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체 비만자에게 허락된 바지는 없다
바지 얘기를 하자니 ‘바지를 좋아하시는지?’처럼 상투적인 질문부터 떠올랐는데, 좋아하고 말고 이전에 최소한 한국에선 아직 남성이 하반신에 입을 옷으로 바지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 같다. 위생적인 목적으로 앞치마를 두르는 경우도 있긴 하나 이것도 바지 위에 입는 것이지, 바지를 입지 않고 앞치마만 입을 수는 없다. 그러고 돌아다니다간 잡혀간다.
그런고로 근래에는 새 바지를 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일단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술을 퍼마셨더니 살이 쪄서 바지가 한 치수 늘어났다. 그 상태에서 대충 편한 면바지를 입고 여행에 갔더니, 찍힌 사진마다 꼬락서니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은 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아저씨가 아닐 수는 없을지라도 추하게 남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잡지사 1.5도씨의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하루빨리 적당하고 말끔한 바지를 찾아야만 했다. 매체에 소개되는 게 처음인데 최소한 평균으로 남고 싶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처음 생각한 것은 단정하고 시원한 여름용 슬랙스였다. 경우에 따라선 슬랙스를 입으면 한층 더 회사 다니는 아저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냥 헐겁고 큰 면바지나 대충 주워 입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되느니 회사 다니는 말끔한 아저씨로 보이는 게 나을 것이었다. 게다가 청바지는 사이즈만 맞춘다면 십 년쯤 입을 수 있을 만큼 많으니까 슬랙스를 좀 더 사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예전에 살펴보고 꽤 괜찮다 싶었던 쇼핑몰 앱을 깔아서 한참 뒤적이다가 할인중인 슬랙스 하나를 골랐다. 기장도 선택지가 둘이나 되고 허리도 편하며 색깔도 다양한 것으로. 바지를 안 입어보고 사는 것은 오랜만이라 대단히 신중하게 사이즈를 비교해서 주문했다. 암살 계획에 따라 총기를 선택하는 존 윅이나 고르고 13만큼 신중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바지를 받아서 입어보니 그토록 신중하게 고른 바지는 약간 작았다. 길이도 생각보다 길었고, 고간도 다소 민망한 구석이 없지 않았으며, 주머니의 형상도 훤히 드러났다. 여자 옷에 왜 주머니가 없는 경우가 많은지 해명 자료로 써도 좋을 법한 꼬락서니였다. 엉덩이도 좀 편치 않았다. 게다가 내가 선호하는 올리브색 중에서도 진한 색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도착한 것을 보니 군 간부가 입는 옷, 혹은 인민복의 일종으로 보이기도 했다. 역시 바지를 입어보지 않고 사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나는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바지를 세 번이나 다시 입어봤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바지에는 죄가 없고 내 하체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고 저주받을 몸뚱이 같으니! 물론 나도 이런 일로 자책하는 게 좋지 않다는 말은 자주 봤다. 사람에 맞춰 옷이 만들어져야지 옷에 맞춰 사람이 몸을 바꾸는 건 잘못되었으니 자존감을 잃지 말라는 식이다. 그러나 저렴한 양산품 외에 선택지가 없는 마당에 대체 어떻게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겠는가.
아무튼, 이 바지는 반품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도 별로 정상적이진 않았다. 반품 택배비가 착불로 보내면 6000원이고 선불로 보내면 3000원이라기에 그만하면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보냈더니 3000원을 더 보내야 환불 처리를 해주겠다는 게 아닌가. 6000원의 비용 자체는 납득할 수 있었다. 왕복 3000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3000원이라는 안내는 대체 누가 왜 써놨단 말인가? 분통이 터지고 성질이 뻗쳐 삼각산이 어깨춤을 추다 대폭발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안내를 받았을 때 나는 이미 다른 바지를 찾으러 나갔다가 녹초가 된 상태였던지라 따지고 자시고 할 기운도 없이 3000원을 마저 보내고 생때같은 내 돈을 풀어달라고 했다.
(표준 체형이 아닌 자는 외로움과 친해진다)그렇게 쇼핑몰의 농간에 굴복하여 이를 갈던 날,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근처의 백화점까지 가는 데에 의외로 시간이 별로 걸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냉큼 달려가 백화점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원래는 산책하는 시간이었지만, 옷 구경을 하면서 걸어다니는 것도 일종의 산책이니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아무튼 백화점이라곤 해도 갈 곳은 SPA 브랜드로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종종 백화점을 지나던 시절의 습관처럼 가장 큰 매장부터 갔다. 저주받은 하체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무조건 품목과 사이즈가 다양한 매장부터 가야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 탓이다.
매장을 좀 둘러본 나는 기대했던 대로 상당히 잘 맞는 바지를 찾을 수 있었다. 연갈색의 슬랙스로, 재질도 시원한 여름용이라 부담없이 입고 다닐 수 있을 듯했고, 사진을 찍으면 적당히 양식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는 직원에게 부탁해서 기장을 확인하고 오버로크 수선까지 의뢰하기로 했다. 5만 원 가량이 나가게 된 터라 패스트패션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브랜드가 비싸도 너무 비싼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 몸뚱아리에 잘 맞는 옷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인 만큼 빠르게 속편히 해결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싶었다.
그런데 계산할 바지를 들고 계산대로 가다가…… 슬쩍 한번 더 둘러본 여름 바지 매대에서 더 마음에 드는 리넨 바지를 발견하고 말았다. 진한 회색에 약간 청색이 감돌기도 해서 청바지 느낌도 드는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품이 넓고, 그러면서도 벨트를 맬 수 있는 형태였다. 내가 이 고생을 한 것은 모두 이 바지를 만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나는 바지를 입어보고, 곧바로 수선을 위해 기장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금방 묘한 문제가 발생했다. 직원이 아까 내 바지 기장을 잡아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는데, 그는 내 바짓단을 대충 접어 핀으로 고정하는가 싶더니 이상한 설명을 했다. ‘리넨 바지는 수선할 순 있지만 자기들 기계가 좋지 않아서 옷이 망가질 수 있으니 수선을 권하진 않는다’는 게 아닌가. 마치 운이 없으면 시착만 해본 옷을 망가진 상태로 받아보게 될 거라는 듯한 투였다. 좀 놀라서 그러냐고 되묻자, 직원은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드리고 옷을 새로 갖다 수선하긴 하겠지만 늦어질 수도 있고 기분도 안 좋으실 수 있으니 외부 수선소를 이용하시길 권한다고 설명했다. 책임 소재가 묘하게 불분명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인터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나는 일리가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렇겠다고 하고 계산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걸어가면서 가격표를 보고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개운치 않았다. 수선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수선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 기계가 좋지 않아서 일어날 수 있는 손해를 방지해주기 위해 내가 따로 수고와 비용을 들여 세탁소를 찾아가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백화점까지 와서 5만원을 내고 수선도 못 하고 가고 싶진 않았다. 기분이 상한 나는 옷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옆에 있는 매장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건물에 있는 SPA 브랜드는 거의 다 뒤져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체형에 잘 맞는 슬랙스도 없었을 뿐더러 괜찮은 리넨 바지조차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리넨 바지는 많았지만 내가 입기만 하면 템플 스테이를 하다 방금 막 뛰쳐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결국 나는 꼬리를 내리고 처음 갔던 매장으로 다시 갔는데, 아까 그 직원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터라 더러워서 안 산다 생각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인터뷰 전날이 되자 다시 초조해졌다. 면접 하루 전인데 겨울 양복밖에 없는 듯한 심정이었다. 패션잡지도 아니니 누가 내 옷차림을 눈여겨보겠냐마는, 프리랜서는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라도 더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믿는 나로서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심끝에 이번에는 또 다른 백화점으로 내달려 SPA 브랜드 중에서 나름대로 좀 격조 있는 브랜드의 매장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눈에 들어오는 대로 집어본 바지는 다섯 벌. 하지만 적당한 것은 없었다. 몸에 맞는 바지는 있어도 입었을 때 보기에 괜찮은 바지는 없었다. 내용물이 엉망이면 포장으로 아름답게 꾸미기도 쉽지는 않은 법이다.
역시 어제 그냥 샀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낙담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딱 한 층 위에 이름만 알고 가본 적은 없는 브랜드가 있었다. 반복되는 실패로 의욕이라곤 전혀 생기지 않았으나, 매장의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는 바람막이의 모양과 재질을 보니 뜻밖에도 모양이나 마감이 썩 훌륭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희망을 품고 리넨 바지를 집어다 입어보았다. 놀랍게도 내가 사려 했던 바지와 엇비슷할 정도로 잘 맞고 보기도 좋았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사기로 했는데…… 앱을 다운받아서 얻은 할인 쿠폰을 쓰려니 이건 또 이 매장에선 쓸 수 없단다. 인터넷에서 사면 몇 천원 아낄 수 있는데 내일 입는 건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수선실에서 수선까지 해서 가져갈 수 있다는 메리트는 썩 나쁘지 않았던 터라 결국 결제하고 수선실로 갔다.
그것으로 여름 바지 장만의 기나긴 여정은 막을 내리는 듯했다. 아마 매장에서 기장을 맞춰 왔다면 '그 이후로 주인공은 바지를 입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새 상품을 그대로 가져온 터라 수선실에서 바지를 다시 입고 거울을 본 게 문제였다. 어쩐지 매장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영 맥이 빠진 꼬락서니로 보이는 게 아닌가. 약간 과장하자면 서태지나 HOT가 스키복 비슷하게 펑퍼짐하게 입고 다니던 모습을 엇비슷하게 흉내낸 꼴 같기도 했다. 급히 고른다고 매장에선 잘 살펴보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나는 수선실 아저씨가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거울을 보다가, 결국은 만사 다 지쳐서 입고 온 바지로 갈아입고, 허리 사이즈를 다시 고르겠다고 둘러댄 뒤에 간신히 찾은 리넨 바지를 환불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모든 게 다 넌더리났다. 젠장, 될 대로 되라지. 대체 무슨 돈이 있다고 의심 속에 5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써야 한단 말인가? 얼마 전에 내 책의 리뷰를 뒤져 보니 ‘참 피곤하게 사시네요’라는 말이 있던데,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럴듯한 바지를 입고 가서 인터뷰를 한다는 소망은 산산조각났고, 나는 당일 아침에 내가 보유한 청바지를 모조리 뒤적인 끝에야 간신히 봐줄 만한 물건을 찾아 입고 나갈 수 있었다. 그 청바지는 엄밀히 말하면 청바지라기보다는 청바지처럼 보이는 고무줄 바지에 가까운 바지로, 그동안은 약간 후줄근한 꼴이라 입지 않고 대충 걸어 놓기만 했던 물건이다. 그런데 왜 굳이 고르고 골라서 그걸 입었느냐? 살이 찐 덕에 전보다는 약간 덜 늘어져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잡지 1.5도씨와의 인터뷰는 무난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대화도 편하게 했고, 사진도 이상하진 않게 찍혔을 것이다. 애초에 기사의 주제가 새활용 센터 탐방과 중고 제품 사용 경험과 의의였으니, 인터뷰를 하겠답시고 새 바지를 사지 않은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살이 쪘다고 모든 것을 다 잃기만 하지는 않아서 천만다행이고, 앞으로 1년 정도는 바지 따위 찾아다닐 일 없이 내가 가진 것들이나 잘 살펴가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추신. 인터뷰할 때 입은 바지는 무릎의 구멍이 점점 넓어지고 있기에 어제 자가수선했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