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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19. 2023

얼굴 없는 사람 되기의 어려움



어디에도 얼굴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는 편이다. 블로그 유행 초창기부터 운영한 블로그에도 내 얼굴이 드러난 사진을 올리지 않았고 SNS에도 올리지 않았으며 가족과 지인들이 보는 메신저 프로필에도 알아볼 만한 얼굴 사진은 올리지 않았다. 얼굴에 남들 보이기 편치 않은 이상이라도 있는 건 아니다. 일단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남이 나를 알아보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


십수년 전, 익명성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시절에 블로그에 보드게임 얘기와 애인 자랑을 종종 해댔더니, 인사도 제대로 나눈 적 없는 타과 동료 공익요원들이 “앗, 아무개 아니세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애인이 그렇게 미인이시라면서요?”하고 아는 척을 해서 속으로 기겁한 적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교 시절에 공부를 잘하기로 쓸모없는 정평이 나기도 했고, 학생회 임원으로 행사에 참여하기도 한 탓에 일방적으로 나를 아는 학생들이 많아 은근히 피곤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유명해서 치루는 대가를 ‘유명세’라고 하는데, 딱히 먹고 사는 일에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유명세를 치러보면 왜 이것을 세금처럼 넌더리나는 이름으로 부르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5월에 책을 낸 뒤로 어째 내 개인적인 방침과 달리 사진을 쓸 일이 생기고 말았다. 6월에는 아예 잡지사에서 부른 사진가가 동행해서 인터뷰 전후로 사진을 찍었다. 매스미디어에 노출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으신지? 나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터라 대단히 난처했다. 심지어 나는 그렇게 사진을 찍힐 때 목에 경련이 일어나는 증상까지 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중히 거절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샘플을 보니 사진이 안 들어가면 기사로서 모양이 잘 성립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기획대로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혔는데, 다행히도 무난히 넘긴 것 같다. 다만 사진가가 세세하게 지정하는 포즈를 따르며 오랜 시간 사진을 찍히는 일이란 상당히 피로한 일이었다. 보잘 것 없는 얼굴에 이렇게 힘을 쓸 일인가 싶어 남의 옥좌에 앉은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촬영 내내 에디터와 사진가 모두 친근감이 들 정도로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감사하고 죄송한 일이다. 그런 한편으로 남의 사진 찍을 때는 최대한 신속하게 좋은 결과물을 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는데, 피사체인 내가 아무렇게나 찍어도 그림이 되는 인물이었으면 훨씬 나았겠지 싶다.


저번 달에 이어 이번 달에는 라디오 방송에 나가게 되었다. 음성으로만 소개된다면 걱정거리가 별로 없다. 나름대로 팟캐스트도 1년 가까이 해봤던 터라 자신이 있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기획을 읽어보니, 아뿔싸, 여기도 사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전파로 라디오 송출만 하는 게 아니라 SNS와 유튜브에도 올려야 해서 사진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남들이 한 것을 보니 강연대에 오른 사진처럼 훌륭한 지성이 엿보이는 인물 사진을 골라야 했는데, 내가 가진 사진을 아무리 열심히 뒤져봐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사진은 딱 두 장 뿐이었다. 그나마 한 장은 6년쯤 된 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스티브 잡스의 포트레이트 같은 흑백 사진이라 약간 영정 같은 분위기가 감돌기도 했다. 그밖에는 단독 사진 자체가 거의 없었고, 단독 사진이라고 해도 거의 전신이 나온 여행 사진이라 쓸모가 없었다.


사진을 한참 뒤져보면서 나는 복잡한 분노와 허망함을 느꼈다. 분노는 주로 스마트폰 카메라와 사진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스마트폰의 기본 카메라 렌즈는 사실 일반 카메라를 기준으로 보면 상당한 광각 렌즈라 보기 좋은 인물 사진 찍기가 어려운 편이다. 기본인 1배 렌즈로 사람을 보기 좋게 찍으려면 너무 접근해야 한다. 내 경험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상태라면 2배가 사람을 찍기에 가장 적당한 배율이다. 그러나 많은 사용자가 기본 카메라 쓰기를 당연하게 여기는 터라 배율 조정은 어지간히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고려되지 않으며, 구도 추천 기능이라는 게 있기도 하지만 피사체를 얼마나 당겨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근래에는 제조사가 2배 렌즈를 버리고 3배를 채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3배 렌즈는 제자리에 앉아서 테이블 건너편 사람을 찍자면 너무 확대되어 부적합하다. 요컨대 스마트폰 제조사에서 설정하는 일반적 촬영 상황이 나와 잘 맞지 않고, 한층 과장하자면 이들이 비슷하고 재미없는 사진을 양산하는데에 일조한 탓에 내 사진도 그저그렇다는 억지스러운 분노다.


허망함은 나의 인간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10년 가까이 비슷한 멤버들과 놀러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사진을 많이 찍어 왔다. 카메라도 동원했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대에서 최대한 고성능 카메라가 탑재된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도 동원했다. 이는 좋은 기억을 화상으로 잘 기록하고자 하는 나의 개인적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멋지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모습을 남겨주고 싶은 바람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사진첩에 남은 쓸만한 내 사진이라곤 고작 두 장뿐이고, 그 두 장이 다 형이 찍어준 사진이라는 사실이 제법 허망했다. 아무리 기록과 사진에 대한 가치관에 차이가 있고, 카메라를 자주 드는 사람은 그만큼 사진에 남지 않는 법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내가 훌륭한 형상으로 기록될 가치가 없나 싶은 생각마저 잠깐 들었다.


물론, 냉정히 다시 찾아보면 나의 독사진이 없는 게 아니라 방송국에 보낼 만한 사진이 없는 것이니 생각을 고치긴 해야 했다. 자기 카메라를 보유하고 더 나은 사진을 남길 방법을 고민해본 사람이 업무에도 쓸 만한 사진을 남길 확률이 높은데,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열성적인 카메라 보유자였던 형뿐이었을 따름이다. 


잠깐 새는 얘기로,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든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든가 하는 격언을 흔히 들을 수 있지만, 그건 실력가가 도구의 도움 없이 자기 실력만으로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감탄할 때나 맞는 말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초보가 실력을 더 쌓고 심미안을 기르려면 좋은 도구부터 써야 한다. 그래야 추구할 지점을 알고 실력으로 달성하는 방법을 궁리하게 된다. 나는 사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카메라를 쥐어본 자만이 좋은 사진을 남기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사진 꼰대 같은 소리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카메라 사용 경력자가 주변에 이렇게까지 없다니, 내가 그냥 운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일까?


(원하는 사람에게만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될 수는 없다)


그나저나 근래에 들어서는 출판이든 라디오든 모두 영상 매체에 기대고 강연과 방송을 연계하는 식으로 살길을 찾다 보니 저자, 출연자의 얼굴을 쓰는 게 당연한 일이 되고 말았다. 라디오는 ‘보이는 라디오’라고 해서 출연자가 카메라를 주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빼면 영상 방송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방송을 병행하는 게 흔한 일이고, 책은 아예 표지에 저자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박기도 한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언젠가는 용모가 빼어난 저자가 춤추면서 ‘개인기’를 보여주고 책을 소개하는 영상이 유행하는 비극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설마 그런 일이 있겠냐고? 빌 게이츠조차 윈도우즈 95 발매 행사에서 어색하게 춤을 춘 적이 있다. 그만큼 어색한 춤판을 보기 어려울 지경인데, 지구 최고 수준의 자산가들이 그러는 꼴을 보노라면 과연 대중의 요구나 시장의 흐름이라는 이유로 무엇까지 할 일인지 생각해볼 만하다.


90년대의 전설적인 장르소설인 퇴마록을 보면 저자 소개에 이우혁 작가의 간소한 캐리커처가 들어가 있다. 그만한 인기작이라면 사진을 넣을 법도 한데 그림을 썼다는 점에서 새삼 존경하게 된다. 나는 퇴마록을 상상할 때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좋다. 한편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언제부턴가 책에 얼굴을 싣기 시작했는데, 신간이 나올 때마다 나이를 먹은 모습을 보자면 젊은 날의 갈곳 없는 쓸쓸함을 토로했던 하루키도 이렇게 나이를 먹는구나 싶어서 작품과 전혀 무관한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책에 저자 사진이 무조건 들어가는 세상과 절대 들어가지 않는 세상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무조건 후자를 고르고 싶다. 작가가 주장하지 않은 바를 얼굴에서 읽고 싶지 않고, 나 역시 얼굴로 내가 의도하지 않은 뭔가를 말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누구든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은 거부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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