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에 따라 역할을 나누고 마스터가 설정한 이야기를 따라가며 주사위로 판정을 하고 즐기는 TRPG로 출발한 던전즈 앤 드래곤즈(이하 디앤디)는 현대 롤플레잉 게임의 시조인 동시에 여전히 엄청난 숫자의 팬들이 향유하는 IP로 건재하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건재하다고는 하지 못할 것 같다. TRPG는 최신판이 정식 한글판으로 나오긴 했으나 번역이 고르지 못하다는 평이 많고, 디앤디를 기반으로 한 게임들이 누구나 알 만한 주류가 된 적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발더스 게이트 같은 명작이 제법 많기는 하나, 인기 모바일 게임이나 젤다 시리즈만한 힘을 가진 게임은 적어도 요즘은 없는 것 같다. 인지도면에서 최전성기를 달린 시기라면 역시 캡콤이 만든 아케이드 게임이 오락실에 보급되었을 때가 아닐까? 콘솔 게임 드래곤즈 크라운이 그 명맥을 잇는 듯 보이긴 했지만, 아케이드 게임 디앤디와 비교하면 그렇게까지 재미있진 않다. 매번 똑같은 짓을 하는데도 악당들을 몰아서 두들겨패고 약점을 마구 공략하는 손맛이 덜한 탓이다. 그래서 요즘 다시 해봐도 디앤디 관련 콘텐츠는 과거로 돌아갈 수록 더 맛깔나고 좋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던전 앤 드래곤’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새로 나왔다. 반가운 것보다 걱정이 앞섰다. 과거에도 영화화 시도가 있긴 했지만 다 망해버린 탓이다. 게다가 판타지 영화로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라는 세기의 대걸작이 도리어 저주로 불릴 정도로 좋은 작품이 잘 나와주지 않는 터라, 이것도 망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생각했다. 티저를 봐도 그저그런 영화에서 대충 웃기는 부분만 모아놓은 냄새가 풀풀났다. 역시나 망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개봉을 하고 보니 예상과 달리 평이 아주 좋았다. TRPG를 즐기는 게이머들은 물론이고 평단이나 일반 관객도 만족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마니악한 팬층이 있는 게임의 영화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놀랄 일이다. 그래서 나도 무슨 일이 있어도 봐야겠구나 싶어 볼 사람을 찾아봤는데, 딱히 보고싶어 하는 사람도, 시간이 맞는 사람도 없기에 가볍게 자전거를 타고 가서 혼자 보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좀처럼 영화관에 가지 않게 된 디앤디 팬이 본 던전 앤 드래곤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쉬운 점이야 물론 없지 않았지만, 이만하면 확실히 팬을 위한 영화로도 일반 관객을 위한 영화로도 손색이 없었고, 심지어 판타지에 별 지식이 없는 사람도 즐기기에 충분해 보였다. 게다가 요즘 영화들이 배울점마저 있었다. 나와서 재밌다고 떠들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진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악의 세력에 의해 아내를 잃고 좌절한 주인공 에드긴(크리스 파인 분)은 동료들과 ‘대도’로 활동하다 아내를 되살릴 수 있는 아이템을 손에 넣으려는 마지막 범행에서 붙잡히고, 이후에 간신히 탈옥하여 자기 딸을 돌보고 있을 동료 포지를 찾아간다. 그런데 대도시의 시장이 된 포지(휴 그랜트 분)는 수상한 마법사와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나쁜놈이 되어 딸도, 아내를 살릴 아이템도 돌려주지 않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에드긴은 포지의 창고를 털고 딸도 구해내기 위한 팀을 꾸리게 되는 것이다. 실수를 만회하고 다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핵심적인 줄거리만 두고 보면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케이퍼 무비인데, 이 과정이 판타지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게 중요하다. 금고를 털기 위해 필요한 재주와 도구 모두에 마법적인 요소가 들어가고, 이것들이 다 익숙한 구도이면서도 소재가 바뀌어 보기에 새롭고 즐겁다. 중간에 중요 아이템을 찾기 위해 들어간 던전에서 펼쳐진 활극은 반지의 제왕 1편에서 가장 압권이었던 발록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게임 속의 복잡한 퍼즐이나 운 좋게 입수한 아이템을 기발하게 사용해서 난관을 돌파하는 재미를 잘 구현했고, 그런 한편으로 명장면이나 클리셰도 잘 비틀어서 유쾌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게 바로 던전이지 싶은 이 활극을 전후로 성기사 젠크(레게 장 페이지 분)가 등장해서 조력자가 되는데, 나는 이 캐릭터야말로 TRPG로서의 디앤디가 어떤 게임인지 잘 보여줘서 죽도록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질서적 선’의 표본으로 설정된 캐릭터라 모든 말이 다 완벽하게 정의롭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케이퍼 무비라면 이렇게 작위적인 캐릭터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데, 바로 그런 지점을 찌르고 나온 NPC가 남들이 못견딜 정도로 선하고 올곧은 언행만 관철하는 게 바로 게임을 원작으로한 영화로서 보여준 빼어난 위트였다.
한편으로 전투 액션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게 된 바바리안 홀가(미셸 로드리게즈 분)도 더할나위 없이 멋있었는데, 홀가가 나온 부분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바로 거사를 치르기 전에 전남편을 만나러 가는 부분이었다. 케이퍼 무비나 액션물에서 이런 역할은 대체로 와일드하기 짝이 없는 남자 액션 스타, 제이슨 스타뎀 같은 사람이 할 때가 많았다. 잘 지내? 좋아보이네, 새 남편이 훌륭한 친구 같군. 잘 지내……. 이런 류의 대사가 나오는 상투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이것을 신체적으로 엄청나게 압도적인 바바리안 여자 캐릭터가 대신하니, 묘하게 웃기면서도 새롭고 신기하며, 그런 한편으로 뻔히 아는 구도인데도 삶의 방식으로 인해 어긋나고 흩어지는 사랑의 허망함에 대한 슬픔이 새삼스럽게 잘 느껴졌다. 이런 ‘성역할 바꾸기’는 경우에 따라선 너무 풍자적이거나 구색을 맞춘다고 넣은 티가 심하게 나기도 하는데, 다양성의 극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판타지 세계에서 잘 연출하니 좀처럼 보기 힘든 명장면이 되었다. 이런 부분은 판타지라는 배경의 빼어난 장점이며, 기존의 클리셰를 이리저리 비틀어보려는 요즘 영화들이 참고할 만한 듯싶었다.
극의 긴장감이 쭉쭉 올라가는 ‘결행의 날’도 여느 수작 못지 않게 즐거웠다. 특별한 아이템을 기상천외하게 활용하는 부분이나 재수없이 일이 꼬이는데 어찌저찌 해결하는 과정도 케이퍼 무비 특유의 즐거움을 잘 살렸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미로 활극이나 보스전도 판타지 소재를 잘 이용해서 위기를 넘기는 전개가 좋았으며, 육탄전, 마법전 모두 잘 만든 요즘 영화다운 동시에, HP가 몇 줄은 되는 게임 속 보스를 파티가 겨우 상대하는 맛이 잘 났다. 특히 미로에서 맹위를 떨치는 몬스터로 등장한 ‘디플레이서 비스트’는 보자마자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캡콤의 디앤디 아케이드 게임에서 참 상대하기 까다로운 보스로 나왔기 때문이다. 주인공 일행에게는 재난이지만 팬들에게는 이만한 서비스도 없었다. 그밖의 몬스터들도 TRPG에서 ‘몬스터 룰북의 이 부분을 이런 능력으로 상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은 의문을 이용한 듯한 전개를 잘 써먹었는데, 이것도 즐거운 팬서비스인 동시에 디앤디 팬이 아닌 사람들도 기발하다고 재미있게 여길 만해서 좋았다. 양쪽을 모두 충족시키기 어려운 법인데 이걸 해냈다는 게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더 자세히 다루면 영화를 볼 때 재미가 없어질 테니 내용 얘기는 여기서 그만두자. 아무튼 영화를 다 본 나는 너무나 만족해서 나왔는데,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내내 차츰 우울해졌다. 이게 마지막 잔치인 것 같아서다.
90년대가 끝나갈 무렵부터 디앤디와 판타지의 세계에 매료된 나는 룰북을 뒤적이며 내가 게임을 해도 다루지도 않을 부분까지 신나게 봤고, 불온한 분위기가 감도는 오락실까지 갔으며, 몇 년간 친구들과 TRPG를 즐겼다. 이후로 TRPG를 하기 어려워진 시절에는 디앤디 보드게임 시리즈로 판타지 세계에 한쪽 발을 딛고 있었다. 심지어 정전이 된 동아리방에서도 손전등을 켜고 던전을 탐험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또 몇 년 떠나게 된 판타지 세계에 반지의 제왕 보드게임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제 그것도 끝이 눈앞에 보일 뿐더러 주변 사람들도 이래저래 바빠지면서 게임 같은 것은 하기 힘들어졌다. 할 만한 게임이야 줄곧 나오리라 생각하지만, 판타지 세계에 소속감과 향수를 품고 시간을 내서 돌아가려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저 씁쓸하고 슬플 따름이다. 그동안 판타지 세계를 떠났다가 몇 년만에 돌아오길 반복했듯이 기다리면 좋은 시절이 돌아올지도 모르겠으나, 그게 몇 년이 걸릴 것인지, 그때 내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내다볼 수 있는 게 뭐 하나 없으니 떠나가는 시절이 더욱 안타깝고 아깝다.
디앤디 영화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에서 팬들은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봤다고, 드디어 디앤디 콘텐츠가 뜰 날이 돌아왔다고 기뻐하곤 있지만, 정작 성적은 별로 좋지 않다. 본 사람들이 대부분 좋아하든 말든 안 볼 사람은 보지 않는 것이다. 잠깐 메이저가 된 줄 알고 좋아했는데, 긱이나 좋아하는 마이너는 영원히 마이너인 모양이다. 이래서야 시리즈가 과연 또 나올지 의문이다. 인공지능이 직업을 닥치는대로 파괴하니 어쩌니 하는 시대에 마법 타령은 맞지 않는 것일까? 조만간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생기면 다시 한 번 보면서 마음속 깊이 새겨둬야겠다. 아주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할 환상의 행복을 잊지 않도록.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