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이라기에는 신날 구석이 없는 이야기
반지의 제왕은 제가 깊은 애정을 가진 IP입니다. 어릴 때부터 던전즈 앤 드래곤즈라는 판타지 세계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자연히 그 원전이 되는 반지의 제왕 소설도 영화가 나오기 전에 읽어보려 했고(어릴 때 참고 읽기엔 지루한 편이었습니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는 친구의 친구까지 포함된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해서 극장까지 뛰어가서 봤습니다. 수사법으로 쓴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뛰어갔습니다. 개중에 자전거를 타고 온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는 천천히 달리고, 나머지는 좀 빨리 뛰었죠. 마치 기병과 보병이 섞인 군부대처럼…….
아무튼 던전즈 앤 드래곤즈 TRPG도 해보고, 겁스 같은 다른 TRPG도 해보고, 판타지 소설도 써보고, 그러다 대학 때는 던전즈 앤 드래곤즈 어드벤처 보드게임 시리즈를 하고, ‘호빗’ 시리즈를 보고, 코로나 유행기에는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반지의 제왕 보드게임을 모조리 해치웠습니다. 팬들 사이에서 영 잘못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 드라마 ‘힘의 반지’도 봤죠. 그런 것치고는 ‘가운데땅’ 이야기의 배경 지식까지 섭렵하진 않은, 원전보다 파생 상품을 더 좋아하는 애매한 오타쿠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제게 반지의 제왕과 가운데땅은 영혼의 일부를 두고 온 세계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는 가운데땅 이야기 ‘로히림의 전쟁’은 상당한 기대작이었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저건 꼭 극장에서 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슬프게도 ‘혼자 영화관이나 다닐 때가 아니다’라는 압박감이 이겨서 상영 시기를 놓치고 말았지만…… 뒤늦게 작품을 접하고 보니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 결과적으로는 다행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로한(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의 지팡이에 맞고 회춘한 왕 세오덴의 나라)의 왕 헬름에게는 아들들과 딸 하나가 있습니다. 이 딸이 주인공 헤라로, 흔해빠진 공주들과 달리 자유를 사랑해서 혼나면서도 바깥 세상을 돌아다니는…… 이제는 반대로 식상해진지 오래된 유형입니다. 그런데 헬름은 그녀를 보호하고 잘 결혼시킬 생각만 하고, 그 와중에 이웃한 던랜드 민족 지도자 프레카가 아들 울프를 데려와 결혼시키고 동맹을 맺자고 합니다. 헬름도 헤라도 거절합니다. 헬름은 오만한 프레카가 싫었던 듯하고, 헤라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울프와 느닷없이 결혼하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듯합니다. 헬름과 프레카의 말싸움이 맨손 결투로 이어집니다. 근데 여기서 헬름의 펀치 한 번에 프레카가 죽어버립니다. 이것으로 두 국가의 사이는 악화되고, 그렇지 않아도 헤라의 거절에 자존심이 상했던 울프는 완전히 눈이 뒤집혀 복수를 다짐합니다.
이후 헤라가 들판에서 폭주한 거대코끼리의 습격을 슬기롭게 피했다가 울프에게 납치당하고, 오빠들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이 과정에서 울프가 외세를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키려한다는 것을 알아채지만 이야기에 큰 도움은 되지 않고, 내통자까지 이용한 울프의 침공은 성공적으로 이어집니다. 천만다행으로 헤라가 기지를 발휘해서 국민들을 요새로 대피시키긴 하지만, 왕자들은 전사하고 헬름은 몸져누웠다가 깨어나서 배트맨처럼 혼자 나가 적들을 때려죽이고 다니는데, 우연히 그를 찾아낸 헤라가 위기에 처하자 정신을 차리고 딸을 구해냅니다. 그 다음엔 위대한 왕답게 혼자 성문을 사수하고 죽습니다.
혹독한 겨울 때문에 던랜드도 시간을 낭비하고 버티기 힘들고 로한도 수성 외에 묘수가 없는 상황에서, 울프는 무리하게 공성탑을 이용한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헤라는 목숨을 걸고 절벽 위 대독수리와 접촉해서 헬름의 갑옷을 어디로 보냅니다. 그뒤 헤라는 자신이 미끼가 된 틈에 국민들을 대피시키로 하고 예전부터 전해내려온 드레스 차림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결혼을 조건으로 국민의 안전을 요구하는가……싶더니 일기토를 신청합니다. 물론 헤라가 이기는데, 울프는 비열한 캐릭터의 전형답게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반격하다 죽고, 던랜드군은 헬름의 갑옷을 입고 나타난 헬름의 조카 프레알라프의 모습을 보고 헬름이 악귀로 다시 살아난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패퇴합니다. 그리하여 로한의 왕은 프레알라프가 이어받고 헤라는 또 자유를 찾아 넓은 세상으로 떠난다……이것이 로히림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싸우는 왕녀 이야기는 기본만 해도 재미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한 생성형 이미지)
줄거리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이야기의 문제는 썩 좋아할 만한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캐릭터의 성격과 기본 구도가 판에 박혔더라도 그 구도에서 추구할 만한 재미가 잘 구현되면 괜찮은 법인데, 여기선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딸을 보호하기만 하는 아버지와 능력있고 자유로운 여주인공 이야기의 좋은 예시는 반지의 제왕 영화에서 이미 나왔죠. 주인공이 결정적 순간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활약을 보이고,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인정받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선 자기를 인정해달라는 주인공의 요구로 인한 갈등 양상이 애초에 또렷하지 않고, 주인공의 활약으로 위기를 극복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장면도 모호합니다. 그런 장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활약이라고 해봐야 공격을 한 번 잘 하는 정도에, 곧바로 왕이 자식과 국민을 위해 희생하는 장면으로 이어져 희석되고 맙니다. 액션의 강렬함과 능력 발휘의 맛은 그 이전에 나오는 거대 코끼리 처치 장면이 더 나았죠. 쓸데없이 바깥만 싸돌아다니는 줄 알았던 헤라가 돌아다니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코끼리를 괴물에게 유인해 처치했다! 썩 좋았는데, 이것도 직후에 주인공이 납치당하며 희석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고조되려다 툭툭 꺾이는 느낌이랄까요.
빌런인 울프와의 구도도 영 신통치 않은 듯했습니다. 어릴 때 친하게 지낸건 잘 보여줬지만, 그 뒤로는 얼마나 친하게 여기고 멀어진 걸 안타깝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냥 진짜 아무 감정도 없고 어릴 때만 친했던 사이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그만큼 갈등도 심심해지죠. 뻔하더라도 어릴 때 소꿉놀이하다 결혼하자는 약속을 했거나, 편지로 계속 교류하다 가끔 만나면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사이는 되었어야 틀어진 사이가 비극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를 잃었다는 복수심과 헤라에 대한 비뚤어진 애정 두 가지만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울프의 매력도 매력이랄 게 없는 캐릭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단 아버지가 죽은 건 안타깝지만 정당한 대결의 결과고, 상대인 헬름이 암수나 살수를 쓴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분노에 미칠 일인가 의문인 마당에, 헤라에 대한 비뚤어진 애정도 애정이 있었던 게 맞긴 한지,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건지, 아니면 비겁하게라도 소유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원인은 희미한데 변화만 크니까 맥락을 모르겠습니다. 그 두 가지가 아닌 원대한 야망이 또렷했다면 비겁하게 굴어도 원하는 건 어떻게든 이루려하는 악당의 매력이 살아났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까 그냥 시종일관 찌질한 비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널 위해서라면 가운데땅 전부를 정복하겠어’라거나, ‘그따위 미적지근한 통치로는 더 큰 세력의 침략을 막을 수 없어’ 같은 뻔한 목표라도 줬으면 좋았겠죠. ‘이야기의 매력은 악역의 매력을 넘을 수 없다’는 창작계의 격언이 있는데, 로히림의 전쟁은 그 격언이 정확하다는 걸 반증한 셈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 헤라가 특별히 매력적이냐면 그것도 아니었죠. 작화와 캐릭터 디자인이 예쁘다는 건 인정합니다. 이렇게 고급하면서 아름다운 캐릭터는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쁘다고 매력적인 건 아니라는 증거라고 해도 좋을 지경입니다. 위에 설명한 대로 ‘자유로운 영혼의 공주’의 매력이 살아날 법하면 스토리상 장면이 죽어버리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둘째치고 그렇게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못했습니다. 중반까지도 활약상이 상당히 흐릿했어요. 배반자의 공격이라는 위기도 자신만의 무력이나 기지로 이기지 못했고, 쓰러졌다가 실종된 아버지 헬름을 찾는 것도 단서를 기반으로 추적한 게 아니라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모습에서 리더십을 기대할 법했는데 딱히 용기를 주진 못했습니다. 이런 리더는 보통 ‘용맹한 우리가 꺾일 일은 없을 것’이라거나 ‘싸우다 죽어도 위대한 선조들이 기다린다’ 같은 허풍이라도 치기 마련인데, 상황이 불리하다고 웅성대는 신하들에게 하는 연설이라곤 ‘다같이 힘을 합치면 이겨낼 수 있어요’ 따위가 고작이었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신하도 ‘듣기 좋은 말이 뭔 소용이람’이라고 중얼대더군요.
물론 캐릭터가 후반에 가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건 흔한 일입니다. 헤라도 성장을 하긴 합니다. 그런데 이게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죠. 목숨걸고빙벽을 올라서 대독수리를 만나는 건 상당한 활약이었죠. 근데 그 과정이 애니메이션이면서도 탐 크루즈의 암벽 등반보다 위기감이 안 느껴지는 것이었고, 그 끝에서 얻어내는 대독수리의 지원도 대체 뭘 어떻게 부탁하는 건지 모호합니다. 헬름의 갑옷을 배송해달라는 것이었음이 곧 드러나긴 하지만 이 과정 전체에서 긴장도 기대도 생기지 않아요. 지불하는 것도 소소하고 얻는 것도 알쏭달쏭한 겁니다. 둘 중 하나라도 확실했어야겠죠. 빙벽을 오르기가 죽도록 위험했다든가, 아니면 도착은 했는데 탈진해서 쓰러졌다든가, 부탁을 위해 희귀한 먹이나 보석이라도 바친다든가, 하다못해 혈통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명령이라도 멋있게 했으면 나았겠죠. 기껏 한다는 게 “I beg you”라니, 여기서 무슨 감동을 느끼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갑옷 배송으로 무슨 효과를 누릴지 복선이라도 잘 깔아놔야 관객이 ‘저게 꼭 성공해야 할 텐데’ 하고 긴장하죠. 전 대독수리가 전쟁에 참여하나 생각했습니다. 작품 초반에 길들이려는듯한 모습이 나왔으니까, 헤라가 이글-라이더라도 되나 싶었던 겁니다.
마지막 활약인 일기토도 볼만은 했지만 전개 과정은 약간 의문이었습니다. 드레스를 입고 가길래 당연히 결혼을 미끼로 삼는 줄 알았는데, 울프도 곧장 필요없다고 하고, 헤라도 결투를 요구한다는 전개는 중간에 뭐가 빈 느낌입니다. 드레스가 나왔으면 울프가 잠깐 동요한다거나, 아니면 결혼으로 협상하러 왔다는 명목으로 포위망을 통과한다거나 이유가 나와야하는데, 그런게 없으니 수틀려서 냅다 싸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드레스를 입고 결투한다는 장면을 미리 과제로 삼아놓고 전개를 이어맞춘 느낌이랄까요. 드레스와 결투는 흔하고도 질리지 않는 공식이지만 이런 식은 아쉽습니다.
승리의 결과로 이어진 결말도 석연치는 않았습니다. 헤라가 왕좌에 앉을 성격은 아니니까 내용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야기중에서 돋보인 적이 없는 사촌이 대신 왕이 된 것도 맥이 빠지고, 그 과정에서 헤라의 선택에 대한 경의나 존중이 보이지 않은 것도 맥이 빠졌습니다. ‘네가 되었어야 하는데’가 전부라니, 반지의 제왕처럼 모두가 경의를 표하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나레이션으로 사태를 정리하고 물러났다고 해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사건이 끝나고 조용히 떠나는 주인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보통 난리가 난 마을을 지나치다 의협심에 나서는 떠돌이 주인공이 그렇습니다. 흔한 전개죠. 하지만 정당한 계승권자가 이런 식으로 떠나는 건 역시 뭔가 많이 빠져버린 느낌입니다. 기대하는 멋과 표현된 멋이 도통 맞질 않아요.
물론 이런 실망 모두 제 마음대로 판에 박힌 기대를 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루한 클리셰의 집합을 바라는 늙은 관객이니까요. 하지만 이야기가 기대를 벗어나면 기대밖의 기쁨이 있어야하는데 이 작품에선 항상 맥이 빠지기만 했습니다. 사루만, 간달프, 반지처럼 전작과 연결되는 소재들을 다뤄주긴 했지만, 본판이 미적지근하면 그런 서비스가 뭔 소용이겠어요. 아무튼 애정할 대상을 잃어버린 오타쿠로서도, 보통의 시청자로서도 실망밖에 얻은 게 없습니다. 톰홀랜드의 스파이더맨에서 ‘수트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수트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데, ‘반지의 제왕’ 딱지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반지의 제왕’을 붙일 자격이 없었던 게 아닐까요?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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