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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pr 19. 2017

패키지 투어는 잔혹한 여행의 여왕 (2)

버스를 탄 자에겐 안식조차 없다

2.버스를 탄 자에겐 안식조차 없다


평생 이렇게 버스를 오래 탄 기간이 없을만큼 버스를 오래 탔는데, 끔찍하게도 버스가 편하지도 않았습니다. 아, 비행기도 마찬가지였군요. 비행기 얘기부터 먼저 하죠. 


아랍 에미리트의 에티하드 항공을 이용하게 됐는데, 일단 USB 충전 포트가 없었습니다. 요즘은 다 구비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던 모양이군요. 덕분에 보조배터리를 활용하면서 불안 속에 작업해야 했죠(그렇습니다. 전 마감을 앞두고 일감을 가져갔습니다). 그건 뭐 그렇다 칩시다. 결정적인 문제는 엉덩이가 아팠다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엉덩이가 아팠던 적이 없어요. 엉덩이가 우그러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파서 결국에는 바람을 넣는 목베개를 깔고 앉았다 두 시간쯤 후에 빼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나무 의자에 앉아도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약간 싸늘하게 식어가는 프리타타와 미지근해서 면이 풀리다 만 닛신 컵라면을 먹으며 일을 하다 보니 이것도 일종의 고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분명 예전에는 '어쩔 수 없이 한 자리에 계속 앉아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즐겁고, 그래서 비행도 즐긴다'는 내용의 수필을 쓴 적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정정합니다. 제가 건방졌습니다. 그건 비행이 서너 시간일 때 얘기고, 하룻밤을 자야 할 정도로 긴 시간 내내 맛없는 식사를 하며 일을 하는 건 도저히 즐길 수 없습니다. 어쩌면 비행을 즐기기엔 제 육체가 너무 늙은 것인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비행을 끝내고 나서 탄 버스는 한층 더 끔찍했습니다. 우등 고속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토록 고통스러울 줄이야. 일단 엉덩이가 아픈 건 말할 것도 없어서 여행 내내 그놈의 베개 쇼를 해야 했습니다. 만약 베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하군요.


사실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 겁니다. 적어도 잠들어버리면 고통은 느끼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놈의 돈이 뭐라고 버스에서도 일은 해야 했습니다. 무릎 위에 가방을 올리고, 그 위에 태블릿을 놓은 채 핸드폰을 두드렸죠. 그러나 당연하게도 일이 잘 되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움직이는 버스라는 열악한 환경인 데다가, 기기의 한계가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소음이었습니다. 패키지 투어는 아는 사람들이 두 명 네 명 뭉쳐서 신청하기 마련이고, 그 사람들이 얘기하기 시작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도 자연히 끼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지쳐서 좀 조용해졌다 싶으면 친절한 가이드가 일어나 목적지에 대해 설명하거나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도난사고 따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그때마다 전 그걸 들을 수도, 듣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관광지에 가면 아는만큼 보이기 마련이라 간단한 설명이라도 들어두는 편이 당연히 좋습니다. 주의사항은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언어적인 일을 한다는 건 한 손으로 세모를 그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것과 비슷한 짓입니다. 그래서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 지친 저는 결국 이어폰으로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좀 낫더군요. 그러나 장시간 버스 여행의 진정한 공포는 고작 소음따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저는 둘째 날 깨닫게 되었습니다.



3.재난은 입으로 들어가 밑으로 나온다


위에도 짧게 적었지만 최대 여섯 시간까지 버스로 이동하는데 화장실은 고작 한 번 들렀다 간다는 걸, 둘째 날까지도 몰랐습니다. 여행 계획표에 당연히 그따위 것은 나와있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때가 되니 그런 흉악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전 솔직히 선진국으로 가서 장시간 버스를 타니 당연히 버스에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세비야 대성당의 성스러운 화장실


전 화장실을 자주 가는 사람입니다. 앉아있는 시간 내내 차를 마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차를 마시지 않을 때라도 여차하면 화장실에 가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방광 자체가 퇴화했는지도 몰라요. 두 시간을 넘어가는 영화를 볼 때 음료를 조금이라도 입에 댔다간 반드시 후반에 화장실에 가야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장시간 버스에 갇히게 되었으니 당연히 불안해서 뭘 입에 댈 수 있을리가 없겠죠. 장시간 이동에서 거의 유일한 낙 중 하나인 군것질을 포기하고 작업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휴게실이나 관광지에 도착했을 때 뭘 시원스럽게 먹을 수도 없습니다. 인체란 '방금 먹었는데 화장실 가서 싸고 왔으니까 괜찮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까요. 그리하여 식사를 하면서도 ‘목이 마르지만 지금 물을 더 마셨다간 이따 제발 버스를 세워달라고 애원해서 벌판으로 뛰어가야 될 거야’ 따위 생각에 뭘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감은 버스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일반적으로 세 시간 정도 500밀리 가량의 소변을 저장하고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방광이 가득찰 때까지 두 번의 요의를 느낀다고 하죠. 처음이 옐로 카드, 두 번째가 레드 카드인 셈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옐로 카드가 신경쓰여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감각은 이상하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이상한 법이니까요. 그때문에 출발 직전에 화장실에 가서 일행을 모두 기다리게 만든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작업에 매달리면 버틸 수 있다는 걸 깨달아 그나마 나았지만, 승객 전원에게 그런 위안거리가 있었던 건 아니었죠.


딱 한 번 긴급한 상황이 닥쳐왔습니다. 출발한지 두 시간이 지났을 때 아주머니 한 분이 다급함을 호소했던 것이죠. 그러나 고속도로 아무데나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괜찮겠느냐는 둥, 심호흡을 하라는 둥 심각한 말들이 오가고, 양수가 터진 임신부를 태운 듯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버스는 20분을 더 달려 예정에 없던 휴게소에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군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고생해서 간 화장실 사정도 그리 시원치는 않았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유럽은 화장실에 대단히 야박해서, 관광지에서 화장실을 쓰려면 어느 가게를 이용하고 그곳 화장실을 빌리거나, 아니면 0.5유로에서 1유로까지 하는 유료 공중화장실을 써야만 했으니까요. 물이 귀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역사적으로 똥오줌을 길바닥에 버리는 게 당연한 시절이 길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공원 화장실에도 ‘화장실 요금 징수원’이 있었습니다. 좌우의 남녀 화장실 가운데에 TV와 의자, 냉장고 싱크대 따위를 놓은 직원 생활공간이 마련된 화장실도 있더군요. 


유럽 서쪽 끝의 유료 화장실에서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중에는 좀 과장해서 지금 관광지 구경을 다니는 것인지 화장실 탐색을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를 정도로 화장실 이용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숙련된 킬러가 어딜 가든 탈출구를 확보해두듯이 어디서든 화장실이 있는 곳을 숙지하고 도착해서 한 번, 출발하기 전 또 한 번 이용하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화장실이 없어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는 일이고, 이건 별 생각 없이 웃어넘길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간의 기본적 생리현상을 신경쓰고 억제하는 게 열흘간이나, 심지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지역에서 계속되면 슬슬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의 문명이 본능적 욕구를 제어하는 방향으로 발달해왔다곤 하지만, 사실 여러 욕구중에서 배설욕구만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법이고 인류는 이를 대비해 곳곳에 화장실을 건설해왔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 화장실이 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죠. 그러니 원할 때 화장실에 가서 배설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아닐까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의 기본권은 어디까지 제한될 수 있을까요? 다 큰 어른이 고작 화장실 때문에 진지하게 불평하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번 여행을 가장 끔찍하게 만든 것 중 하나는 바로 화장실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런 꼴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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