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Apr 12. 2017

패키지 투어는 잔혹한 여행의 여왕 (1)

10박 12일짜리 유럽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듣기에는 썩 멋지긴 합니다만, 실상은 패키지 투어로 어머니를 따라갔다 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네, “패키지 투어” 말이에요. 유럽은 두 번째지만 패키지 투어는 처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아니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물론 패키지 투어 자체를 무가치하고 여행을 즐길 줄 모르는, 형편없는 기형적 행태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이 좀 있었습니다만, 막상 해보니 분명 아주 깔끔하고 편리한 여행법이라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언제 어딜 어떻게 갈 것인지 일정 때문에 고민할 일도 없고, 여럿이 다니니까 안전한데다, 곳곳에서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그야말로 아무 문제 없이 계획표에 있는 여행 전체가 패키지로 수행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책자를 뒤져서 여행 정보를 착착 찾아내고 구글맵을 써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며 영어나 간단한 현지어로 교섭을 할 여유나 능력이 없는 상황이라면 저렴하고 깔끔한 여행으로 선택할만 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완전한 자유여행만 해온 저로서는 당연히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여행에는 자유가 없었으니까요. 여행이란 원래 자유를 느끼러 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 아닌지? 그런 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패키지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순례나 답사에 가까운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어느 여행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돈을 받으면서 해야 할만한 일정을 여행으로 소화하고 있다고요. 정말 여행하는 내내 그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더군요. 


아무튼 이번 여행에서 고통스러웠던 점을 몇 가지 추려보죠.



1.특공대 같은 일정


유럽이면 거의 지구 반대편이죠. 가는데 비행기로 도합 열 세 시간쯤 걸립니다. 전 아랍 에미리트로 가서 환승한 뒤 이탈리아로 갔는데, 대강 여덟 시간에 여섯 시간? 그쯤 걸렸던 것 같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느낀 고통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죠. 아무튼 그런 다음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몸은 찝찝하고 머리는 떡지고 면도도 못한 상태에서 밀라노를 구경했습니다. 정말 그림같이 멋진 도시더군요. 고풍스러운 아케이드는 물론 밀라노 대성당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어요. 그곳을 한 시간 반쯤 구경했습니다.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이틀처럼 느껴지는 시간 내내 비좁은 비행기에 갇혀 있었는데, 거기서 나와서 끝내주게 멋진 도시에 도착해놓고 아주 잠깐 사진 찍는 것 말고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지극히 짧은 자유 시간 중 절반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공중화장실이 없어서 카페에서 영어를 못하는 직원을 상대로 빵을 산 다음 거기서 주는 표를 갖고 건물 최상층에 있는 화장실의 개찰구에 표를 찍고 들어갔다 내려와야 했거든요. 빵 먹을 시간도 없었고, 당연히 밀라노 대성당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했습니다. 한 100미터 밖에서 사진 찍고 버스를 탔죠. 그게 이번 여행에서 만든 밀라노의 추억입니다. 그런 다음에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갔죠. 이탈리아는 안녕입니다. 뭔소린가 싶겠지만 정말이에요. 이탈리아는 더 볼 일이 없었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의 숙소까지 다섯 시간쯤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해 정신없이 씻고 자고 일곱 시에 일어나 식사하고 여덟 시에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두 세 시간 이동해서 다음에 도착한 지역은 두 시간쯤 구경한 것 같군요.


세비야 대성당 안마당에서


여행이 전반적으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일곱 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엉덩이가 부서지도록 버스를 타고 이동한 뒤에 아주 짧은 시간 구경하고, 그리고 이동해서 점심을 먹고, 구경하고, 다시 이동해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하면 씻고 아주 잠깐 숨을 돌린 뒤 자고 또 짐을 챙겨 나가는 겁니다. 무슨 훈련소에 다시 온 줄 알았어요. 평소에 전 여덟 시에서 아홉 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버스는 한 달에 한 번쯤 타죠. 종일 앉아서 일하긴 하지만 한 시간에서 두 시간에 한 번은 일어나 화장실도 가고 담배도 피웁니다. 게다가 하루 대부분을 혼자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열흘간 생활패턴을 그렇게 바꿔야 했던 겁니다. 모든게 거의 정반대였죠.


특공대나 훈련소 같았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게, 가이드들이 친절하고 좋긴 했지만 아무리 친절해봤자 일정이 달라지지도 않고 자유 시간이 늘어나거나 여행 성격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이게 게임 속의 작전 수행이면 어떨지 변환해봤습니다. 


“현지 시각 0700시 기상. 식당에 집결하여 아침 식사를 마친 뒤 0800시에 버스에 탑승하여 다음 작전지 A시까지 이동한다. 이동 시간은 네 시간으로 예상된다. 이동 중 휴게실은 단 한 번 가게 되니 용무를 제때 마칠 수 있게 주의하도록.  A시에는 알다시피 A 대성당이 공사중이다. 귀관들의 임무는 검문을 무사히 통과한 뒤 한 시간 안에 대성당의 각 입구와 실내 곳곳을 촬영하는 것이다. 임무 완수 여부와 관계 없이 한 시간 뒤 재집결하여 다음 작전지로 이동한다. 그리고 작전지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도가 높은 곳이다. 안전과 개인 물품 관리에 유념하도록. 사고가 발생할 경우 영사관은 귀관에 대한 책임을 일체 부정할 것이다.”


과장하긴 했지만 이런 식이었다고 해도 일정 자체는 별로 변할 게 없겠죠. 애초에 고작 열흘 만에 너댓개의 국경을 넘나들게 되어 있었으니 이런 일정이 나올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느긋하게 구경하고 숨돌릴 자유를 넣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꽃할배에도 나왔던 콜럼부스의 관


그동안 했던 여행에서 가장 멋진 순간들이 어떤 것이었나 생각해보면 모두 내가 선택한 순간의 기쁨과 음미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가게에 무턱대고 들어갔는데 아직 개업을 준비중인 가게라 시험삼아 만든 타코야키를 얻어먹었던 것도 멋졌고, 사찰의 정원이 너무 평온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서 쉬었던 것도 좋았죠. 어떤 길이나 건물이 멋져서 서너 번씩 같은 자리를 맴돌 때도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패키지 여행에서는 선택의 자유 자체가 없었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수신기를 끼고 설명을 들어야 하며, 아주 짧은 자유시간에도 사진을 찍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쇼핑을 해야만 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죠. 세비야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였는데, 그때 마침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시작되더군요. 세비야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는 최대인 성당이라 정말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싹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게다가 백발이 성성한 연주자가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까지 시작했다구요. 단 10분만이라도 좋으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그 음악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바쁘기 때문에 “여러분은 운이 참 좋으시군요” 하는 가이드 설명을 줄줄 들으며 성당 안쪽을 관람해야 했던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기분이란,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아귀의 심정이랄까요. 대체 얼마나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기에 사사로운 감정은 끌어들이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추신 1

제가 혼자 여행하고 혼자 써서 혼자 출판한 여행기 "먼 길로 가는 다카야마"가 각종 전자책 서점에서 판매중입니다. 비교적 덜 알려진 관광지, 다카야마의 매력을 느껴보세요!

(리디북스)


*추신 2

제가 번역한 오카다 신이치의 "기묘건물 100LDK"가 카카오페이지로 선출간되었습니다. (https://page.kakao.com/home?seriesId=51554024)가벼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미스터리로 진행되는 듯하지만, 거대 저택과 그곳에 사는 가족들의 이면에 숨겨진 어둠이 차츰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라이트노벨풍의 섹드립과 헛소리와 전문용어, 심지어 중국어까지 튀어나와서 작업에 진땀을 뺐습니다만...... 가벼운 풋워크로 시작해서 늪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러면서도 반전의 쾌감이 있는 작품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일한 문학 번역(특히 중간소설과 미스터리, 로맨스 분야) 의뢰를 계속해서 받고 있으니 문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분야도 물론 괜찮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인쇄소는 찾기 힘들고 선명한 미소녀는 구하기 어렵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