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우리는 왜 감탄하지 않는가?

「AI가 문화를 점령하고 있다」를 읽으며

by 김형수

아침에 눈을 뜨면, 휴대전화가 이미 나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음악 앱은 ‘오늘의 추천 플레이리스트’를 띄우고, 뉴스 피드는 관심 있을 만한 이슈를 골라 보여준다. 짧은 영상을 하나 끝내면 또 다른 영상이 이어지고, 나의 ‘취향’을 학습한 알고리즘은 우리가 언제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할지 계산한다. 더 이상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선택은 이미 정해진다.


이제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AI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지를 결정하는 문화 그 자체가 되고 있다. 『The New Yorker』의 칼럼니스트 조슈아 로스먼(Joshua Rothman)은 에세이 「AI가 문화를 점령하고 있다(A.I. Is Coming for Culture)」에서 이렇게 말한다. "AI는 더 이상 도구가 아니라, 우리 삶의 감각을 조직하는 하나의 문화가 되고 있다." AI는 이제 단순한 기술을 넘어, 예술을 어떻게 만드는지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까지 결정하는 문화 그 자체다.


로스먼은 에세이 서두에서 "하루의 시작은 이미 AI의 추천으로 채워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음악, 뉴스, SNS 피드까지 알고리즘의 리듬 속에 살고 있다. 정보와 이미지가 넘쳐나지만, 이상하게도 감탄이나 놀라움은 점점 줄어든다. AI는 우리 대신 보고, 듣고, 판단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느끼는 일’을 대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알고리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AI는 인간의 창작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예술, 저널리즘, 콘텐츠 전반을 점령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과 ‘대체하는’ 것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AI 모델은 초당 수만 개의 단어와 이미지를 생성하지만, 그 폭발적인 생산성 속에서 새로움은 점차 사라진다. 양이 늘어날수록 독창성은 줄어든다. 같은 형식, 비슷한 감정, 익숙한 리듬의 콘텐츠가 알고리즘을 타고 반복 재생된다.


『뉴요커』의 풍자 카툰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병 속에 배를 넣은 사람이 친구에게 말한다. "병 속에 배를 어떻게 넣었는지 안 물어볼 거야?" 하지만 병 속 배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어떻게 넣었는지, 그 과정의 신비로움이 사라진 것이다. AI가 이미지를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어떻게 만들었지?"라고 묻지 않는다. 우리는 감탄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기술이 완벽할수록 경이로움은 오히려 멀어진다.


로스먼이 에세이에서 인용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장면은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의 체험이다. 그는 AI와 함께 에드워드 호퍼의 「Second Story Sunlight」를 감상한다. AI는 그림을 빠르게 분석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빛은 은혜롭고, 인물은 고요하며, 구도는 완벽하다." 그러나 그 옆에서 그림을 본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불편해. 저 둘의 관계에 뭔가 어긋난 게 있어." AI가 본 것은 ‘밝음’이었지만, 인간이 느낀 것은 ‘불편함’이었다. AI는 분석하지만, 인간은 해석한다.


감상이란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다. 작품과 나 사이의 여백에서, 나와 세계의 관계를 다시 느끼는 일이다. AI의 언어는 효율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예술의 언어는 모순과 감정의 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감상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로스먼은 에세이 말미에서 "AI가 문화에 진입하면서 우리는 함께 나눌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개인화되면 집단적 문화는 붕괴한다." AI는 각자의 취향을 완벽히 맞춰주지만, 동시에 사회적 연대의 언어를 분절시킨다. 모두가 자신만의 맞춤형 콘텐츠를 즐기지만, 공통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는 결국 대화할 언어를 잃는다. 문화란 원래 공동체의 언어였으나, AI 시대에는 그것이 '개인화된 소비 패턴'으로 변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전문 교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말하는 전문 교양은 특정 기술의 숙련이 아니라, 기술과 예술, 윤리와 사회를 연결하여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다. AI가 만들어낸 콘텐츠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의미를 다시 읽어내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교양이다. 아무리 기술이 정교해도 인간만이 해석할 수 있는 맥락의 깊이가 존재한다.


젊은 부모들이 자녀를 키우며 걱정하는 것 중 하나는 ‘아이의 상상력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아이들은 유튜브와 틱톡이 보여주는 세계 속에서 감정을 학습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선택된 결과물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상상력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 힘이다. 알고리즘은 보이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상상력이 있어야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어야 자기를 믿을 수 있다. 자기 감정과 생각을 신뢰하지 못하는 세대는 기술의 편리함 속에서 더 쉽게 흔들린다.


교양이란 천천히 깊이 감탄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감탄은 지식보다 오래 남고, 정답보다 사유를, 정보보다 여운을 남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검색 능력이 아니라 예술 앞에서 오래 머무는 습관이다. 그림 한 점 앞에서, 문장 하나를 읽으며, 선율 한 자락을 듣다가 스스로의 감정을 느끼고 해석하는 일—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경험이다.


로스먼은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문화란 합의를 필요로 한다. 공유된 의미의 감각을 필요로 한다." 그 공유된 감각을 잃으면 사회는 연결 대신 고립으로 향한다. AI는 정밀함을 만들어내지만, 의미를 창조하는 것은 인간이다.


기술은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예술 앞에서 감탄하고, 작품을 해석하며, 세계를 사유하고, 타인과 공감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다. AI가 만들어준 편리한 세계 속에서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주어진 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 의미를 찾아가는 힘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이고, 상상력을 지켜내는 방법이다.


AI이미지 by 김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