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Dec 28. 2016

엔드리스 버킷리스트

위스키를 좋아하시는지? 나는 무척 좋아한다. 애초에 도수 말고 맛에는 별로 민감하지 않아서 딱 40도의 위스키라면 대체로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데, 놀랍게도 위스키가 참으로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제사 지내러 갔다가 큰집에 쌓여 있던 위스키를 두어 잔 마신 게 계기였을 것이다. 아마 임페리얼 어쩌고였던 것 같다. 좋은 술이다. 그런데 지금도 큰집에는 마실 사람 없는 위스키 선물이 한 병 두 병 쌓이고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에게 쌓이는 거라곤 기껏해야 다이어리와 달력 정도니까. 


아무튼 못되게도 그렇게 비싼 술에 맛을 들인 이후로 종종 기회가 될 때마다 위스키를 사서 서랍 속에 쟁여두고 1온스씩 마시곤 한다. 가장 최근에 산 위스키는 7월 26일에 산 조니워커 레드였다. 조니워커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레드라벨이 국내 마트에서도 유통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두어 달에 한 병씩 사도 좋을 이 녀석을 다 마신 것은 8월이나 9월이 아닌 바로 12월인 이번 달이었다. 아껴서 조금씩 마시다가 마지막 한 잔을 남겨두고 "마지막 한 잔은 영광의 순간이 오면 마셔야지"하고 봉인했던 것이다. 미드 "배틀스타 갤럭티카"를 보면 로봇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물자 공급이 끊기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막막한 여행과 치열한 전투를 반복하는 가운데, 술고래인 부함장이 마지막 위스키 한 병에 눈금을 그어가며 술을 아끼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한 잔을 비운 그 날이 영광의 순간이 온 날이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예고되었던 고통을 확인했고, 그리고 살짝 취하고 싶었는데 손 닿는 곳에 있는 술이 그것 뿐이라 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맛은 있었다.


요즘 들어서 그런 일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요리 레시피도 저장하고 멋진 카페도 저장하고 기가 막힌 맛집도 저장하고 여행 정보도 저장하고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영화, 하고 싶은 게임도 저장하면서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당장 이 리스트를 해치워야지' 하고 입맛을 다시는데, 정작 그렇게 리스트를 주루룩 해치울 정도로 여유로운 순간은 도무지 다가오질 않아서 리스트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지는 것이다. 


읽고 싶은 책만 369권, 보고 싶은 영화는 317편.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이 리스트를 열심히 작성하는 한 평생 걸려도 이것들을 모두 해치울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실현 속도보다 욕망이 쌓이는 속도가 빠른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원히 눈이 내리는 나라에서 제설 작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것의 리스트도 만들다 보면 일이 되곤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버킷리스트의 작성 빈도를 크게 낮추고, 정말 까먹었다간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만한 정보만 모아두고, 영화도 책도 일주일에 하나씩 처리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언젠가' 찾아올 거대한 기쁨 따위를 기대하고 살아봤자 딱히 좋을 일도 없다는 걸 2016년이 증명했던 것이다. 기약 없는 행복 따위는 잊어버리고 소박할지언정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편이 훨씬 낫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모이겠지만, 거북이처럼 숨도 안 쉬고 달려서 지쳐버리는 것보다는 토끼처럼 그럭저럭 농땡이치고 사는 편이 정신적으로 유익한 것이다. 토끼가 거북이보다 좀 늦었다고 산 채로 간을 뽑히는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니까. 


물론 마음을 그렇게 고쳐먹었다고 깜짝 놀랄 만큼 생활이 변하고 매일매일이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나도 ‘거북이처럼 도전하고 토끼처럼 즐겨라' 같은 책을 써서 한몫 단단히 잡았겠지. 단순히 미뤄두기를 그만두고 장바구니에서 썩는 물건을 줄였을 뿐이다. 덕분에 더 바빠졌고, 바로 사 버리는 물건도, 못 본 척 하는 물건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보류, 저장 프로세스를 줄이는 것만으로 삶이 좀더 단순해지고 어깨도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게 이렇게 많은데 현실은 이 모양이라니!'하고 쓸데없이 억울해 할 일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전에 없이 새해의 다짐을 적어보자면, '버킷 리스트를 줄일 것'이다. 원하는 게 있고 2주일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바로 달성할 것. 아니면 그냥 별 가망 없다고 간주하고 아예 잊어버릴 것. 적어도 그 욕망을 형체로 남기지 말 것.


그러니 조만간 마트에 찾아가서 조니워커 레드를 또 한 병 사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를 위해 남기는 축배 따위는 필요없다.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것보다는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위스키나 마시는 편이 멋지지 않은가?



-후기


고등학생 때 수학이 약해서 오답노트를 꽤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양이 많아져서 결국은 한 번도 제대로 복습하지 못하고 수능을 쳤죠. 그냥 그 시간에 영화나 보는 건데 말이죠.

작가의 이전글 빅데이터 큐레이션이 뜬금없이 임신 테스트기를 제안해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