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Mar 22. 2017

좋은인쇄소는 찾기 힘들고 선명한 미소녀는 구하기 어렵다



컬러 인쇄해야 할 문서 13장이 있다. 그것도 미소녀 일러스트가 가득 들어간 문서가. 어떡할 것인가? 아마 이런 상황에 마주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 하지만 나는 취미상 가끔 그런 숭고한-다만 어디다 자랑하기는 힘든- 임무를 띠곤 한다. 그 때문에 예전에는 무한 잉크 공급 장치를 장착한 프린터를 사용했다. 잉크젯 프린터의 카트리지에 호스로 잉크탱크를 연결하여 저렴하게 구입한 벌크 잉크를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개조 장치다. 하지만 그 프린터가 고장난 이후 새로 구입한 프린터는 정품 카트리지만을 사용하는 모델이다. 혁신적인 기술로 잉크 소모량을 절감했다는 말에 혹해서 산 것인데, 정작 몇 번 시험해보니 고화질 인쇄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잉크가 덜 들어가지도 않았다. 컬러로 열 장 스무장 뽑아대면 순식간에 잉크가 반절로 떨어지는 것이다. 저렴하지도 않은 비용으로 깔끔하지도 않은 인쇄물을 얻을 이유가 없다. 프린터 회사에서 하는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어쩔 수 없다. 이제 인쇄소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쇄소가 어디있단 말인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라면 인쇄소따위 골라서 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일반 주택가에서 괜찮은 인쇄소를 찾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아파트 단지마다 하나씩 있어도 좋으련만. 다들 컬러 인쇄를 어디서 하고 있는 걸까?


그리하여 결국 내 행동 반경 안에 있는 사무지구의 대형 사무용품 전문점을 찾아갔다. 컬러 인쇄 350원. 썩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다만 인쇄에 쓸 수 있는 컴퓨터가 단 한 대라서 앞 사람이 다 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는 한참 기다렸다. 그러다 옆을 보니, 다른 사람이 직원에게 직접 메모리를 넘겨줘서 인쇄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쪽이 빠르고 편할 것 같긴 했다. 그러나 미소녀들이 질서정연하게 나열된 표가 들어간 문서를 직원에게 보여주면서 "아, 거기서 거기까진 두 장씩이고, 나머지는 한 장씩이에요."하고 지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못할 것도 없지만, 못할 것도 아니라고 굳이 가시밭길을 갈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다음날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모니터를 보니 청록색 바탕에 해상도가 매우 낮은 바탕화면을 쓰고 있는 컴퓨터는, 놀랍게도 운영체제가 XP였다. 운영체제 자체는 문제될 게 없지만, 낮은 해상도가 컴퓨터의 파멸적인 성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껏해야 800*600 정도가 아닐까? 맙소사, 요즘은 재활용하는 날 길바닥에서 주워온 컴퓨터도 저것보다는 성능이 좋을 것이다. 이 가게는 뭐가 문제란 말인가? 아무튼 그 컴퓨터가 50메가쯤 되는 파일을 멀쩡히 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메모리를 꺼냈으나, 꽂을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가 카운터 뒤쪽 저 밑에 있었다. 인쇄하는 가게에서 메모리를 자율적으로 쓰게 놔두지 않았다. 정말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 낡아빠진 컴퓨터에서 기밀이라도 훔쳐갈까봐? 아니면 바이러스라도 옮을까봐? 아무튼 나는 길게 탄식한 뒤 발을 돌렸다. 


그리하여 다음날,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고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해상도가 낮은 나머지 폰트가 뭉개져 보이는 포털사이트에서 파일을 다운받았다. 그런데 한글 파일에 연결된 프로그램이 아크로뱃 리더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일단 실행해봤다. 파일을 열지 못했다. 잠깐, 그러니까, 인쇄를 하는 가게에서 한글 파일을 열지 못한단 말이지. 나는 이런 황당한 사태를 예견하고 PDF파일을 만들어뒀어야 하는 것이다. 멍청한 나, 한심한 나. 나는 시선을 돌려 옆 자리를 보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직원에게 물어서 그를 부른다면 파일을 복사해서 인쇄를 시도할 수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직원 어디있느냐고 사람을 불러들여서, 파일을 복사시킨 다음 미소녀가 즐비한 파일을 자랑할 기분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쯤 되니 인쇄가 멀쩡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쓸만한 인쇄소를 찾아다니는 내 마음속의 풍경이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가게를 탈출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지도 앱을 켜서 인쇄소로 검색했다. 그리고 뜻밖에 가까운 곳에 인쇄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쇄, 제본등을 전문으로 하는 체인점으로, 24시간 운영하는 데다, 외관이 무척 깔끔하고 모던했다. 이만하면 기대할만했다. 그리하여 약간 쭈뼛거리며 들어가, 인쇄 전용으로 보이는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카운터 너머의 남자 직원이 인쇄할 거냐고 말을 걸어왔다. 검은 뿔테를 쓴, 키 큰 호시노 겐같은 인상이었다. 나는 컬러 인쇄가 되느냐고 물었고, 그는 된다며, 몇 장이냐고 대답했다. 13장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장당 천 원이라고 말했다. 장당 천 원이라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서 되물었지만 역시 장당 천 원이라고 했다. 대체 뭐 얼마나 굉장한 인쇄기술을 쓰기에 한 장에 천 원을 받는단 말인가? 즉석에서 필름을 뽑아서 옵셋 인쇄라도 한단 말인가? 물론 인쇄술이라는 것도 여러가지 옵션이 있으니 그런 가격이 걸맞는 인쇄물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뽑을 이미지는 가로 65밀리에 기껏해야 480 픽셀밖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니 그렇게 엄청난 인쇄술은 필요없다. 그냥 컬러 레이저 프린터로, 백상지에 뽑으면 그만이란 말이다.


옆에 350원짜리 인쇄소가 있는데 뭘 믿고 그렇게 비싸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론 그냥 비싸다는 말만 하고 돌아나왔다. 인쇄하러 들어갔다가 돌아나온 게 대체 몇 번째지? 학교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때는 정말 골라가며 인쇄할 수 있을 정도로 주변에 인쇄소가 넘쳐났던 것이다. 대학교라는 인프라는 상상 이상으로 막대한 힘이 있었다. 


아무튼 막막해졌다. 선택지는 둘이 남았다. 한글 파일을 PDF로 변환해서 다시 그 사무용품점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면 그냥 돌아가서 당당하게 직원을 불러 뽑아달라고 하는 것. 어느쪽도 절대 불가능한 짓은 아니었다. 직원에게 파일을 보여주는 것도 잘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니긴 했다. 직원 쪽에선 그냥 일거리에 불과하고, 내가 골라놓은 이미지들도 수위는 전연령에서 넘어가지 않으니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시 그 재개발 현장에서 출토된 듯한 컴퓨터를 생각하면 도무지 가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 컴퓨터만 아니었더라도 벌써 인쇄를 하고도 남았으리라.


고민 끝에 나는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은 내가 다니는 도서관의 자율 프린터였다. 장당 500원. 가격은 그리 싸지 않다. 350원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비싸게까지 느껴진다. 350원으로 13장이면 4550원. 그러나 500원으로 13장이면 6500원. 무려 1950원 차이다. 역시 파일을 변환해서 다시 찾아가볼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자신이 참으로 비참하고 궁상스러운 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0원도 안 되는 돈이 대체 뭐가 그렇게 아깝다고 이 고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저저번주에는 분명 디즈니 캐릭터 가챠에 3000원을 써서 두 팔이 잘린 듯한 우디 피규어를 뽑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나는 고작 장당 150원 더 쓰는 게 무서워서, 고색창연한 컴퓨터 환경에 맞추기 위해 파일을 변환하고 이메일로 보내고 그것을 다시 일회용 로그인을 통해 다운받고 인쇄 버튼을 누르는 게 어떨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2000원은 가까운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하는 대가로 요구할 경우 빵이나 사 먹으라고 그냥 줄 수도 있는 돈이었다. 사생활 보장 비용으로 추가될 경우에도 낼 수 있는 돈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동시에 사생활을 보장받는다는 생각으로 도서관의 자율 프린터를 사용했고, 당장 내다버려도 아깝지 않은 컴퓨터와 싸울 필요도 없이, 남의 눈길을 신경쓸 필요도 없이 간편하게 인쇄를 마칠 수 있었다. 애초에 이럴 작정을 했더라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었으리라. 궁상이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아주 사소한 뭔가를 아낀다고 온갖 고민을 하고 난리를 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다. 50만원짜리 핸드폰을 살까 60만원짜리 핸드폰을 살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5000원짜리 짜장면을 먹을까, 5500원짜리 짜장밥을 먹을까 고민하는 식이다. 자신의 편안함에 더 높은 가치를 매기면 고민할 일도 줄어들 텐데, 도무지 그걸 못 하는 것이다. 이건 아무래도 돈 문제 이전에 뼈에 스민 사고 방식에서 오는 라이프 스타일인 것 같다.


이렇게 바보같이 살아선 안 된다. 좀 더 대담하고 편하게 살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막 인쇄해서 온기가 남아있는 신데렐라 걸즈 이미지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관에서 팝콘 먹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