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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n 14. 2017

다이어트의 자격


최근에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보건지소에 가서 인바디 측정을 했다. 길만 두 번 건너면 큰 보건소가 있긴 한데, 그곳은 다른 구라서 깊은 골목길 안에 있는 우리 구 보건지소로 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새로 지은 보건지소가 썩 깔끔하고 예뻤다는 사실이다. 뭐랄까, 소자고령화와 이촌향도로 노인들만 남은 일본의 촌동네에 새로 생겨 마을 사람들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는 뉴스에 나올 것만 같은 건물로, 그리 크진 않지만 건물 안의 통로를 한 공간처럼 쭉 잘 보이게 빼놔서 넓어보이고, 목조 내장재를 잘 써서 부자 호빗의 집처럼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인테리어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안에 들어가서 바로 접수하고 직원 안내를 받아 2층의 검사실로 올라갔는데, 상담을 해주는 담당자가 두 곳을 격월로 옮겨다녀서 이번 달에는 안 계신다고 했다. 격월로 담당자를 기다려야 하다니, 정말 서울 같지 않은 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전극이 달린 기계에 맨발로 올라가 전극이 달린 손잡이를 잡고 측정을 시작했다. 마치 전기를 이용한 처형도구나 인간 개조 기계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으아아아, 아이캔두디스!!"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썩 재밌었겠지만, 물론 그러진 못했다. 그러나 한없이 치솟는 체지방량 게이지를 보고 있자니 장난이 아니라 정말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듣기로는 이게 이 모양이면 정상 범위라는 것 같아요" 하는 식의 직원 설명을 듣고 나와서 건강의 성적표를 천천히 살펴봤다. 나도 수치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구체적인 수치를 말하지는 않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거의 다 표준이고 체지방량만 과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내장지방은 아니지만 '고도비만' 그룹이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적게 먹고 운동도 하며 신경을 쓴 줄 알았는데 형편없는 점수였다. 97점 나왔을 줄 알았는데 79점이었던 수능 수리 점수를 봤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가장 안정적인 날만 운동하고, 영 신통치 않은 날엔 대체로 술을 마셔댔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체중을 재지 말고 줄자를 쓰라는 말이 있는데 고통의 수치가 하나 더 늘어날 것 같아 줄자는 사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그 성적 자체가 아니었다. 여기서 더 노력할 자신이 도통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젊고, 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던 시절이었다면 까짓거 운동 좀 하면 되지, 하고 매일 운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 성과도 금방 올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그만한 에너지가 없다. 의욕도 없고 시간도 없고 수단도 없고 총체적으로 난국이다. 


당장 떠오른 것은 물론 먹는 것을 줄이는 것이었으나, 이미 세끼 다 상식적으로 챙겨먹고 있지 않아 한계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섭취 칼로리를 더 떨어뜨리면 생산성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명백히 삶의 의욕도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육체적인 이유도 있었다. 기초대사량이 평균치 중에선 꽤 낮은 편이었다. 인간은 덜 먹을 수록 기초대사량이 점점 낮아지고 이것은 다이어트를 끝냈다고 평소대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덜 먹는 다이어트를 할수록 더욱 살이 찌기 쉬운 체질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섭취 칼로리를 떨어뜨리는 다이어트를 할 거면 평생 그렇게 먹으라는 말인데, 나는 여기서 더 내려가진 못하겠다.


검색만 하면 쏟아지는 건강한 식사를 누가 몰라서 안 먹나


그래서 먹는 걸 줄이는 건 포기했다. 그럼 당연히 운동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운동하면 지방이 연소되고 기초 대사량이 늘어나니까 상식적으로 가장 현명한 결정이다. 다만 운동에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다. 당장 직접적으로 돈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결정적으로 시간이라는 가장 귀중한 자원이 들어간다. 게다가 매일 운동을 시작할 정신적 에너지, 그리고 그 운동을 필요한 만큼 유지할 육체적인 에너지가 요구된다. 아무래도 내게는 뭐 하나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이를 어쩌란 말인가? 매일매일 죽겠다는 생각을 하며 귀가해서 늘어지는 사람이 어떻게 카드 광고처럼 열심히 운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출퇴근을 하면서도 운동따위 따로 하지 않아도 건강하고 힘이 넘쳐나던 시절을 떠올렸다.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다. 그때는 자전거로 출퇴근해서 하루에 한 시간 넘게 상당한 수준의 운동을 했으니까 시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럼 그때처럼 나도 자전거를 타고 다녀볼까?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그것도 상책은 아니었다. 일단 한밤중 라이딩이라는 건 상당히 위험천만한 짓이다. 구청에 자전거로 출퇴근할 수 있었던 것은 가는 길이 거의 다 인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하철 이동 시간을 갉아먹으면 그만큼 독서 시간도 줄어들게 된다. 또 무엇보다 요즘 대기질이 엉망이다. 살 빼다 폐가 먼저 망가지겠다.


이렇게 저렇게 핑계거리를 찾다 보니 문득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아니, 입을 옷도 있고 그렇게 심하게 쪄 보이는 것도 아닐 뿐더러 비만으로 인한 질병이 없으며 내 몸매에 사실상 큰 불만도 없고 누구 잘 보일 사람도 하나 없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서러울 정도로 고생해서 살을 빼야 한단 말인가? 현대 사회의 실상과 맞지 않는 비정상적 지표와 외모 지상주의가 나를 두 번 울리고 있다! 나는 건강하고 내 몸을 사랑한다!


……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어봤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 몸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는 않는다. 미운정이 들었을 뿐이지. 그리고 불안에 떨지 않으며 술을 마시려면 최소한 현상유지는 해야 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평소에 하던 운동 강도를 훨씬 높이기로 했다. 비참해질 정도로 노력하진 않기로 했다. 요즘 들어서 더 낫게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다음달에 전국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니 지속발전 가능한 운동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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