 고통받는 이가 얼마든지 있어서 살이 쪄서 고민이라는 말을 들으면 세상의 부조리에 이를 가는 경우도 있을 테고, 대사에 문제가 있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체중이 건강 범위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매일 중노동이나 직업적 고강도 운동에 시달려 아무리 먹어도 체중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대도시에 거주하며 거의 움직이지 않는 노동을 지속하는 사람이 많은 탓에, 아무리 일상을 열심히 영위해도 체중과 체지방량이 늘어나는 것은 인체의 부조리한 이치를 넘어서 타락한 영혼을 단죄하는 신의 징벌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신이 있고 인간에게 자비심을 품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괴롭히지 말고 진노의 불벼락을 내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끝내버려야 하는 게 아닐지?


물론, 인간들이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알아낸 바로는, 우리가 이렇게 쉽게 살찌고 마는 것은 단순히 병들고 굶어죽기 일쑤였던 과거에 적응한 우리 몸이 틈만 나면 에너지를 저축하도록 진화한 한편으로 문명은 몸이 다시 적응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발전해서 고칼로리 음식을 마구잡이로 즐길 수 있게 된 탓이라고 한다. 요컨대 우리가 이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싸움에서 벗어나려면 몸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생활과 고칼로리 음식에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화란 환경에 어찌저찌 잘 적응해서 자손을 남기면 나보다 발전한 몸을 지닌 자식이 생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가 유전자 전달에 실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오늘날 고칼로리 음식에 얼마나 잘 적응했는지가 번식에 아주 결정적인 요소가 되진 않는 듯하니, 인류가 고칼로리 환경에 적합한 체질로 변하는 날은 쉽게 도래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넌더리나도 살과의 싸움을 계속 해나가야만 한다. 아무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더라도 물결을 거스르지 못하는 배처럼 뒤로 떠밀려 흘러갈 것 같지만…….


근래에는 우리 가족도 누구 하나 빠지는 이 없이 늘어가는 체중과 싸우고 있다. 특히 어머니가 병원 생활을 한 달 한 뒤로 더 처참한 싸움을 벌여야 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휠체어를 타게 되어 적당한 방법으로 칼로리를 소모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새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쪘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다.


일단, 수술일에 찾아온 형수님에게는 아버지가 고맙다거나 잘 왔다는 말 대신 얼굴이 더 쪘다는 말을 던졌고, 어머니가 퇴원한 뒤에 집에 찾아온 형에게는 어머니가 바디 프로필을 찍은 멋있는 몸매는 어디 가고 배가 남산만해졌다고 말했으며, 문병을 온 숙모도 어머니에게 살이 좀 찌셨나? 하며 걱정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물론 아버지도 어머니 허리를 마사지하며 평생 최고로 살이 쪘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국인은 보통 밥을 먹었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고들 하는데, 내 주변에선 살쪘다는 말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심지어 돌이켜보면 내가 아는 한 가장 정중하고 양식있는 후배도 결혼한 친구를 오랜만에 보고 좀 찐 것 같다는 인사를 했고, 내 동갑 친구도 체형이 상당히 변화한 동창을 몇 년만에 보자마자 기겁하며 왜 이렇게 됐냐는 소리부터 했으니, 이런 인사를 던지는 풍조가 세대나 나이 탓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밥 먹었냐는 인사와 달리, 살쪘냐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살 얘기를 제법 들은 나는 민소매 옷을 입지 않게 되었다. 본인이 가장 자주 말하기에 괜찮을 줄 알았던 어머니조차 살쪘냐는 말을 듣는 것에는 지쳤는지 그만 좀 하라는 선언을 했단다. 그러니 형과 형수도 올 때마다 살 얘기를 듣는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정신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스트레스는 존재하지 않고, 그냥 하는 말이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자세를 갖는다 하더라도 그런 종류의 스트레스는 마음속 어딘가에 조금씩 쌓여서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체지방이 늘었다는 이유로 샌드백이 되야 한단 말인가)


내가 남에게 살을 빼라고 변변치 않은 소리를 한 것은, 기억하기로 딱 두 번이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살을 빼면 정말 예쁠 거라는 소리를 좋은 말이랍시고 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데, 그때는 그게 칭찬인 줄 알았다. 두 번째는 체형이 둥근 편인 여자 후배가 애인에게 살 좀 빼라고 구박하는 것을 듣다 못해, 너나 좀 빼라고 한 것이다. 하다못해 같이 빼라고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참으로 할 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 후배는 크게 상처받았고, 나는 욕을 좀 먹었다.


그런저런 일들을 겪거나 보아온 탓에 최근 10년 정도는 누구에게 살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정말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살이 쪘다 해도 절대로 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체중 걱정을 해달라고 이마에 써붙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말하지 않기로 작심을 했다. 어지간한 건강 걱정은 해주는 게 가까운 이의 도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살 얘기를 적절히 꺼내서 발생할 수 있는 이득에 비해 신호를 잘못 읽고 괜한 잔소리를 해서 야기할 손해가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남의 살 얘기를 꺼내지 않는 대신에 내 살 얘기는 종종 하는 편이다. 나도 경도 비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끝도 없이 굴러떨어지길 반복하는 중이라 얘깃거리는 풍부하다. 그렇게 말을 꺼내면 상대도 자기가 겪는 고생과 고통을 줄줄이 꺼내놓기 마련이고, 그제야 비로소 대등한 선상에서 살 찐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저칼로리 식단이나 효과 좋은 운동 정보를 공유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각자의 고통이 있다는 걸 인지한 덕인지 불행 자랑으로 이어질 확률은 낮은 편이다. 요컨대 타인의 상처에 대해 얘기하려면 자신의 상처부터 보여주는 게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어쩌다 내 주변에선 이렇게 살 쪘다는 얘기를 인사처럼 던지게 된 것일까? 순전히 악의가 있기 때문은 아닌 게 분명하니, 아마도 살 찌는 문제에 관해선 모두가 공감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유하자면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들이 친구의 점수가 크게 떨어진 것을 보고 어쩌다 이렇게 많이 떨어졌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으로서 도움을 주거나 위로를 하고 싶은 마음이리라. 농담과 희화화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같이 덜어보려는 의도도 무의식중에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살과 체중 문제는 겉으로 봐서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일이라 자기 얘기부터 하지 않으면 공감이고 나발이고 다 망해서 말로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만이 남기 마련이다. 내가 주변에서 보는 일들은 대체로 이런 식이 아닌가 싶다.


올바른 오지랖의 방법은 아무도 배우지 않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바랄 걸 바랄 일이다. 좋은 의도로 하는 행위가 심지어 습관까지 되면 영원히 고쳐지지 않기 마련이다. 내가 들어서 기분 나쁜 말을 남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니 힘없고 살찐 자들은 어쩌겠는가? 웃는 얼굴로 잔뜩 웅크리고 옷을 껴입는 수밖에. 그런고로 나는 요즘 여름 조끼를 찾는 중인데, 마음에 쏙 드는 걸 찾기가 쉽지 않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매거진의 이전글 중고 거래의 빌런들(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