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들

1월, 삶의 의미와 취향, 좋아하는 것들에 대하여

by 이고경

우리는 정말 많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더라.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일을 열심히 해야 돼.

시간이 없어.

바빠.


왜?

너는 무얼 위해 살아?


그 말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걸 깊게 생각할 시간 조차 없이 맹목적으로 하루를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래, 무얼 위해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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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겨울은 유독 춥고 서러웠다. 이번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밤 열 시였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난 왜 이러고 살지? 내가 원하는 건 뭐였더라. 적어도 이런 어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얼 위해 살았더라.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원래부터 의미 같은 건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 살았던 것 같은데.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 아, 그래. 그거였어.


심리나 철학 책들, 작은 앵무새, 화병에 정갈하게 꽃혀있는 꽃, 선물받은 꽃다발, 봄과 여름, 산미가 없는 고소한 커피, 푸릇한 식물, 마감이 잘된 짙은 색의 목재 가구, 푸른 하늘과 목성, 풀벌레 소리, 타인의 이야기, 감정이 담긴 그림, 따뜻한 색의 조명, 잔잔한 재즈, 계절감이 느껴지는 가사의 노래, 전주가 꽂히는 일렉기타 소리 같은 것들.


나를 살게하는 것들은 보통 그런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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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나 철학 책들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는 늘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책이 있어서, 서점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그때의 마음에 꼭 맞는 책을 만나게 되곤 했다. 습관처럼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카페로 향해 한참을 읽다 보면, 명확한 해결책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이 가라앉고 생각이 정리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때로는 그 안에서 위로를 받았고, 때로는 스스로를 붙잡을 단서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심리학이나 철학에 관한 책이었다.


AI가 빠르게 발전하며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최고의 가치라는 주장에 정처 없이 휩쓸리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내 중심을 붙들어 준 말은 한 철학자의 문장이었다. 소유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그 질문은 유난히 깊게 다가왔다. 소유 중심의 사회에서 존재 자체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소유 중심적인 사고를 당연한 듯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막연한 불편함과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왜 그런 불편함이 생겼는지를 설명해 준 것이 바로 책 속의 문장이었다. 그 말들은 당시의 나에게 유난히 와닿았고, 그래서 더 고마웠다. 사람들이 왜 꾸준히 철학이라는 학문을 붙잡아 왔는지, 그리고 ‘철학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라는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책은 여러 번의 삶의 위기에서 나를 조용히 건져 올려 주었다. 그래서 힘들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책을 찾게 되었다. 인생은 앞으로도 수많은 굴곡을 지나가겠지만, 그때마다 나를 버티게 해준 책들은 하나둘 책장에 쌓여 갈 것이다. 아마 그렇게 쌓인 문장들과 생각들이 나만의 깊은 사고와 의미, 그리고 삶을 감각하는 힘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있다.



작은 앵무새

어릴 적부터 새를 키우고 싶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하늘을 나는 모습이 유난히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날개만 있다면 어디든 훌훌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새를 새장에 가둬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 와서는 어불성설처럼 느껴지지만, 어린 마음으로는 그렇게 해서라도 작고 작은 자유를 내 곁에 두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과목에서 백 점을 맞으면 새로운 가족을 선물해 주겠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그해 봄 나는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내 손안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앵무새 한 마리가 놓였다.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털뭉치는 처음 만난 날, 내 손안에서 작게 떨고 있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는 둘 다 아기였기 때문에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을 몰랐다. 어린 나이에 새벽마다 두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아기 새에게 밥을 먹이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제법 대견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작은 생명을 키우면서, 나는 모든 생명에게 조금 더 친절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길거리의 들새 이름을 외우고, 앵무새의 종류와 수명 습성을 찾아보고, 이름 없이 피어 있는 들꽃에도 눈길을 주게 되었다. 고양이들의 생김새와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아주 작은 생명 하나도 쉽게 지나치지 않게 되었다. 생명의 가치를 배우고 누군가를 대가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나의 습관을 바꾸어 놓았고, 집 안에 나를 반기는 생명이 있다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일상이 되어준 방울이는 작년 겨울, 일월 이십 일에 곁을 떠났다.


서울 지하철 한복판에서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염없이 울던 그날을 떠올리면 여전히 눈가가 아리지만, 나의 작은 앵무새가 있었기에 삶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요즘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영원한 그리움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죽음은 그 자체로 슬픈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픈 것이다.

그래서 순간 뿐인 지금을 조금 더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병에 꽃힌 꽃과 선물받은 꽃다발 그리고 들꽃

“꽃은 먹을 수도 없는데 뭐 하러 사냐”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 없는 말 중 하나다.

꽃은 쓰임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기쁨을 주는 얼마 남지 않은 고귀한 가치다. 꽃을 받는 날에는 유난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나를 위해 꽃을 사 들고 온 사람의 모습, 건네받는 순간 코끝에 번지는 은은한 향, 집에 돌아와 화병에 꽂아 두고 책상 앞에서 두고두고 바라보는 시간까지. 아침 출근길에 환하게 인사하듯 서 있는 꽃들을 마주하면,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꽃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예쁘게 보고 싶어서 관리하는 법을 찾아보고 가지치기를 해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제대로 꽂아 보고 싶다는 마음에 꽃꽂이 수업까지 들으러 가기도 했다. 줄기와 잎을 직접 만지고 느끼며 꽃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기쁜 경험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날이 따뜻한 날이면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꽃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저건 제비꽃이고, 저건 코스모스야. 이건 봄동이고, 히아신스야. 튤립도 예쁘지? 저건 물망초고, 도라지꽃이야. 그 기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길을 걸을 때면 나무와 꽃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꽃 이름을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도시 사람들은 참 낭만이 없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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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과 지금의 취향이 겹쳐 꽃은 나에게 ‘좋아하는 것’이 되었다. 조건 있는 사랑과 물질주의에 쉽게 잠식되는 사회에서, 내 곁에 조용한 안식처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그중 하나가 바로 꽃이다.



봄과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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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름은 생명이 가장 또렷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라 유독 좋다.


봄. 겨울이 끝나고 봄의 초입에서 처음 느껴지는 생기의 기운이 특히 그렇다. 봄은 바람부터 다르다. 따뜻한 바람이 살랑이며 머리카락을 천천히 넘길 때면 그보다 기분 좋은 순간도 드물다. 앙상하던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초록 잎이 고개를 내밀고, 잔디도 서서히 갈색을 벗고 초록빛을 띠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조심스럽게 움찔거리며 깨어나는 이 계절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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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에 지치기도 하지만 그 계절만의 정취가 있다. 여름밤에 자전거를 타거나, 늦은 시간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난 고양이를 떠올리면 괜히 가슴이 간질거린다. 왜 사람들이 ‘여름이었다.’라는 짧은 문장에 그토록 열광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계절이다.


봄과 여름은 움츠리고 있던 몸을 펴고 자연의 곁에 가까이 설 수 있어서 좋다. 퇴근 후 한강 수영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남자친구와 강을 따라 뛰며 웃기도 하고, 노을이 지는 강 너머를 바라보며 이번 주도 잘 살아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늘 봄과 여름만 반복되어도 좋겠다는 조금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을이 올 때마다 마음 한편이 괜히 아쉬워지고, 겨울이 되면 힘든 일들이 겹치며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봄과 여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듯, 이 행복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처럼. 돌고 도는 계절의 순환이 꼭 우리의 인생 같아서. 그 점이 참 좋다.



산미가 없는 고소한 커피

본가에는 커피 머신이 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커피를 거의 달고 살다시피 했다. 늘 마셨지만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어떤 날은 술을 마신 다음 날, 잠을 거의 못 자고 일 교시 수업을 버티기 위해 마셨고(그러면 안 됐다), 밤을 새워 과제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아빠가 좋은 원두를 사 왔다며 직접 로스팅해 볶아 준 커피를 한 번 맛보라며 건네주기도 했다. 대체로는 피곤함 때문에 마셨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커피만큼은 사치의 영역에 두고 싶었다. 각성제가 아니라 맛으로 먹고 싶었다.


다크 초콜릿 맛이 나는 커피가 있다고? 진짜 나네.

플로럴 커피는 뭐지? 홍차 향이 나는 커피도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

감귤 맛이 나는 커피까지 있다니.


별의별 커피를 다 마셔봤고 그렇게 계속 시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어떤 커피가 내 입맛에 맞는지, 어떤 맛이 좋은지. 톡 쏘는 산미가 강한 커피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도. 이어서 이런 커피에는 이런 디저트가 잘 어울리겠구나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페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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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간도 있구나. 따뜻한 오두막 같은 느낌이네. 이런 질감의 목재 가구가 있고, 이런 방식으로 소품을 배치하는구나. 이런 재즈 음악은 참 듣기 좋고, 따뜻한 느낌의 조명은 이 정도 색이구나. 커피에서 시작된 나의 관찰은 점점 공간, 가구, 음악으로 번져 갔다.


그렇게 모인 관심들이 어느새 내 취향이 되어 있었다. 하나를 좋아하다 보면 그 주변의 것들도 유심히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관심은 또 다른 취향이 되더라.


취향이란 결국, 사소한 것에 오래 머무는 관심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타인의 이야기

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특히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작품이나, 감정을 강렬하게 흔드는 영화, 사랑이나 권선징악 같은 가치와 의미를 품은 애니메이션처럼 가상의 이야기들이 좋다.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라는 사실조차 오히려 더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이야기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런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 있는 삶을 말하는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와 긍정적인 감정이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그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이 좋다. 감동을 받고, 마음이 흔들리고, 다시 한 번 세상을 살아보고 싶어지는 그 경험이. 그래서인지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동경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작은 울림을 남기는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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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오타쿠’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이야기에 빠지면 그 인물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감정으로 그 선택을 했을지를 계속해서 상상한다.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한 가지를 깊이 좋아하고 몰입하는 그 시간만큼은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다. 아무런 계산 없이 좋아하고, 생각하고, 빠져드는 그 경험 자체가 나에게는 큰 축복처럼 느껴진다. 덕질은 삶의 원동력이라는 말에 나는 백 번도 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각박한 세상에서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것은 결국 깊게 좋아하는 것들이다.



감정이 담긴 그림

AI 시대에 들어서며 가치가 가장 쉽게 폄하된 분야를 꼽자면 단언컨대 그림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잘 그린 그림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섬세함과 감정이 담긴 작품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림은 인간의 근원적인 창작 욕구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해소할 수 있는 활동 중 하나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반드시 ‘잘 그리기’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종 결과만으로 가치를 재단하곤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우리는 인물의 행동과 상황, 감정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린다. 빛과 그림자의 방향을 고민하고, 사물의 자세와 미묘한 디테일을 살피며, 보이지 않는 맥락과 설명까지 함께 캔버스 위에 옮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일러스트다. 인간은 그 과정 자체를 즐기며 창작 욕구를 채워 간다. 그래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마음을 울리는 그림은 언제나 그렇게 시간을 들여 그려져 온 그림이다.


그림을 보는 일도,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도 고귀하고 즐겁다고 생각한다. 감각이 무뎌지고 삶의 의미가 흐릿해질 때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직접 그린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선을 긋다 보면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 버린다. 밥을 거르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림은 유독 ‘과정’을 잘 드러내는 분야다. 무엇이든 빠르게,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이 활동만큼은 나만의 속도로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림을 사랑해 온 지도 어느덧 십 년이 넘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 느린 과정 속에서 살아 있음을 가장 또렷하게 느낀다.



일렉기타와 피아노, 악기들

인간에게 최초의 음악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음악이 없다면 세상은 꽤나 지루해질지도 모른다. 매일 에어팟을 귀에 달고 사는 나의 귀를 단번에 사로잡은 음악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주에 기타가 있다는 것. 어쿠스틱이든 일렉이든, 내가 좋아하는 음악 속에는 늘 일렉 기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연주해 보고 싶어 기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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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매우 아팠지만, 짜릿하다는 말이 딱 맞는 경험이었다. 오디오 인터페이스까지 사서 아이패드로 녹음을 하고, 엉성한 연주를 사람들에게 조금씩 보여주기도 했다. 여전히 많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좋아하는 곡을 직접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우울한 날에는 기타를 안고 어쿠스틱 곡을 조용히 쳐 보기도 하고, 주말마다 동아리 사람들과 밴드를 하며 올드 팝을 부르기도 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을 넘어 삶을 살아갈 이유와 의미를 건네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때 유독 와닿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에도 여러 악기를 만지며 자랐다. 피아노는 기본이었고, 초등학교 때에는 바이올린으로 ‘작은 별’을 연주했던 기억이 있다. 방과 후에는 오카리나를 불며 놀았고, 커다란 알토 리코더로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머리가 어느정도 컸을 때에도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나무 칼림바를 사서 좋아하는 곡을 연주 해보기도 하고, 악보도 제대로 볼 줄 모르면서 애니메이션 노래를 청음으로 따라 치던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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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돌아보면 거의 악기에 집착하듯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 안에 숨어 있는 예술가의 영혼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보고, 듣고,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꼭 내 손으로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인 것 같기도 하고. 기타의 차가운 쇠줄이 손끝에 닿는 감각, 고막을 파고들어 가슴을 울리는 소리는 때때로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그런 이유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꽤 큰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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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도, 이렇게 많은 것들을 좋아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들이 모여 취향이 되고, 취향은 때로는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는 사실.


다시금 깨닫는 것들이 있다.

나의 취향은 오롯이 나만의 것은 아니구나.

많은 관계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구나.


우리는 정말 많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더라.


너는 무얼 위해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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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
결과보다는 과정 그 자체,
느리지만 의미가 있는 것들,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지나갈 시간,

사유하고 창작하는 삶을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누리고 좋아하기 위해서 살아가.

삶의 진정한 의미는 나를 만들어주는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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