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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19. 2017

해먹는 파스타 사먹는 파스타

파스타는 퍽 무난한 음식이다.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딱히 싫어할 이유도 별로 없다. 음식에 대한 취향은 제각각이니까 파스타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도 있고 파스타란 단어만 들어도 빠드득 이를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외국 음식 중에서 특별히 편안한 음식이 아닐까?


나 역시 파스타를 좋아하긴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맛있는 파스타집을 찾아서 방방곡곡을 찾아갈 정도의 '애호'라기 보다는 이틀에 한 끼쯤은 파스타로 해결해도 별로 불만은 갖지 않을 만한 '일상화'에 가깝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요는 밥에 가까운 셈이다. 자취하는 분 중에 혼자 밥을 해서 먹는 것이 상당히 소모적이고 번거롭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식을 파스타로 바꿔버린 분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먹을 게 마땅치 않을 때마다 파스타를 해먹는 걸 제법 당연하게 여겨온 나도 그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먹는다고 표현하면 뜻 자체는 요리를 하는 것으로 다소 거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내가 이렇게 먹는 스파게티는 인스턴트 라면을 좀 호화롭게 해먹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기껏해야 면을 삶으면서 양파와 스팸을 볶고 다 되면 합쳐 소스를 부어 먹는 정도다. 다른 맛을 즐기고 싶으면 두유를 넣고 크림소스를 흉내내거나 조개를 넣는다. 정말이지 대단할 게 없어서 요리부터 식사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분만에 끝난다. 일상적인 식사로서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만 한가지, 간편히 먹는 것 치고는 설거지할 거리가 많이 나온다는 게 좀 불만이었는데, 최근에 인터넷에서 '원 팬 스파게티'라는 조리법을 발견한 뒤로는 또다시 신세계가 열렸다. 말 그대로 팬 하나에 재료를 때려넣고 끓여서 스파게티 조리를 끝내버리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는 과연 이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실제로 시험해보니 양파와 스팸이 너무 삶은 것처럼 되었다는 점을 빼면 훌륭한 방법이었다. 면 삶은 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졸여서 더 깊은 맛이 난다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중독적인 탄수화물 맛이 아주 일품이다. 관심 있는 분은 한 번 찾아보시길.

(처음부터 끝까지 팬 하나만을 사용한 원 팬 파스타. 면 끝이 좀 탔다.)


일상적으로 해먹는 음식이 늘어난다는 것은 영혼의 색채가 하나 늘어나는 것처럼 멋진 일이다. 다만 작지 않은 단점도 하나 있으니, 이런 음식이 생기면 외식 메뉴를 정할 때 '굳이 내가 그걸 돈 주고 사먹어야겠어?'하고 의식적으로 그 음식을 제외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라멘은 라면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잘 사먹는 반면에 파스타는 어쩐지 거기서 거기라고 인식해서 전문점에 큰 점수를 주지 않게 된다. 파스타 요리에 큰 자신이 있거나 미각이 둔한 탓은 아닌 것 같고, 아마 단순히 파스타가 라멘보다 더 비싼 탓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내가 이것만은 꼭 먹어봐야겠다고 작정할 수밖에 없었던 스파게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삼겹살 스파게티'였다. 말 그대로 스파게티를 잘 구운 삼겹살과 함께 상추에 싸서 먹는 것이다. 보자마자 상추쌈에 밥 대신 스파게티를 넣다니 이 무슨 짓인가 싶은 심정이었다. 나도 예전에 엠티에 갔다가 상추와 라면만 남아서 라면을 상추에 싸 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냥 상상 그대로의 맛이었다. 못 먹을 음식까진 아니지만 따로 먹는 게 나은 조합이었다. 그런데 삼겹살과 스파게티를 같이 싸서 드셔보라니, 대체 얼마나 자신 있는 맛이란 말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이 기회가 아니면 좀처럼 다시 먹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어땠는가 하면, 잘 구운 고기가 들어간 데다 느끼하면서도 살짝 매콤한 특제 소스가 절묘했던 덕에 대단히 맛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샐러드와 스파게티, 고기가 딱히 어울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삼겹살과 스파게티를 상추에 싸서 먹는 것도 제법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보기 전엔 믿을 수 없는 삼겹살 스파게티)


기껏해야 테이블 여섯 개 정도밖에 없는 대학가 골목의 작은 파스타 전문점에서 맛본 이 스파게티는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돌고 마음이 훈훈해진다. 조그맣고 인테리어가 깔끔한 가게에서 뭔가를 잘 먹으면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경향이 있다. 추운 밤거리를 헤매며 성냥을 팔다가 '잠깐 이리 와서 쉬면서 이것 좀 마시고 가렴' 하고 푸근한 주인장이 데워주는 우유를 마시고 가는 듯한 기분이다. 그렇다고 딱히 돈을 안 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으로 구하기 힘든 가치를 누린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 타인과 통하는 면을 발견했을 때 기쁜 것처럼, 가게 주인의 특별한 주관과 취향이 나와 들어맞으면 사소하게 마음이 들뜬다. 


요즘은 남들 잘 모르는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비웃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개인의 허영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서울 어딜 가도 대기업 프랜차이즈뿐이라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굳이 찾아내서 다녀야만 하는 도시 상황과, 그런 수고와 비용을 들여 취향을 가꿀 여유가 남아있지 않은 사회 전반적 경제 상황 때문에 불거진 냉소주의 탓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맞는 가게는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런 가게와 취향을 하나씩 발견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다 맛집과 인생의 재미 얘기를 하게 되었지? 얘기를 스파게티로 되돌리자. 삼겹살 스파게티를 먹어본 이후로 집에서 비슷한 시도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결국은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집에서 삼겹살을 굽는다는 것부터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고, 삼겹살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만족도의 선을 넘어버리기 때문에 거기다 굳이 요리를 더할 마음이 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편이성을 따져보면 이것은 분명 원 팬 스파게티와 대척점에 있는 스파게티다. 분명 한 번 시도해보고 만족한대도 다시는 하지 않게 되겠지. 집에서 해볼 만하다고 뭐든 다 해보는 게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번거로운 음식은 나가서 사먹는 게 제일이니, 오늘도 나는 맛과 편이성의 곡선이 그리는 교차점을 찾아 머나먼 부엌으로 떠나련다.



*추신

브런치북 프로젝트 특별상 수상작인 저의 신간,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출간되었습니다. 고장난 물건, 주워온 물건을 수리하거나 중고 거래를 하며 소비 생활에 대해 고민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생활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종이책으로도, 밀리의 서재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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