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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ug 02. 2023

매일 메일 인사 잘 하신다



다양한 외부인과 협업을 진행해야 하는 회사원들은 분명 하루에도 수십 통의 이메일을 써야 할 텐데,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 통이나 쓸까말까한 나로서는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렇게 이메일을 가끔 쓰면서도 턱턱 막히는 통에 난처하고 답답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글 쓴다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메일의 인삿말은 그래도 별로 어렵지 않은 편이다. 안녕하세요? 누구입니다. 하고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도 이상하진 않다. 아주 정중하게 써야 할 때만 이러저러한데 잘 지내셨냐는 식의 계절 인사 따위를 추가하면 되는데, 계절마다 아름다운 소재가 정해져 있기에 그중에 하나를 떠오르는 대로 집어넣으면 해결된다. 한국의 또렷한 어메이징 사계절 만만세다.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가면 아무래도 인삿말보다는 쓰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아이러니한 점은, 할 말은 정해져 있는데 이것을 포장하는 방법 때문에 한참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좋은 일을 전달하는 내용이라면야 아무렇게나 써도 무방하겠지만, 내 경험으론 이메일의 대부분이 뭘 부탁하거나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거나 양해를 구하는 것들이다. 즉,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 자세를 눈으로 보여줄 수도 없고 목소리로 들려줄 수도 없으니 글솜씨를 어떻게든 발휘해서 상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원하는 것을 요구해야 해서 결코 만만하지 않다.


가령 상대가 기한 내에 줘야 하는 자료를 주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는 사실 어느 모로 보나 내가 화를 내도 될 상황이지만, 괜히 감정을 드러냈다가 상대가 ‘지가 뭔데 말을 이렇게 해? 이 싸가지 없는 놈이랑 다시 거래를 하나 봐라’라고 생각했다간 나같은 프리랜서는 목숨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말을 잘 고르지 않을 수가 없다. 과장이 아니라, 사람이란 정말로 어떤 문제 상황의 전후 사정이나 자기 잘못은 기억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인상이나 감정만을 기억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때는 ‘다름이 아니라 어제까지 보내주시기로 한 자료가 오지 않아 확인차 메일 드렸습니다. 월말이라 여러모로 바쁘시겠으나 꼭 확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도로 쓰게 되는데, 좀더 자세를 낮춰야 할 것 같다면 ‘전산 처리 과정 중에 누락 등이 있지 않았나 싶어’ 따위 문장을 더한다. 사실 무슨 피치 못할 문제가 있더라도 책임지기로 한 사람이 일을 책임지긴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니 배려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굳이 내가 상대의 잘못을 의심하거나 비난할 의향이 없다는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다. 종업원이 접시를 떨어뜨려 내가 얼굴에 화상을 입었는데도 ‘접시가 너무 미끄러운 재질이 아니었나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격이다. 이런 소리를 쓰고 있자면 나도 이게 뭔 짓인가 싶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


용건이 한 개가 아니라면 본론이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용건들을 문장으로 풀어 썼다간 제대로 된 답을 받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말씀드린 자료를 확인해서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전에 추진해보기로 했던 자원봉사 프로젝트는 언제 확정될까요? 다음주 중으로 모집글을 써보려 하니 대략적인 일정이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으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번 뉴스레터의 마지막 아티클 요약문에 들어간 용어가 오타인 듯하니 추후에 수정 부탁드립니다.’ 따위로 메일을 작성하면 최소한 한 가지 사항에 대한 답은 깨끗이 빠지기 마련이다. 문장으로 쓰더라도 개별 항목으로 줄을 나눠야 답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 말씀드린 자료를 확인해서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전에 추진해보기로 했던 자원봉사 프로젝트는 언제 확정될까요? 다음주 중으로 모집글을 써보려 하니 대략적인 일정이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끝으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번 뉴스레터의 마지막 아티클 요약문에 들어간 용어가 오타인 듯하니 추후에 수정 부탁드립니다.


물론 이렇게 쓰고도 기대한 답을 다 받는 데에 실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아주 간결하고 이상적인 방식으로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다음 3가지 사항 요청 드립니다.

1. 자료 A.
2. 자원 봉사 프로젝트 확정일 또는 예상일.
3. 7월 3주차 뉴스레터 마지막 아티클 용어 오타 수정.


이렇게 쓰면 쓰면서도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고, 읽는 쪽도 잘못 보거나 뭘 빠뜨릴 일이 없다. 하지만 이런 비인간적인 이메일을 썼다간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르는 일이니 어쩌겠는가? 최소한 문장형으로 쓰고 항목별로 답해주길 바라는 게 최선일 것이다.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모두가 업무적으로 피곤해지는 방향이지만 둥글고 부드럽게 사는 것도 일견 쓸모없어 보이는 예절처럼 중요한 일이니 별 수 없다. 저 정도로 간략한 메일을 받고 무슨 일을 처리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고 생각해보면 확실히 기분이 좋지 않기도 하고.


어찌저찌 본론을 해결한다 해도 마지막으로 거대한 난관이 남아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끝인사가 그것인데, 사람이 무슨 부탁을 해놓고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가버리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끝인사는 특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또 좋은 인사 거리를 찾아보자면 역시 가장 무난한 게 계절 인사다. 하지만 서두에서 계절 인사를 이미 써먹었다면 곤궁해진다. 아무리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서두에서 장마가 끝나고 푸르른 녹음이 우거지는 가운데 안녕하시냐고 인사해놓고 말미에는 무더위가 심하고 소나기가 오락가락하니 건강 주의하라고 하는 건 뭔가 좀 앞뒤가 안 맞는 느낌이 든다. 여름이라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맥락이 이상하다. 사실 애초에 별 맥락이 없는 인사니까 구조적으로 완성도를 따질 이유는 없지만, 글 쓴다는 사람이 이렇게 아무 인사나 대충 하냐는 식으로 평판이 깎일 것 같다.


이럴 때 유용하게 사용되는 소재가 세간에서 자주 들리는 걱정거리인데, 요 몇 년에 비해 근래에는 이것도 좀 어려워졌다. 다소 불경스러운 소리지만, 코로나 19가 유행중이던 때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걱정거리가 항상 공기처럼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코로나 걱정 따위 아무도 하지 않게 되어 매일 주워들은 뉴스 중에서 걱정할 거리를 잘 떠올려 써야만 하는 처지다. 그중에서도 일상적 걱정거리로 손색이 없는 것을 고르면 십중팔구 건강 걱정이 되는 터라 회의감이 드는데……돈이 얽힌 사회적 관계를 여럿 맺는 나이쯤 되면 건강 걱정도 소일거리처럼 하게 되는 터라 누가 인사치레로 해주는 걱정도 제법 고맙다. 이것도 나이가 주는 몇 안 되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될지 모르겠다.



(좋은 인사는 계절과 숙련도, 그리고 공감에서 온다)



다만 가까운 시일 안에 메일을 몇 통 쓰다 보면 ‘일교차가 심한데’, ‘무더위가 심한데’, ‘폭우가 내리곤 하니’ 등등의 소재도 고갈되고 만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천편일률적인 인사를 쓰게 되니, 그 대표적인 인사가 바로 요일 인사다. 요일 인사라고 해서 요일마다 월요일에는 월급 많이 받으세요, 화요일에는 화내지 마세요, 수요일에는 수영을 하고…… 이런 인사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는 ‘건강한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라고 쓰고, 목요일, 금요일에는 ‘다가오는 주말 건강히 보내시길 바랍니다.’라고 쓰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아무 의미도 개성도 없는 인삿말이지만, 이만하면 중간은 가는 것 같으니 이 정도에서 모두가 만족하면 좋겠다. 이보다 더한 인사는 피차 에너지 낭비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나 좋은 인사를 써야 한다는 필요성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은 언제나 넘쳐나는 모양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인사를 정리해놓은 사이트도 있고, 심지어 앱도 있다. 이런 문물을 보면 세상 참 좋아졌구나 싶은 한편으로 막상 써보려고 하면 망설여지는 것이, 만약에 내가 인삿말을 대충 베껴왔다는 사실을 들키면 엄청나게 게으른 사람으로 여겨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반대로 남이 내게 쓴 인삿말이 별 고민 없이 베껴진 것임을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다. 내가 그 정도의 창의력이나 시간도 할애할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생각하면 퍽 우울해질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술이 발달한 덕에 요즈음은 이런 고민에 시달릴 것 없이 인공지능에 묻는 방법도 있다. 인삿말만 추천받는 게 아니라 아예 본문까지 필요한 용건에 맞춰 써달라고 할 수도 있어서, 실제로 외국어 이메일 작성에 애를 먹는 사람들이 잘 써먹고 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한국어로도 충분히 멋진 이메일을 작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편리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메일을 쓰는 쪽이나 읽는 쪽이나 인공지능에게 일을 다 맡기면 우리는 대체 무엇과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나 싶어 의문이다. 부하를 시켜 교류를 처리하고 결과만 받아보는 자리에 있는 셈인데, 과연 이것도 상대와 대화를 했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그나저나 내 몇 안 되는 거래처 중에서 한 곳은 과연 이게 사람의 솜씨인가 싶을 정도로 인사를 지극히 정중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문어체로 능수능란하게 잘 써서 매번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내가 작가고 상대가 편집자인 상황이 어색하고 민망할 지경이었는데, 수년 전부터 그랬으니 인공지능의 힘은 아니었으리라 본다. 이런 대화 상대를 만나면 확실히 존중받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고, 존중받는 느낌이 들 때 무슨 일이든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고로 나도 이메일 인사를 훌륭히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편집창에 무슨 말을 써야 할 때마다 벅차고 힘들어지는 것을 보면 잡다한 일에 덜 지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인가 싶기도 하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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