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의 맛과 형식의 본질화
90년대에는 학교에서 운동회나 소풍 같은 행사가 있으면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새벽부터 온갖 재료를 깔아놓고 싼 김밥이 교내 무대에서 각축전을 벌이는 형국이 되곤 했는데, 그렇게 김밥을 교환해서 먹어보면 우리집에서 만드는 방식이 당연한 줄 알았던 김밥에도 무수히 많은 맛과 다양성이 있다는 걸 체험하게 되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밥을 만드느라 지독한 고생을 해야 했던 전국의 부모님들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우리집 방식이 기본인 줄 알았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는 다양성 체험의 수단으로는 이 김밥 파티가 괜찮지 않나 싶다.
나는 김밥을 좋아했다. 그렇게 김밥이 대량으로 생산된 날은 아침도 김밥을 먹고 다음날도 또 김밥을 먹어야 했지만 질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마 그렇게 계속 김밥을 먹어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고 해도 그다지 불만을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새로운 맛을 즐기고 체험의 지평을 넓혀가려는 의지가 애초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집 김밥은 햄, 게맛살, 계란말이, 당근, 시금치, 단무지가 주재료였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평소에 단무지도 거의 먹지 않고 시금치는 질색하는 편이었으면서도 김밥에 들어간 건 맛있게 먹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집 김밥에서 종종 발견되는 우엉도 평소에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별 불만 없이 먹었다. 요컨대 그 재료들을 근본적으로 꺼리고 혐오하고 견디지 못했던 게 아니라, 일정량 이상이 입안에서 맛을 강렬하게 주장하며 오래도록 질겅질겅 해체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걸 싫어했던 것이다. 음식 맛에서 중요한 건 식재료의 맛만이 아니라 조화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물론 반대의 예시도 있다. 아주 드물게 김밥에 오이를 넣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이걸 상당히 싫어한다. 오이 특유의 비릿한 향이 나는 액체성 질감이 김밥에 들어가면 다른 맛을 다 가려버리는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끼에 들어간 건 상큼하게 잘 먹는다. 아마 마끼가 더 상쾌함을 강조한 샐러드 같은 음식에 가까운 탓일 텐데, 역시 뭐든 단견으로 좋은 것 싫은 것을 딱 잘라 나눌 일이 아니다. 아무리 형편없어 보여도 어딘가에선 빛이 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짚신도 짝이 있고 나물과 오이도 제 자리가 있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면 위안이 되는 구석도 있다.
(단면이 김밥을 보여준다. Image by jinsoo jang from Pixabay)
그런데 어린 시절 소풍에서 압도적인 주인공으로 여겨진 김밥이 그 뒤로는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된 듯하다. 일단 어린아이에서 벗어난 뒤로는 부모님의 정성이 담긴 김밥을 맛본다는 이벤트도 끝나버렸고, 분식집에서 사먹든 편의점에서 사먹든 운반과 취식이 간편한 형태라는 이유로 일종의 비상식량 취급을 하게 된 탓이다. 같은 음식도 먹는 방식이 중요한 법이라, 김밥이 아무리 맛있어도 은박지를 대충 벌려놓고 젓가락으로 집어먹거나 포장 끝만 뜯어서 손에 들고 짜먹듯이 한 칸식 먹자면 도통 식사를 즐기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등산을 시작한 뒤로 몇 달 동안은 점심 식사로 김밥을 사가서 먹던 나도 오래 지나지 않아 메뉴를 바꾸고 말았다. 산에서 김밥 한 줄을 먹으면 밥이 주는 포만감이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까지의 과정도 맛도 영 개운치 않았다. 편의점 진열대의 여러 김밥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과 그보다 덜 저렴하며 맛이 있어보이는 것을 견주는 과정도, 물에서 방금 꺼낸 해삼처럼 싸늘한 김밥을 포장 째로 손에 들고 우걱우걱 먹어치우는 것도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덤으로 탄수화물이 너무 많다는 것도, 더우면 상하기 쉽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 문제거리였다. 그리하여 김밥 대신 닭가슴살을 사다 산속에서 뜯어먹는 짐승같은 식사를 하다가…… 지친 몸으로 싸늘한 닭가슴살을 먹는 것도 마음속 어딘가 피곤한 감이 있어서 단백질바로 바꾸고 말았다. 단백질바라고 해서 정당하고 멋진 식사가 될 순 없지만, 온당한 섭취 방식이 따로 있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기분을 주진 않는다.
그리하여 김밥은 본격적으로 일상속에서 접할 일이 없는 음식이 되고 말았는데…… 올해 봄에 친구들과 벚꽃놀이를 갔다가 김밥이 맛있고 정취가 있는 있는 음식이라는 걸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누구 한 명이 아주 맛좋은 김밥을 정성껏 싸온 것이냐면, 그렇진 않다. 케이크와 양배추 쌈밥 같은 수제 음식 사이에서 김밥만은 분식집에서 사온 것이었다. 그러나 은박지가 아니라 적당한 크기의 종이 상자에 담겨 있었고, 김밥의 가운데는 속이 보이도록 눕혀져 있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김밥이 원래 색상도 화려하고 맛있는, 소풍 도시락의 결정적인 별미라는 걸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맛에 대해 논할 때 그릇까지 거론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파인 다이닝 같은 고급 음식의 플레이팅이면 모를까, 김밥처럼 간단히 먹는 음식은 그릇이 아예 상상의 범위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김밥을 다양한 방식으로 먹어보고나니 김밥 역시 멋지게 차려놓고 요리 대접을 해주며 먹는게 가장 맛을 깊이 즐기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만 조화를 이뤄야 하는 게 아니라 김밥 자체도 김밥을 둘러싼 배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했던 것이다. 나물과 오이도 어디에 넣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김밥도 어디에 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김밥 얘기를 다룬 이 글은 어디에 어떻게 넣어야 완벽해질까……. 때때로 형식이 본질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고민이 깊어지는데, 어쨌거나 도시락통에 김밥을 쌓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