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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14. 2016

좋은 반지는 얻기도 끼기도 힘들다

남녀가 보유한 반지의 평균 개수가 몇 개쯤 되는지 통계 같은 게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는 모양이니 대강 추측해볼 수밖에 없다. 돌반지를 빼면 남자가 0.2개, 여자가 3.5개 정도 아닐까? 여자는 친구들끼리 우정 반지를 맞추기도 하고 아이돌 팬끼리 기념 반지를 맞추기도 하고 그냥 자신이 갖고 싶어서 반지를 사기도 하는 반면, 남자들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라면 대체로 반지에 별 관심도 없을 뿐더러 귀하고 멋진 반지를 선물받든 커플링을 맞추든 그다지 끼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반지를 몸살나게 좋아하는 남자하면 떠오르는 것은 기껏해야 반지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보로미르와 골룸, 그리고 적들을 마구 쏴죽여대면서도 ‘럭키 링’이라고 껄껄대며 좋아하던 “익스펜더블”의 실베스타 스탤론 정도다.


따지고 보면 신체에 금속 고리를 끼우고 생활한다는 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이해할만도 하다. 인간이 아마 손을 잘 쓰지 못하는 동물이었다면 간지러워서 반지를 낀 손가락을 연신 핥아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어찌된 일인지 반지를 제법 좋아해서 세 개나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가 일반 스테인레스 반지, 두 번째가 은반지, 세 번째가 서지컬 스틸 반지다. 


첫 번째 반지는 선물 받은 것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선물받았다기보다는 강탈했다는 게 더 맞겠다. 당시 반지의 제왕이나 니벨룽겐의 반지를 테마로 한 카드 게임을 만들고 있던 나는 소품이 필요했고, 많은 액세서리를 보유한 후배에게서 하나를 빌렸다가 아예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로 게임 개발은 지지부진하다 결국 중단되었고(역시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결국은 반지만 덩그러니 남았다. 문양을 굽혀놓은 것 같아 악의 소굴에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악당이 끼면 어울릴 법하지만, 아무래도 끼고 다니기에는 마감이 좋지 않아서 이 반지는 서랍 속에 봉인되었다. 대악당이 되면 다시 꺼내보지 않을까?


두 번째 반지는 내 돈을 주고 산 물건이다. 선물을 사려고 쇼핑몰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각인을 해주는 저렴한 반지를 발견해서 원래 사려던 선물보다 더 비싼 돈을 주고 사고 만 것이다. 전부터 반지를 하나쯤 맞추고 싶긴 했는데 내가 사지 않으면 아무도 사줄 일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산 반지는 원통을 잘라 만든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4밀리 정도의 고리로, 각인은 뭘로 할까 고민하다 솔로몬의 옛 이야기를 따랐다. "기쁠 때 보면 자제하게 되고 슬플 때 보면 위안이 되는 경구를 생각해주게"라는 왕의 터무니없는 명령을 듣고 솔로몬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카피를 떠올렸다는 그 이야기다. 이에 따라 나도 "This too shall pass"라고 주문해서 그 뒤로 집을 나설 때마다 끼고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에 처참할 정도로 되는 일이 없었던 나는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위안 삼을 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반지가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었는가 하면, 처음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두어 달 지나면서 반지를 끼는 게 일상이 되자 아침에 낄 때 한 번밖에 보지 않게 되었고, 그 뒤로 경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되었다. 아니, 도리어 원망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반지를 맞추고 몇 년동안 나를 둘러싼 상황은 한없이 나빠지기만 했고, 그 사이사이에 있던 즐거움은 찰나의 순간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래서 그런 끔찍한 꼴을 실감할 때마다 나는 솔로몬을 원망하곤 했던 것이다. 차라리 "I Seoul U"라고 새기는 게 나았던 게 아닐까?


아무튼 세 번째 반지는 또 쇼핑몰을 뒤적이다가 충동적으로 주문한 것인데, 은색 바탕 가운데 검은색 라인이 들어간 디자인으로, 재질은 서지컬 스틸이다. ‘서지컬 스틸’이란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의료용 스테인레스 스틸을 썼다는 말인데, 단어를 퍽 잘 만들었다. 공업쪽에서 부르는 SS316이라고 불렀으면 영 흥미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서지컬 스틸"이라고 하니 마치 "매지컬 스틸"처럼 신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다. 어쨌든 이 물건은 검지에 맞춰서 주문했는데, 막상 끼고 보니 나에게 맞지 않을 정도로 외형적으로 화려했다. 모양 자체는 수수한데 엄지에 반지를 낀 것 자체가 락 밴드나 마술사처럼 강한 비주얼을 내세우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엄지에 큼지막한 금속 고리를 끼고 있자니 손을 쓸 때 상당히 걸리적거렸다. 역시 반지를 끼기 좋은 손가락은 약지와 새끼 손가락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친구의 커플링과 디자인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는 적당히 케이스에 쑤셔넣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솔로몬의 경구가 새겨진 은반지를 끼고 사는 생활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다. 손이 심심할 때 만지작거릴 수도 있고, 손가락을 뜯어먹지 않게 엄지에 잠깐 방어용으로 끼워둘 수도 있다. 사이즈가 약간 남아서 손가락을 붙이면 살짝 옆으로 눕기 때문에 악수하다 반지가 다른 손가락을 찍어눌러 비명을 지를 일도 없다. 


다만 사소하게 불편한 점을 찾자면, 일단 비누를 만지면 비누가 반지 사이에 낀다는 것. 이 때문에 고체 비누를 만질 때는 반드시 왼손을 쓰고 있다. 그리고 반지 없이 집을 나서면 속옷을 안 입기라도 한 것처럼 허전하고 불안하다는 것. 절대반지를 운반하는 프로도처럼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게 습관이라 반지를 끼지 않고 집을 나서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눈치채기 마련이지만, 어쩌다 깜빡했을 때는 역 앞까지 갔다가도 집까지 반지를 가지러 돌아온다. 반지 없이 집 밖에서 하루를 보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반지가 없다고 일상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기분이 그렇다. 사람의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집에서는 반지를 끼고 있으면 영 집에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집에 오면 일단 외투를 벗고 반지와 시계를 빼서 '네르프' 문양의 패드 위에 놓인 '이카리 겐도'의 머리에 씌워 놓는다. 어쩌다가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면 집에서도 반지를 다시 끼곤 하지만, 금방 이건 불편하다 싶어 빼 놓는다. 밖에서 잘 때도 가급적이면 빼서 안전한 곳에 놓는다. 슬슬 반지를 끼는 걸 나는 일종의 '전투 태세'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제멋대로지만 습관이 이러니 어쩌 수 없지.


그건 그렇고 흥미롭게도 남자가 반지를 끼고 다니면 반드시 듣는 소리가 있다. 누구나 짐작할법 하지만, "그거 커플링이에요?" 아니면 "여자친구 있으신가 봐요"다. 반지를 왼손에 끼고 있으면 당연히 커플링일거라고 생각하겠는데 오른손에 끼고 있으니 확인이 필요한 모양이다. 남자가 폼으로 반지를 끼고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가벼운 짜증을 느끼는 것도 이미 한참 예전의 일이 되어서 이제는 어디 나가면 또 누가 물어보려나 맞춰보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인식 개선이 있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아무 계기도 없이 남자가 반지끼고 있는 걸 신기해하지 않는 사회가 이룩될 리는 없으니, '캡틴 플래닛'처럼 반지를 다루는 콘텐츠가 엄청난 인기를 얻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길게 푸념하든지.


당연하지만 이런 분은 커플링이냐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어쩌면 반지의 디자인 문제일지도.


어쨌든 이런 묘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반지 공방'에 가는 것이다. 최근에 도서관 앞의 작은 카페에서 문화 교실 비슷한 것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중에는 반지 제작도 있었다. 내가 낄 반지를 내 손으로 만들다니, 만드는 것도 반지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막상 홀로 찾아가면 어떤 대화가 시작될지는 뻔한 일이다. 

"아, 혼자 오셨어요?"

"네, 혼자 왔습니다."

"아...... 선물 하시려구요?"

"아니오, 제가 낄 겁니다."

......그 뒤에 이어질 시선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판타지 세계의 드워프라면 뭐 반지를 만들어보고 싶겠거니 하고 이해하겠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으니. 그렇다고 뜻이 맞는 친구와 함께 가기도 마땅치 않다. 친구가 남자든 여자든 둘이 나타나면 오해할 것은 뻔한 일 아닌가?

그래서 고민한 끝에 "우리 가문에서는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자신의 반지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생각해봤지만 이게 통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마음에 드는 반지를 얻는 것도 힘들지만 끼는 것도 쉽지는 않다.



후기


어제는 우연히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절대반지를 싸게 판다는 소식을 접해서 3달러도 안 되는 값에 두 개를 주문했습니다. 반지의 제왕이 개봉하던 시절에는 롯데리아에서 주는 절대반지를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하지만 그 세트를 먹진 않았죠),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거의 껌값에 구할 수 있군요. 이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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