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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25. 2017

영화관에서 팝콘 먹기

영화를 보면서 느긋하게 음식을 먹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드물다. 영화를 보고 듣는 눈과 귀도 즐겁고, 음식을 먹는 입도 즐겁고, 맛있는 냄새를 맡는 코도 즐겁다. 직접 손을 써서 먹는 음식이라면 손도 즐거우니 그야말로 오감이 모두 즐거운 셈이다.


꼭 그런 것을 의식하기 때문은 아니지만, 아무튼 영화를 보면서 먹는 음식으로는 치킨이나 스파게티처럼 끼니를 대신할 수 있는 것보다는 도구 없이 맨손으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스낵 종류가 적당하다. 묵직하고 배가 금방 차는 음식은 두 시간동안 줄기차게 먹기가 힘들고, 도구를 쓰거나 눈으로 자꾸 확인해야 하는 음식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할 수 없어서 적당하지 않다. 요는 영화를 보면서 생선을 발라먹긴 좀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팝콘은 그야말로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 아닌가 싶다. 눈으로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이 맨손으로 마구 퍼먹을 수 있으며, 그렇게 걸신들린 듯이 마구 입에 쑤셔넣어도 팝콘의 대부분은 공기라 배가 부르지 않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짭짤해서 계속 구미가 당긴다. 


이토록 멋진 음식을 누가 만들어냈을까?(다음 둘 중 하나는 거짓이다)

유력한 설 중 하나는 16세기 프랑스에서 파브 백작 2세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파브 1세가 일찍 병사하고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백작위에 올라야 했던 파브 2세는 무척 온화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남자였는데, 그중에서도 연극을 특히 좋아하여 무대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장시간 무대 앞을 지키자니 뭔가 먹고 싶을 때가 많았고, 결국 다른 관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음식이 뭐가 없을까 직접 여러 재료를 써서 궁리하던 중 우연히 가열되어 퍽 터진 옥수수를 먹어보고 반해서 거기에 조미를 하여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브의 옥수수'라는 단어가 변화하여 오늘날 팝콘이 되고, 영화관에서 즐기는 음식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파브 2세는 팝콘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가들을 아무 대가 없이 후원하고 추운 겨울에는 별채를 빌려주기까지 해서 예술의 성장을 이끈 것으로 소소하게 알려져 있는데, 이름 없는 챔발로 연주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행복하게 살다, 별채에서 시작된 원인 불명의 화재로 인해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를 기리는 동상과 팝콘 자동 판매기가 파리의 빅토르 위고 저택 근처에 있다니 기회가 되면 꼭 가보시길.


두 번째 설은 믿기 어렵지만 팝콘이 존재했던 것은 아주 먼 옛날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즐겼을 거라는 설이다. 뉴멕시코 주에서 기원전 3600년 경의 유적에서도 팝콘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니 정말 까마득한 전통을 가진 음식이다. 아무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전파하여 미국에서 줄곧 명맥을 이어온 팝콘은 19세기 후반부터 과자로 애용되었는데, 그러다 대공황이 닥쳤음에도 값이 별로 뛰지 않아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먹을 때 별 소리가 나지 않아서 영화관 측에서도 환영했고, 그리하여 저렴한 값에 사서 영화를 보며 먹는 음식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팝콘과 영화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나처럼 소심한 짠돌이는 떼고 산다


아무튼 팝콘이 뭔가를 조용히 감상하는데 적합한 음식으로 각광받은 것은 분명한데, 사실 나는 여기에 100퍼센트 동의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팝콘이 부드러운 음식이긴 하지만 이것을 먹는 맛의 상당 부분은 중앙부의 딱딱한 부분을 아작아작 씹어먹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나는 정작 영화관에 가서는 팝콘 먹기를 꺼리는 편이다. 쿠폰이 생기거나 옆 사람이 먹으라고 내밀면 잘 먹긴 하지만, 아무래도 팝콘을 씹을 때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가 거슬리는 것이다. 밴드가 신명나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악당의 기지를 신나게 폭파할 때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래도 먹기가 애매하다. 게다가 팝콘을 먹을 때 나는 소리가 꼭 내 머릿속에만 울릴 거라는 보장도 없어서 더욱 조심스럽다. 실제로 바로 옆 사람이 팝콘을 신나게 먹고 있으면 그 소리가 나긴 나는 것이다. 긴장감이 중요한 공포영화를 보는데 이런 소리가 들리면 여간 밉살스럽지 않다.


그래서 팝콘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광고 시간에 팝콘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사람도 있는데, 호쾌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서야 영화를 보며 팝콘을 먹는다는 의미 자체가 퇴색하는 것 같다. 중요한 부분에서는 팝콘을 녹여 먹는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무척 매너있는 방법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팝콘을 그런 식으로 먹고 싶지 않다. 바삭바삭하게 만든 음식을 일부러 촉촉하게 만들어 먹고 싶지는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대공황에도 값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무색하게도 요즘 팝콘 세트 가격이라는 것은 여차하면 영화표 자체의 값에 맞먹을 정도로 비싸서, 나같은 짠돌이는 도통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양한 맛이 썩 좋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폭리와 담합 의혹으로 고발당할 정도라면 좀 심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팝콘을 먹게 되면 거의 반드시 곁들여 먹게 되는 탄산음료 역시 나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평소에 차를 입에 달고 사는 터라 화장실에 자주 가는데, 그 탓인지 두 시간을 넘어가는 영화를 보면서 음료수까지 마시면 반드시 중간에 화장실을 가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 말고 화장실에 간다는 건 자기 자신도 번거로운 짓이지만 남에게도 이만저만 민폐가 아니라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이런 이유들이 맞물려 최근에는 영화를 볼 때 두 시간 넘게 껌 하나만 씹고 마는데, 감상에 방해되지도 않고, 남에게 피해주지도 않으면서 입을 즐겁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합리적인 것 같다. 게다가 저렴하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요즘 영화관에서 점점 메뉴를 늘리고 있던데 영화 감상용 껌을 파는 것은 어떤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랬다간 영화관 곳곳에 껌딱지가 마구 붙을 것 같아서 안 되겠다.


각설하고, 영화를 보며 음식을 먹는다는 건 참으로 호사스럽고 멋진 일이지만, 수십 수백명이 들어찬 공간에서 하기에는 좀 맞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팝콘 정도야 관객들 사이에 ‘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겠지’ 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셈이지만,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점점 더 다양한 상품을 팔아보려는 시도를 벌이고 있어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팔면 무조건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하나? 버터구이 오징어의 냄새도 합의가 이루어진 것인가? 만약 영화관에서 팟타이나 똠얌꿍, 치킨스테이크 정식을 판다고 해도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논의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고, 영화관에서도 전혀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 영화표 자체의 매출보다 부가 수익이 훨씬 높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아무거나 팔아치우는데 관객은 남의 매너만을 믿고 들어가서 버텨야 한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계속 음식 종류를 늘리고 싶은 거라면 아예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는 상영관을 따로 운영하든지, 아니면 구르메 상영관 같은 걸 만들어 극장에서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한 것들을 팔았으면 좋겠다. 이대로 값비싼 음식을 팔아치우면서도 상영관 안에서 일어나는 불편은 관객에게 맡기는 행태는, 팝콘이 영화관에서 각광받은 이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심지어 예술을 사랑한 파브 백작의 박애 정신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라고 쓰고 싶지만, 물론 파브 백작 이야기는 내가 생각나는 대로 꾸며낸 것이다. 누군가를 기리는 팝콘 자판기가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빅토르 위고 저택 주변에는 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팝콘이 반 만년 넘는 역사를 거치며 전해내려온 아메리카 대륙 전통 음식이라면... 백인들이 약탈한 자리에서 만들어낸 문화의 극치를 감상할 때 팝콘을 즐기는 기분이 좀 숙연해질 것 같군요.




후기


운 좋게 호사스러운 시사회에 당첨되어 드넓은 자리에 앉아 와인과 칵테일을 마시며 씬시티 2를 감상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술을 파는 건 그리 달갑지 않지만, 별 문제는 없더군요. 관객들이 그 영화를 정말 보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인지……. 아무튼 상영관 관리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보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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