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밖의 강의실에서
수년째 서는 강의실은 두 벽면이 스크린이다. 한쪽은 프로젝터 스크린, 맞은편은 LED 대형 화면. 실내등을 끄지 않아도 화면이 선명하다. 스크린은 더 이상 어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AI 콘텐츠 리터러시. 내 강좌의 이름이다. AI 도구 사용법을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다. AI가 만들어낸 것 앞에서 스스로 질문을 이어가는 일—그쪽에 가까운 수업이다.
2026년 봄, 어느 날은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꺼냈다. 스크린 대신 창 앞에서 수업을 하고 싶었다. 백주년기념관—1988년에 지어진 학교 박물관이다. 이 건물 안에 큰 창이 하나 있다.
수업 시작 전이었다. 먼저 온 학생들이 창 앞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빛은 고르게 밝았다. 흐린 날의 빛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다. 교정에는 벚꽃이 피고 있었고, 목련은 꽃잎이 무거워 보였고, 개나리가 담장 아래서 노란 선을 긋고 있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그 풍경을 찍고 싶었다.
노출을 낮추자 학생들이 실루엣이 됐다. 학생들의 윤곽만 남고, 창 밖 풍경이 또렷해졌다. 창 너머 한옥 건물—제중원. 1885년, 이 학교가 출발한 자리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기와지붕 뒤로 유리 외벽의 건물이 솟아 있다. 세브란스 병원. 제중원에서 시작된 병원이 140년 뒤 유리 건물이 되어 바로 뒤에 서 있다. 한옥의 처마선과 유리 커튼월이 한 프레임 안에 겹쳐 있었다.
노출을 올리자 학생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 안에 작은 화면.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학생이 같은 자세였다. 수업 전이니 당연하다. 기다리는 동안 사람은 화면을 본다. 나도 그렇다.
노출을 더 올렸다. 한참 더 올렸다. 빛이 모든 것을 삼켰다. 제중원도, 세브란스도, 벚꽃 가지도, 창틀도, 학생들의 얼굴도 사라졌다. 소파의 윤곽과 나무 바닥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흰 빛이었다. 같은 자리, 같은 순간인데, 노출 하나로 보이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다.
몇 장을 연달아 찍었다. 같은 창, 같은 학생들, 같은 흐린 하늘. 다른 것은 내가 고른 노출뿐이었다.
수업 전의 풍경이었을 뿐이다. 누구 하나 특별한 것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제중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조선 사람들은 서양 의사의 손을 낯설어했다고 한다. 사람의 몸을 열어 들여다본다는 것—그것은 보는 방식의 전환이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는 일. 시선의 전환이 건물이 되고, 건물이 제도가 되고, 제도가 일상이 된 시간. 그 시간이 창 하나에 겹쳐 있었다.
그 시간의 층을 품은 창 앞에서, 학생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었으니까.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 자연스러움이 궁금했다.
노출을 바꾸면 같은 장면에서 다른 것이 보인다. 어둡게 찍으면 사람은 사라지고 풍경이 남는다. 밝게 찍으면 풍경이 사라지고 빛만 남는다. 어떤 노출에서도 전부를 담을 수는 없다.
AI 콘텐츠 리터러시라는 수업에서 내가 하려는 것도 비슷할지 모른다.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보게 하는 일.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노출을 맞추는 일. 창 앞에 앉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노출을 조절하는 손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