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아리 애스터 감독의 “보 이즈 어프레이드”라는 영화를 봤다. 공포 영화를 어느 정도 즐기는 사람이라면 분명 이름을 들어봤을 이 감독의 전작으로는 “유전”과 “미드소마”가 있는데,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소 느슨해진 공포 영화계에 긴장감을 가져왔다고 할 만큼 색다른 맛을 선사했다. 나는 두 작품을 모두 좋아하지만 비교적 대중적인 형식을 따른 “미드소마”를 더 좋아해서 감독판까지 도합 세 번을 보았다. 어릴 때부터 좋아한 오컬트 취향이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다만 이번 작품은 딱히 호러나 오컬트라곤 하기 어려운 터라 영화관 찾아갈 여유를 상실한 나는 나중에 집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주변 친구들 여럿도 아리 애스터 감독 영화라면 무조건 보겠다는 오컬트 호러 마니아라서 기회를 잡아 같이 볼 수 있었다.
구체적인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며 흐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 처음에는 심리 문제를 겪으며 빈민가에 혼자 사는 주인공 ‘보’가 어머니를 찾아갈 예정인데, 밤중에 조용히 좀 하라는 엉뚱한 항의 쪽지가 계속 날아드는가 싶더니 출발 직전에는 짐과 열쇠가 없어져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다는 부조리극처럼 흘러간다. 그 와중에 어머니를 꼭 찾아가야만 하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물과 함께 먹어야 하는 약을 먹고 보니 물이 없고, 물을 사러 건너편 가게에 뛰어갔더니 카드가 막혀 있고, 현금을 긁어모으는 사이에 거리의 노숙자들이 집을 점거해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이런 식이다.
그러다 말도 안 되는 사고가 연달아 이어진 끝에 보는 외과 의사의 집에서 치료를 받으며 지내게 되는데, 이 집도 우화의 일부로 보일 정도로 과장스럽게 다정한 중산층이다. 그러면서도 보에게 방을 빼앗긴 그 집 딸은 보를 경멸하고 괴롭히며, 부인은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는 현대 고딕 호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다가…… 또 와장창 사고가 터져서 보는 허겁지겁 도망치게 된다.
슬슬 뭐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려는 것인지 의문이 아주 깊어지는 와중에, 보는 뜬금없이 숲속에서 유랑극단을 만나 자신의 삶을 비유한 듯한 연극을 보게 된다. 종이인형 놀이 같은 배경에 보가 들어가서 연기하는 듯한 연출이라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가이낙스나 샤프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쯤 되면 깊이 생각하며 따라가기 보다는 감독이 하고 싶은 걸 다 했구나 싶어 모든 걸 내려놓게 된다. 아무튼 이 파트도 와장창 난리가 나며 끝나고, 보는 또 도망친다. 이제 관객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게 분명했다.
마지막 무대는 어머니 댁이다. 여기선 마침내 어머니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게 된 보가 과거를 대면하고 성장하게 되는가 싶더니…… 또 와장창하고 사건이 터지며 일련의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해답편’이 전개된다. 당황스럽긴 해도 어쨌든 영 알 수 없던 것들이 해소되는 듯한 모양새라 기대감이 다시 살아났으나, 이 대목도 엉망진창으로 깨어지며 보는 또다시 도망치고…… 이야기는 도망치던 보의 내면적 사이코 드라마를 보여주며 황당하게 끝난다.
줄거리 설명만 들어봐도 좀 어려운 영화라는 느낌이 들지 않으시는지? 정말 그랬다. 같이 간 친구들 모두 영화를 제법 본 사람들인데도 영화가 끝나자마자 미드소마는 아주 대중적인 영화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요즘 들어 숨쉬는 일에도 지친 상태였던 나는 중반부부터 짜증을 느끼기까지 했다. 대체 언제까지 감독이 제멋대로 구겨서 던진 실타래를 풀면서 이걸 다 풀면 근사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궁리해야 한단 말인가? 후반부에 들어서선 아예 자기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인지 졸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대체로 아무리 피곤해도 영화를 보고 나오면 몸이 가뿐해지고 정신이 고양되던 나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의 “맥베스”이후로 처음이었다.
영화를 다 본 뒤로는 카페에서 빵과 커피 따위를 먹으며 두 시간 정도 영화에 대해 잡담을 나눴다. 그냥 잡담이라기보다는 감상회에 가깝기도 했다. 부분부분에 대해 받은 느낌이나 뭐가 어떻게 된 이야기인지 생각을 주고받은 것이다. 독일군의 암호를 해석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궁리를 하는 모양새 같기도 했고, 방탈출 게임을 놓고 복잡한 퍼즐을 푸는 모양새 같기도 했다. 중간중간 외부의 해석을 검색해서 들어보기도 했다. 역시 해석이 어려운 영화인지 오만가지 의견이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그중에서 주인공이 예수 아니겠느냐는 얘기는 주인공이 옆구리와 손을 찔렸다는 점에서 좀 흥미로웠고, 감독의 가족 중에 자폐인이 있으니 자폐증 환자의 자아와 이를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겠냐는 얘기는 상당히 합당하게 들리는 한편으로, 관객이 감독의 가정사까지 알아야 뭔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는 영화는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해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가장 합당한 해설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감독의 전작인 “유전”에는 자폐증이 있는 딸이 사고를 당하면서 가족이 엉망진창이 되고 주인공이 밥상머리에서 불같은 분노를 토해내는 장면이 있다. “미드소마”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주인공의 여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심리적으로 처참한 지경이 된 주인공과 차마 헤어지지 못한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녀를 스웨덴의 공동체 마을 탐사에 데려가게 되고, 여기서 컬트적인 습속에 휘말린 끝에 살아남은 주인공이 뒤틀린 치유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이 미드소마의 줄거리다. 정리해보면 유전에는 장애나 정서 문제를 겪는 사람이 한 명 나오고 미드소마에는 두 명 나온다. 그러니 이번 작품에서는 아예 자폐증과 그 증상을 가진 이를 둘러싼 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뤘다고 추측하는 게 제법 합당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영화 중반부터 작품이 너무 불친절해서 따라잡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은 것에 비해, 잡다한 의견을 주고 받는 과정은 썩 즐거웠다. 말도 안 되는 얘기도 적진 않은 편이었지만 제법 지적인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마블의 슈퍼 히어로 시리즈처럼 크게 머리를 쓰지 않고 봐도 되는 영화를 본 뒤에도 장시간에 걸쳐 얘기를 나눌 수는 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복합적인 예술품의 곳곳에 알게 모르게 표현된 단서들을 포착하고 마음속에서 그려낸 그림을 대조해보는 작업은, 그렇게 그린 그림이 서로 크게 다를 때 더 재미있다. 엇비슷해서 나도 그렇게 느꼈다고 감탄하고 끝나는 것보다는 서로 다른 부분에 놀라고 그 이유를 나누면서 상대를 설득하거나 상대에게 설득될 때의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광경을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보다 뭐가 뭔지 알듯말듯한 추상화가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 점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퍽 가치 있는 작품이었고, 미드소마보다 나은 면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어려울 건 업지 않나 싶긴 해도 어렵지 않았다면 매력도 반감되었으리라. 나는 이렇게 보고 나서 여러가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포 영화로 “곡성”을 좋아하는데, 아니나다를까 아리 애스터도 이 작품을 극찬한 적이 있다. 취향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그나저나 김영하 작가는 방송에서 한국의 문학 교육 방법에 대해 비판하며 ‘작가는 작품 속에 메시지를 보물찾기처럼 숨겨놓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대체로 여기 동의하는 편이고 그게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꽃다발은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고, 꽃병을 깨뜨리는 고양이는 외부에서 찾아온 삶의 변화를 상징하면 되겠군.’ 하는 식으로 생각하며 작업할 때는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복잡한 의미를 고려하는 창작자가 없진 않을 테고, 영화는 편집 과정에서 초안과 상당히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 일쑤라니 감독도 모르게 발생한 비유나 상징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영화 속에서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를 새로이 찾아내어 주고받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 아닐까. 특히 주입하는 대로 받아먹는 게 당연한 영상 범람의 시대에는 이런 훈련도 종종 해볼 일이다.
*추신
저의 신간,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을 사주시면 생계 유지(!!!)와 창작 지속에 큰 도움이 됩니다. 고장난 물건, 주워온 물건을 수리하거나 중고 거래를 하며 소비 생활에 대해 고민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생활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추신
본문을 유튜브에서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원래 크래프톤에서 만든 서비스인 '오딕'의 음성 합성을 이용하여 제작, 게시하고 있었는데, 8월중 오딕의 서비스 종료가 예정되어 샘플처럼 한시적으로 진행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