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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n 07. 2023

먹고 보거나 혹은 보고 먹거나



여행을 덮어놓고 싫어하는 사람은 적을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한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건 종합적으로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존의 압박감을 내려놓고 오로지 소비만 하는 시간이 이어지니 쾌락적이고, 나의 선택에 따라 경험이 곧바로 바뀌는 터라 자유롭기까지 하다. 애초에 뻔한 선택지 안에서 내가 뭘 고르든 말든 제멋대로 흘러가는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이 많으니 이 ‘자유’만으로도 여행은 아름다운 일이다.


여행이 달갑지 않다면 그건 십중팔구 여행을 둘러싼 제반 상황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공짜가 아니다. 해당 기간 동안 해야 할 일도 미리 처리해야 하고, 계획도 짜야 하며, 짐도 잘 챙겨야 한다. 적당히 두어 시간 짬을 내는 것만으로 대충 해결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과정이겠으나, 실제로는 엄청난 시간이 들어간다. 동행자들과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면 더욱 어려워진다. 다 필요없고 대충 아무렇게나 떠나든지 말든지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저번 연휴에 부산 여행을 다녀온 나도 비슷한 처지였다. 죽도록 해결하려 해도 될까말까 한 일들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잡다한 계획을 세워 떠난다는 건 그 자체로 소규모 재난처럼 느껴졌고, 심지어 부산은 가족들과 한 번 둘러본 일이 있기에, 이렇다할 제안도 의견도 없이 동행자들의 계획에 깨끗이 무임승차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게 떠난 2박 3일의 여행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일단 출발부터 내 건강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출발 전날 저녁에 혼자서 해먹은 떡볶이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없는 재주로 대충 만들었다가 너무 싱겁다 싶어 라면 스프와 불닭 소스를 집어넣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 치웠더니 다음날 아침부터 속쓰림과 지독한 설사가 시작되고 말았다. 평소대로 먹다 남은 것이나 먹든지 레토르트 카레나 먹을 일이지, 대체 왜 갑자기 쫄깃하고 매콤한 뭔가를 먹고 싶어서 안달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날씨도 별로 우리 편이 아니었다. 사흘 중 이틀 내내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하는 통에 돌아다니기가 이만저만 힘들지 않았고, 그 덕에 가장 많은 활동을 하기로 예정되었던 이틀째에는 사실상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말았다. 용궁사도 떠나갔고 자전거 코스도 날아갔다. 그 대신에 가려 했던 카페조차 임시 휴점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부산에 처음 오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크게 낙담했으리라.


빗물로 얼룩진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사람들이 여행에서 추구하는 경험의 우선 순위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지금까지도 잘 알고 있긴 했지만, 친구들로 구성되어 의견 조율이 자유로운 집단으로 여행하길 십수 년만에 다시 해 보니 한층 더 확실해졌다.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타지의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기를 갈망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경험을 중시하며, 누군가는 일상을 떠난 휴식만을 원한다. 그 모든 것을 찾아 떠나는 게 바로 여행이긴 하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각자가 가장 원하는 것만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면 새로운 경험을 택한다.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특별한 의미나 이야기가 있는 장소와 건물 따위를 보길 원한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틀에 박힌 패키지 여행의 불편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붙이자면 성지순례형이라고 할 만하다.


반면에 이번 여행의 일행은 대체로 타지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다들 노련한 주부나 탐험대장처럼 항상 삼시세끼의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고, 상비한 인근 맛집 리스트에서 대안을 뽑아내는 일에 능숙했으며, 1안이 여의치 않을경우 현장 상황을 살피고 2안으로 이행해야 할지 검토하는 프로세스가 매끄러웠다. 무슨 일이든 이런 식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그리 어려울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덕분에 여행 내내 먹을 고민 같은 건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내 소화기관이 엉망진창이라 무엇을 얼마나 먹어도 될지는 걱정이었지만, 어딜 가서 먹을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여행 코스는 물론이고 식사까지 신경 쓰지 않았으니 사실상 패키지 투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일행이 추구하는 것이 식문화 체험이다보니, 둘째 날 1안과 2안이 모두 취소되고 실행된 3안은 ‘맛집에서 먹을 것을 사서 숙소에서 먹는다’였다. 그것으로 외부 일정은 모두 종료되었다. 그 일정을 본 나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집단이 모두 완벽히 만족할 방법은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맛집에서 사먹은 음식들이야 다 맛집 음식답게 맛있긴 했지만, 뱃속이 엉망이라는 점을 떼어놓고 생각하더라도 나로서는 맛있는 음식이 그렇게까지 매력을 느낄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행 계획과 달리 뭔가를 포기해야 할 때, 우리는 각자 다른 인간임을 알게 된다)



돌이켜보면 그럴 법도 한 것이, 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하는 동안 무엇을 먹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십여년 전에 친구들과 여행했을 때도 ‘점심은…… 저기 있는 라멘이나 먹을까?’ 하고 생각나는 대로 정하고 대충 눈에 띄는 가게에 뛰어드는 식이었다. 교토 가모가와 강 인근을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 저녁거리를 고민한 적은 있지만, 그때도 일행 중 한 명이 ‘대충 저 멋있는 가게나 들어가죠!’라고 주장해서 그대로 돌진했다. 뭔지도 모르고 막 들어간 직후에 다다미가 깔린 개인실로 들어가게 되어 적잖이 걱정되기도 했는데, 가게 주인도 친절하고 튀김도 맛있었으며 가격도 적당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꼬치라고 적힌 한자를 읽지 못해서 읽는 법을 물었던 게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혼자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메뉴에 대한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은 채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 아무거나 먹었다. 한번은 눈에 보이는 대로 다코야키 전문점에 들어갔는데, 가게가 내부 정리 중이기에 나오려 했더니 주인장이 괜찮다고 다코야키를 내주었다. 그래서 맛있게 먹고 계산하려 했더니, 아직 정식으로 파는 물건이 아니니 돈은 됐다며 그냥 보내주는 일도 있었다.


반면에 가족과 함께 포항의 맛집을 미리 알아두고 찾아갔을 때는 엄청나게 실망했다. 회도 물회도 우리 동네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형편없었고, 곁들여 나온 초밥은 밥이 죄다 떡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엉망이면 유명 방송이고 포털 사이트 검색이고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고, 굳이 미리 검색해서 정해둘 것 없이 대충 아무렇게나 먹으면 좀 더 운이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되었다. 이는 당연히 불합리한 확증 편향의 오류겠지만, 여행지에서 밥이야 대충 아무거나 빨리 먹으면 그만 아니겠냐는 평소의 주관까지 더해지니 식생활을 소홀히 하는 나의 여행관은 제법 확고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숙소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쉰다는 최종 일정은 나에게 아주 행복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여행지의 식사를 그 다음 일정을 위한 즐거운 징검다리로 삼을 수는 있어도, 최종 목적 자체로 설정하기는 어색했다. 게다가 식후에 한숨 자고 일어나니 비도 거의 그쳐서 돌아다니기에 충분히 괜찮은 날씨였다. 시간도 아직 9시가 되기 전이었으니 늦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산책 나가서 야경 볼 사람을 모았는데…… 두 명 외에는 모두가 거절했다. 


나는 잠시, 머나먼 부산에 다시 올 수 있기나 할지 모르는 마당에 왜 이 기회를 포기할까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이 역시 가치관과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한 일일 것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야밤에 객지를 나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높고 아름다운 숙소에서 음식을 배불리 먹고 느긋하게 쉬면서 야경을 창밖으로 내려다 보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여행’이라는 여유작작한 행위를 살아서 다시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고, 연차, 월차가 있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적당할 때 휴가를 내면 국내 여행 정도는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으니,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의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동행자로서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여행이란 이렇게 근본적으로 형체만이 일시적으로 동행하는 동상이몽인 것이다.


그리하여 잠시 목적이 일치한 세 사람은 부산항 부근을 걸으며 밤바다의 배와 도시의 빛무리를 보고 사진을 찍은 뒤 다소 헤매다 돌아왔고, 다음날에는 조금씩 구름이 걷혀가는 하늘 아래 다시 맛있는 떡볶이를 먹고 흰여울 마을을 구경했다. 비 때문에 흘려버린 일정은 아쉽지만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장기가 엉망인 것치고는 맛있는 것도 제법 많이 먹었고, 흘러간 일정의 끝자락을 그럭저럭 붙잡을 수도 있었다. 여행이라고 일행이 뭐든 다 함께할 필요는 없으니 견해차에 아쉬워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을 알아서 챙긴 것은 좋은 결정이었다.


그나저나 근래에 낸 책에 맛있는 걸 열심히 찾아먹어야겠다고 써놓고도 식생활에 대한 관심이 이 모양인 것을 보면, 역시 사람의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독자들에게 사기를 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밥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데, 나는 언제쯤 먹어본 놈이 될지 모르겠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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