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산을 정복했으니 여유있게 하산할지, 산행을 이어갈지 정할 때였다. 세 시니까 식당까지 두 시간을 잡으면 다섯 시고, 좀 일찍 식사하고 돌아가도 여덟 시쯤 될 테니 적절히 여유로운 일정이다. 그러나 나는 갈림길까지 내려간 뒤, 결국은 도봉산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아무래도 컵라면 작은 컵 하나만 먹은 것처럼 감질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몇 번 생각한 대로 도봉산에서 내려갈 길은 많다. 지치면 내려가면 그만이다. 인생살이나 장편소설 작업과 달리 중간에 그만둬도 괜찮으니 부담없이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사패산에서 도봉산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만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출발할 때만해도 사패산과 도봉산의 높이 차이 정도만 더 올라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시간에 걸쳐 고도 80미터 정도는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내리막을 가는 것 자체는 괜찮았지만, 길이 길어지자 그만큼을 다시 기어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앞날이 걱정스러워졌다. 완성한 작품의 3분의 1을 지워버리는 기분이랄까. 시간만 넉넉해도 그 정도로 걱정되진 않았을 테지만, 네 시가 되도록 도봉산을 본격적으로 오르지 못하니 영 초조해졌다. 내리막의 끝에서 나타난 고양이만이 그런 심정을 잠시 잊게 해주었다.
네 시에 도착한 갈림길부터는 드디어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다시 진도가 나아가는 듯해서 일단 다행이긴 했지만, 좀 걷다 보니 이건 이것대로 만만치 않았다. 난간을 잡아야만 갈 수 있는 암릉이 펼쳐더니 그 뒤로는 까마득한 나무 계단길이 나와버린 것이다. 물론 나무 계단이 지금 상태에선 안온한 길이긴 했으나 지금은 디딜 곳이 험해도 단단한 난간을 잡고 몸을 끌어당길 수 있는 길이 나았다. 그만큼 지쳐서 하체의 부담을 줄이고 싶었다. 나는 접지력이 좋은 대신 충격 흡수가 부족한 네파의 쉐도우프로를 신고 온 것을 후회했다. 이런 날은 코오롱의 트라이포드가 나았을 것이다. 역시 코스에 맞는 장비를 잘 고르는 게 건강한 등산의 핵심이다.
계단길과 오솔길과 약간 지저분한 암릉을 한 시간 기어오르자 마침내 포대능선 쉼터였다. 도봉산 북동부를 보다 보면 ‘저기 웬 오두막이지’ 싶은 산불 감시 초소가 있는 그곳이다. 이곳만 해도 주변 도시가 다 내려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아서, 나는 주저앉아서 숨을 돌리며 신발을 벗었다. 양말이 젖어서 발바닥이 뜨거웠다. 나는 양말을 예비용으로 갈아신었다. 다행히 발가락은 아프지 않았다. 발이 앞으로 밀리지 않도록 발등부터 발목까지 닿는 쿠션을 넣어둔 덕이다. 내리막을 걸을 때마다 새끼발가락이 찍히는 건 상당히 고통스럽고 속도를 늦추는 일이므로, 등산화를 교체할 수 없다면 해볼 만한 방법이다.
그렇게 쉬자니 고양이가 있던 갈림길에서 스쳐 지나갔던 중년 남성 등산객 한 명이 몇 걸음 옆에 와서 쉬면서 말을 걸었다. 물론 이 시간에 등산객끼리 나눌 얘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냐’는 것이었다. 고뇌에 찬 종교인의 선문답 같지만 이날의 대화는 순수히 실제적인 것으로, 우리 모두 사패산에서 와서 도봉산 정상으로 가는 중이었다. 신선대까지 갔다가 해 지기 전에 하산 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우리의 걱정거리였으나, 그는 스마트폰을 보더니 시간이 딱 맞겠다고 했다. 등산 경험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다소 안심하고 그와 헤어져 먼저 도봉산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니, 이 아저씨,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닌가. 산불감시 초소 옆에서 담배라니, 등산 경험이 많다고 상식도 겸비하게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솔직히 화가 났다. 아마 흡연자이기에 더 화가 났을 것이다. 나라고 니코틴이 필요없어서 빈손으로 나다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초소를 지나 포대능선을 걷는 길은 비교적 마음이 놓이는 편이었다. 망월사에서 신선대로 가는 길이라 익숙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등산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등산로라니, 5년, 10년씩 등산을 다닌 사람이나 주장할 만한 개념 같아 민망하다. 그러나 과장없는 사실이다. 도봉산 포대능선부터 신선대로 이어지는 뾰족한 바위 능선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형상으로 극적인 동시에 적당히 견디고 즐길 만큼만 어렵다. 비유하자면 불닭볶음면 같은 맛이라, 이따금 다시 맛보고 싶어진다.
다만 느긋하게 그런 감상을 할 수 있는 것도 몸에 여유가 있을 때다. 나는 이날 이미 사패산에서 기운을 빼고 온 터라 신선대까지 가는 길이 기묘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아름답지만 길었다. 보람있는 일이라고 힘들지 않을리가 없듯, 아름다운 길이지만 걸어올라가는 게 고역이었다. 예전과 다른 길로 온게 아닌가 지도를 확인했을 지경이다. 그리하여 6시에나 Y계곡에 도착했다.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우회로가 아닌 Y계곡을 기어내려갔다가 다시 기어올라갔다. 이미 한 번 가본 우회로가 길고 지겹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곳을 다시 걷는 것보다는 팔을 써서 수직운동을 하는 편이 나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실제로 Y계곡을 건너는 건 어중간한 경사로를 걷는 것보다 수월하게 느껴졌다. 팔 운동도 분명 등산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등산에 뛰어들어보면 인간의 이족보행이 얼마나 하찮은가 실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6시 반에는 결국 신선대에 오를 수 있었다. 사패산과 도봉산을 하루에 다 오르다니, 작년까지 등산과는 아무 관련 없이 살던 나로서는 믿기 어려운 발전이다. 이만하면 개인적인 업적을 달성했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다. ‘불수사도북’이라고 강북 5산을 하루에 연달아 오르는 사람도 널린 마당에 이게 뭔 자랑인가, 하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정말로, 자책과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 찌든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놀라울 정도로 기분이 상쾌하고 말끔했다. 남들이 느리든 빠르든 산을 다섯 개 타든 열 개 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무엇을 어찌하면 되는지 가르쳐줄 스승도 없이 등산을 익혔고, 관악산을 간신히 오르는 수준에서 시작해서 무릎이 상한 상태에서도 사패산과 도봉산을 연달아 오르는 날까지 왔다. 느리지만 분명 나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다른 부분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나아지고만 있다면 굳이 비참해질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기확신과는 별개로, 지구의 자전은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기에 빠르게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나는 신선대까지 온 김에 전에 올랐던 우이봉을 거쳐 가는 길을 걸어보고 싶었으나 욕심을 버리고 허겁지겁 마당바위 방면으로 하산했다. 해질녘의 산은 놀랍도록 고요하고 쓸쓸해서, 초조함 사이로 슬픔이 어둠처럼 서서히 젖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남빛 어둠을 망치고 싶지 않아 짙푸른 하늘의 빛을 반사하는 돌들을 보며 헨젤과 그레텔처럼 걸었다. 들머리를 지날 때는 8시 19분이 다 되어 조명 없이는 걷기가 위험할 지경이었다. 내가 나만의 속도로 발전하는 것과 별개로 시간은 재난처럼 흘러가는 법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영 씁쓸해진 그 심정은 도봉산 입구의 먹자골목에 들어서자 한층 더 심해졌다. 가는 곳마다 장사 끝났다고 나를 문전박대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9시가 다 되었는데 산 입구의 어느 식당이 사람을 받겠는가 말이다. 나는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포장마차 같은 노점에 앉아 순대국밥 대신 순두부 찌개와 막걸리를 먹었다. 다행히도 과히 나쁘지 않은 식사였다. 건강 면에선 순대보다 두부가 나으니 위안거리도 되었다.
내가 혼자서 얼큰한 순두부찌개와 막걸리로 속을 데웠다 식히길 반복하는 동안 옆자리에는 40대 같은 커플 한 쌍과 그들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앉아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커플이 아닌 여자는 남편이 주말이면 꼭 축구를 하러 나가서 술을 마시고 온다고 불평했고, 커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주말을 꼭 함께한다는 규칙을 지킨다 했다. 듣자니 나로서는 좀 뜨끔했다. 나는 지금 그 누구에 대해서도 인간관계의 의무를 지지 않은 채 칼로리 소모라는 핑계를 대며 마음놓고 막걸리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유는 행복의 근원인가 방종의 요람인가? 글쎄, 아마도 다른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명산 두 곳을 단번에 올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이 사실은 등산이라는 내 취미 생활의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의미는 흔들리지만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나는 위축감을 털어버리고 보람찬 귀로에 올랐다.
교훈
산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자.
예정된 코스에 맞는 장비를 택하자.
양말이 땀에 젖어 발바닥에 열감이 생기면 양말을 갈아신어 물집을 방지하자.
끈을 조여도 발이 앞으로 밀려 발가락이 찍힌다면 발가락 부분만 잘라낸 깔창을 추가해서 발등을 높이거나 발등에 쿠션을 넣어 대처할 수 있다.
상체 운동도 등산에 도움이 된다.
여유를 두고 움직이자. 일몰 시각 3시간 전에는 하산을 시작해야 안전하다. 덤으로 8시부터 음식점이 문을 닫기 시작하니 하산 후에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헤매고 싶지 않으면 이 역시 고려하는 게 좋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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