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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ug 17. 2016

빅데이터 큐레이션이 뜬금없이 임신 테스트기를 제안해왔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정말 무지막지하게 많은 상품들이 쏟아져나오고, 그중에서 자신에게 정말 쓸모있는 물건을 고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간단한 예로 집안에서 신을 슬리퍼를 사려 들어도 쇼핑몰에서 검색을 시작하면 온갖 상품이 쏟아져나와, 어떤 걸 사는 게 가장 좋을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슬리퍼만 해도 정말 갖가지 형태와 색깔, 그리고 생각도 못했던 부가적 기능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슬리퍼 따위 뭐든 똑같지’ 하고 대충 싼 걸 골랐다간 나처럼 사이즈도 안 맞고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는 물건을 받아 아주 한심한 기분에 시달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도 멀쩡하니 버릴 수도 없고.


아무튼 꼭 좋은 슬리퍼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수많은 상품 중에 나에게 꼭 맞는 걸 큐레이션 해주는 서비스는 꼭 필요하고, 그 중요성은 앞으로 점점 더 주목받을 것이다. 특히 문화 콘텐츠 상품으로 넘어가면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인 만큼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가기 쉬운 작품 중 내 취향에 맞는 걸 골라주는 서비스가 필수적이다. 물론 이건 파는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취향에 따라 적절한 작품을 골라서 추천해주는 서비스가 전혀 없다면 대체 누가 나 같은 무명 작가의 책을 찾아보고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수많은 온라인 서점, 온라인 쇼핑몰이 상품 설명 아래쪽에 그 상품을 산 사람들이 많이 산 상품이나 많이 본 상품, 좋은 평가를 내린 상품 따위를 표시하곤 하며, 아마존에서는 그런 빅데이터 분석이 잘 되고 있는지 아예 고객이 물건을 주문하기도 전에 ‘이 사람이 슬슬 이 물건을 주문하겠자?’ 라고 예상하여 물건을 가까운 센터로 보내 놓는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들었다. 이쯤 되면 좀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내 취향에 대해 아주 잘 알아서 '네가 이 책을 좋아할 것 같더라’하고 선물해주는 연인이 있다면 정말 너무 사랑스럽고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겠지만, 그게 연인이 아니라 무형의 기업이라면 어째 사찰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다. 대단한 기술력이고 앞으로 기업이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덕목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것에는 가급적 사람 냄새를 입혀줬으면 좋겠다. 


이런 '선제 큐레이션'의 무서움에 대해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다. 미국의 한 가정에 출산용품 광고(쿠폰이라고도 한다)가 날아들어 여고생인 딸에게 이런걸 보낼 수 있느냐며 아버지가 격노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딸은 정말 임신 3개월째라 아버지가 매장측에 도리어 사과했다는 이야기다. 아버지도 모르는 딸의 임신 사실을(딸이 말하지 않으면 어느 아버지가 알겠느냐만)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기업이 먼저 알아내어 자동 추천을 했다는 뒷사정이 있었던 것인데, 같은 방식으로 어느 쇼핑몰이 내 취향을 분석해서 카탈로그나 쿠폰을 보낸다고 상상하면 오싹하기 짝이 없다. 솔직히 변변한 물건이 올 거라는 자신이 전혀 없다.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물건의 쿠폰이 날아와 거실에 무릎을 꿇고 온가족에게 추궁당할지도 모른다. 역시 이런 서비스는 사전에 잘 차단해두는 편이 좋겠다. 


그런데 이렇게 호들갑을 떨며 익살스럽게 쓰긴 했지만, 솔직히 나도 처음 이 일화를 들었을 때는 이것 참 재미있는 IT 괴담이로구나, 하고 웃었다.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쇼핑몰은 물론이고 임신도 나랑은 완벽히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어였으니까. 


하지만, 정말 괴담 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나고 말았다.

평소에 C 쇼핑몰을 뒤적이며 이것 참 사고 싶구나 하며 즐겨찾기를 찍어두는, 가난한 자본주의 고양이의 마킹 같은 행위를 즐기곤 하는데, 그러던 어느날 추천 상품으로 “임신 테스트기”가 떠 있는 걸 발견하고 만 것이다!


맹세컨대, 아무리 내가 저렴하고 별 쓸모 없는 물건들을 많이 구경하고 다녔대도 임신 테스트기를 구경하진 않았다. 같이 자는 사람도 서로 깨우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대체 왜 임신 테스트기를 추천받아야 한단 말인가? 설마 내게 아직까지 존재도 모르고 있던 애인이나 여동생이 있고, 그녀가 임신했다는 걸 쇼핑몰이 먼저 빅데이터로 알아낸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아무리 어처구니 없어도 분명 추천 상품으로 임신 테스트기가 뜬 것은 움직이지 않는 사실이고, 나는 그때 즈음 해서 검색했던 상품이 무엇이었나 뒤져본 끝에 쇼핑몰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천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쯤 내가 꽤 진지하게 검색하고 구경했던 상품은 다음과 같다.


반지: 벌써 몇 년째 끼는 반지가 질려 쓸만한 게 없나 찾아보곤 한다. 

가구: 가구를 살 이유도 여유도 전혀 없지만, 그냥 구경하고 싶어서 찾아보곤 한다.

전자담배: 일반 쇼핑몰에서 사진 않지만, 요즘 동향은 어떤가 싶어 가끔 검색할 때가 있다. 


C 쇼핑몰은 아마 이것들을 기반으로 내게 추천 상품을 띄워주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런 생각을 했겠지. 


30대의 남성… 반지를 구경하고 있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애인이 있는 게 틀림없어(여기서 이미 틀렸다)… 이번에는… 가구를 보는군. 그래, 결혼하고 새로 꾸밀 신혼집에 어떤 가구를 놓을지 고민하는 거야(살 일도 없는 놈이 가구를 봐서 죄송합니다)…잠깐, 전자담배를 찾는군. 담배, 담배라…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게 틀림없어… 아니면 연초를 끊어야 할 일이 생긴 건지도… 결혼, 신혼, 그리고 금연이라면…? 그래, 애인의 임신이 걱정되는구나! 임신테스트기! Profit!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일리있는 추리 같기도 하다. 조금만 살을 붙이면 명탐정이 의뢰인의 임신 사실을 유추해 내는 로직으로 써먹어도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과감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먼저 물어보는 게 수순이 아닌지? 왜 내가 추천상품 하나 때문에 오만가지 감정을 느껴야 하느냔 말이다. 발달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고 하지만, 좀 덜 발달된 기술은 마법 같지도 않을 뿐더러 매너도 없는 모양이다. 


한번만 더 내 인생에 이따위 이미지를 멋대로 덧씌우면 널 부숴버리겠어


어쨌든 이번 일로 정말 확실히 느낀 것은, 이런 빅데이터 예측이 보편화될 때까지는 이 기술에 반드시 사람 냄새를 덧씌워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추천 마법사’ 코너에 집사나 비서, 혹은 명탐정 캐릭터를 배정해서 편안하게 말을 걸어오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혹시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하신 건 아닐지 모르겠군요’하고 말을 걸어와도 좀 덜 놀랄 것이고,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질문해서 ‘예전에 반지와 가구, 전자담배를 유심히 보시더군요’ 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콘텐츠로서의 재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나중에야 분석 정확도도 높아지고 그런 식으로 추천 받는 게 익숙해져서 뭐가 나오든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기술의 발달과 그 수용에는 적당한 쿠션이 필요한 법이다. 특히 임신 출산에 관해서는 더 크고 푹신한 쿠션이 필요하겠지.


그건 그렇고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사람 놀라게 만드는 기술이다. 내가 만약 여자고, 추천 상품을 가족이 먼저 봤다면 집안이 아주 뒤집어졌겠지. 역시 기술에는 섬세한 가이드라인이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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