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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21. 2016

호박죽 집단 거부운동과 잔반 없는 급식의 지옥

어릴때부터 입이 짧아서 고생이 많았다. 편식이 심한 편이었다. 풀과 생선은 대체로 싫어했고, 싫어하는 것은 먹지 않으려 했다.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성격은 어릴 때부터 전혀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뭔가 싫어할 만한 계기가 있었나 생각해봐도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던 것, 그리고 미역을 먹다 토한 것을 빼면 별 계기가 없는 걸로 봐서 식성은 대체로 타고나는 듯하다. 


그런데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도시락이라면 사정이 좀 낫지만 급식은 병원도 아니고 학생 한 명의 사정따위 봐줄 리가 없으니까. 당연히 스트레스가 심했다. 먹기 싫은 것은 많았는데 먹기 싫다고 떼를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급식이 시작된 후로는 먹기 싫은 게 나오면 꾸역꾸역 먹느라 애들 다 놀러 나간 뒤에도 교실에 남아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음식을 입에 쑤셔넣을 때가 많았다. 심하면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날 때까지 식판을 놓고 밥을 우물거릴 때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되새김질 하냐?’라고 황당해하곤 했는데, 나라고 싫은 음식을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목으로 넘어가질 않는데 어쩌라고. 아무튼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고도 용케 왕따를 당하지 않았구나 싶기도 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친구에게 돈을 주고 잔반 처리를 청탁하거나 잔반을 우유팩에 넣어서 버리거나 입에 몰아넣고 화장실에서 뱉는 등 꾀를 낸 덕분인지도 모르고.


검색끝에 일본 급식 사진을 구했습니다. 이렇게만 나왔다면 저도 고생은 덜 했겠네요.


그러고보니 유아원에 다닐 때도 급식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 날은 전에 없이 호박죽이 나왔는데, 너무나도 맛이 없고 불쾌하기까지 해서 나를 비롯해 해바라기반의 많은 아이들이 고역스럽게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버려도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정말 그랬는지, 아니면 나의 기억이 만들어낸 거짓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는 쾌재를 부르며 호박죽을 내다버렸고, 놀라워하는 아이들에게도 버려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호박죽이 폐기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앉혀놓고 화를 내며 유언비어의 최초 유포자를 색출했다. 그래서 색출된 게 나였는데, 평소에 말을 잘 들어선지 별다른 처분은 없었다. 다시는 급식을 버리지 말라는 훈계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신나는 일이었다. 내친 김에 해바라기반 반 호박죽 결사를 조직해서 먹기 싫은 음식을 먹지 않을 권리를 요구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급식 때문에 딱히 고생을 한 적도 없고, 먹기 싫은 반찬 때문에 지독한 꼴을 당한 적도 없다. 일단 잔반을 남기면 안 된다는 미친 독재국가 같은 규정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급식실로 가서 같이 먹고 같이 나가 노는 게 일상이었으므로 먼저 먹어봤자 딱히 좋을 것도 없는 친구들이 남는 반찬 먹어 주는 데 대단히 협조적이었고, 무엇보다 먹기 싫은 반찬이 제법 줄기도 했다. 식성이 천성이긴 하지만 나이 들면서 식성이 조금씩 변하는 것도 사실인지, 그때부터는 생선이 나와도 그럭저럭 발라 먹었고, 나물도 적당히 손은 댔으며, 미역조차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 요즘 들어서는 식당에서 시켜 나온 음식은 가지만 아니라면 대체로 손은 댄다. 얼마 전에는 엠티에 갔다가 아침으로 '미역국과 밥’이라는, 단출하고 건강하지만 예전의 나였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식단도 맛나게 잘 먹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인데, 역시 아동들에게 먹기 싫은 반찬을 억지로 먹어서 ‘치우라는’ 명령은 일종의 학대가 아닐까? 내가 아는 한 아이들은 매콤하고 달콤하고 바삭하고 양념이 맛난 고기류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고, 시큼하고 물컹하고 숙성된 나물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것들 중에서도 선천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싫어하는 것 한두 가지는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시 맛보며 ‘다시 먹어보니 그리 나쁘진 않네’ 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럽다. 싫어하던 식재료인데 다른 방법으로 조리한 것을 먹어보니 맛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상당한 수준의 가지 혐오자였는데 그것은 물컹한 가지나물만을 먹어봤기 때문이었고, 가지 구이를 먹어보니 너무나 맛있어서 가지 자체가 맛이 없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시금치도 ‘이따위 음식을 먹고 힘이 세지는 캐릭터가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신기하게도 남의 집에서 먹어보니 나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타협할 수 있는 음식은 천천히 먹으면 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음식은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물 두어 종류를 먹지 않는다고 당장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성인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가지처럼 다른 방법으로 섭취할 수도 있다.


오히려 영양을 고려하고 버릇을 고쳐놓는다고 먹기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쪽이 장기적으로 그 음식을 먹지 않게 만들 확률이 높지 않을까?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 좋아하는 음식보다 자신에게 해가 되었던 음식을 철저히 기억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생각해보면 어릴 때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나중에 받아들이게 되기까지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적어도 억지로 쑤셔넣는 것보다는 한 입 먹고 먹지 않는 편이 근시일 내에 다시 먹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왜 아동들에게 음식을 먹어치우게 만드는 것일까? 일단 당연하게도 균형잡힌 식사를 시키려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건 좋은 일이다. 어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하니까. 하지만 지독하게 먹기 싫어하는 음식까지 악착같이 모조리 먹게 만들고 선호도가 높은 요리로 대안을 만들지는 않는다면 그것은 예산과 잔반처리 비용 등 ‘어른의 사정’을 핑계로 한 학대다. 친구 중에 오이를 먹으면 반드시 토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군대에 있을 때 상관이 왜 오이를 먹지 않느냐며 먹을 것을 강요해서 먹고 토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단다. 무척 가혹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어릴 때 경험한 일과 그리 다르지도 않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모두가 같은 음식을 같은 시간에 모두 먹어치우는 급식 문화란 집단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개인의 의지는 무시하는 병영 문화의 일종이라는 것이 내 생각인데, 지금 기억을 더듬어보니 훈련소에 있을 때도 정말 먹기 싫은 음식은 버렸던 것 같다. 초등학교가 군대보다 심했다는 소리다.


정말이지 잔반 없는 급식의 끔찍한 시간을 잘도 버텼군. 그런 시간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그 시간을 버티며 성장해서 그럭저럭 이것저것 먹게 된 나를 위해 건배를 하는 한편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먹기 싫은 음식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묵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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