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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비어있었던 그 질문에 대한 공란

by 이차콜

새로운 하루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새로운 하루에 대한 설렘, 기대감, 개운함 속에 파묻혀 상쾌한 하루를 시작한 적이 언제인지 이젠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보다는 밤부터 이어지는 불안함과 우울감, 초조함과 긴장감, 온갖 부정적 감정들의 연장선으로 눈을 떴던 아침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은 한 시간, 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거지..’라는 막막함과 지겨움부터 차오른다.

이런 하루가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될 것에 대한 압도감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생각이 너무 많고, 남들보다 감각이 예민하고, 그로 인해 불안도와 긴장감이 높은 나에겐 글을 쓰는 것과 운동을 하는 것은 건강을 위한 수단보다는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깝다.

글을 쓰는 것과 운동을 하는 것이 나에게 숨 쉴 구멍임을 찾아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모른다.

덕분에 하루에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최소한 산책을 나가 바깥공기를 쐬고 오는 것 중 한 개라도 꼭 하기 위해 노력하며 감정이 늘어지지 않게 매일을 살아내고 있다.

그런 매일이 차곡차곡 쌓여가다 보니 이젠 나도 모르게 잠겨 들어 물을 머금은 솜과 같은 날에 갇혀도

‘아 내가 운동, 일기, 산책 중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3일이 지났구나.’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이 방법들을 더 최적화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연구를 해보는 요즘이다.

1년 동안 하루 일과를 마친 오후에 운동을 하고 일기를 쓰곤 했는데, 요즘 들어 그 방법이 들지 않는지 효과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켜보니, 아침에 부정적 생각과 감정으로 하루를 시작하다 보니 그 감정이 오후 내내 나에게 머물며 거대해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나에게 아침, 오후, 저녁 시간 중 ‘아침’이 제일 중요한 시간대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하루의 시작을 잘 보내야 하루의 끝까지 텐션이 내려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루의 시작을 종이 속에 번져 스며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머릿속에 가득 찬 쓸데없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시원하게 일기장에 쏟아낸 뒤, 운동을 하고 오면 후련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그런데도 근 3달간 이런 방법들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한 것보다 더 찐득찐득하고 묵직한 손님이 너무 오래 나에게 머물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어떤 것 때문에 이런 것일까 답답함에 그동안 작성했던 일기들을 쭉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일기 속에 담긴 나의 우울감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 상황들을 쭉 정리해 보았다.


남편의 일로 해외에 살게 되며 길어지게 된 공백기로 인한 불안감과 두려움.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즐기지도 그렇다고 무언가를 제대로 한 것 같지도 않은 것과 같은 생각으로 인한 압도감과 후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길을 잃은 것 같은 초조함과 암담함.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


쭉 작성하다 보니 일맥상통한 논조가 보였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길을 잃어버린 것이 공통적인 문제로 느껴졌다.

모든 것은 삶의 목적, 이유, 원동력을 잃었기에 파생된 혼란함으로 인한 우울감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라는 사람을 정리하는 나에 대한 자기소개서가 존재하고,

나만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평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 자기소개서에는 이름, 나이, 성별, 가족 외에 꼭 들어가는 질문이 있는데,


바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다.

그동안 나는 오랜 기간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000를 이룬 사람’, ‘000를 성취한 사람’, ‘000를 해낸 사람’ 등을 적어두곤 했다.


그런데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질문지에 대한 답이 흐릿해지며 공란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이 아니었으니 자연스레 지워졌을 테다.

틀린 답변이었으니 그 목표가 사라지자마자 길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성취, 목표 달성만을 위해 달려오다, 늘 있었던 끝 점들이 사라진 채 뫼비우스의 띠 같은 빙빙 도는 삶을 살게 되니 혼란스러웠고, 삶의 근간이 흔들린 것 같아 불안감과 초조함에 잡아먹혔던 것이다.

그런 생각과 감정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방치된 채로 3년 넘게 쌓여버렸고, 이제야 터져버린 것 같았다.

평생 동안 그 공란은 질문에 대한 정확한 의도를 이해한 채 작성되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나’ 로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보다,

당장의 결과물을 이룬 삶이 나의 삶의 목표라고만 생각해 그 칸을 대체해 버렸고,

진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가치관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해 본 적도 없었다.


머리가 띵- 했다.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었고, 무엇부터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이걸 찾아내야만 이 우울감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것만 같았다.

이걸 알아내야만 이 안개가 걷히고, 걸어 나가야 할 빛이 보일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이 답을 찾아야 한다는 걸 모든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머릿속에 이 질문을 가득 채운 채 살아가던 중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반복된 우울감 속에 살다 샤워를 하던 도중,

어떠한 이미지가 번쩍하며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무도 뜬금없고, 맥락 없이 말이다.

그 이미지 속엔 50대, 60대의 내 모습이 있었고,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서 자주 보았던 아주머니, 아저씨들처럼 같이 살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경험을 쉽게 받아들이고, 즐겁게 그 도전을 해내며,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배움을 지속하던 그런 어른들이었다.

그런 모습의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게도 환하게 떠올랐다.


그 이미지가 떠오르자마자 순식간에 그 공란의 답이 채워졌다.

내가 꿈꾸던 나이 든 나의 모습은 나이가 들수록 좁은 세상에 갇히기보다,

나의 영역을 꾸준히 확장하고 배움을 지속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익숙하고 즐겁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 가장 많이 하는 고민도 쉽게 도전을 하고 그 여정을 견뎌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요즘 말하는 ‘추구미’라는 것이 나에겐 이런 멋짐을 가진 사람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런 사람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30대의 나는 도전을 두려워하고, 새로운 도전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그 도전의 끝만 바라보며,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과정 속에서 메말라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꿈꾸는 20년, 30년 뒤의 내 모습은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도전의 끝을 바라보기보다 도전 자체를 즐기고,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노력해야만 했다.

지금부터 무수히 깨져보고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견뎌내는 훈련을 해야만 했다.

그렇기 위해 새로운 도전 속으로 거리낌 없이 다이빙해야만 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새로움을 익숙함으로 만드는 방법을 다양하게 경험해야만 했다.

이것이 근 10년 간의 내가 해야 할 숙제였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해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가치관이 형성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분명해졌다.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선명해졌다.

현재 하고 있는 그림책을 만드는 도전은 앞으로 해내야 하는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매 번 앞으로 잘 나아가다가도 픽 하고 힘없이 고꾸라지곤 했던 내 모습들이 그동안 내가 삶에 대한 방향성이 없었기에, 원동력과 에너지가 없었기에 그랬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가치관이 형성되자, 그림책을 도전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용기와 의욕이 샘솟았다.

그림책을 만드는 이 새로운 도전을 최대한 많이 부딪히고 실패하며 최대한 많은 경험치를 뽑아내고 싶어졌다.

그렇게 도전과 실패에 단단해진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림책 외에도, 이 해외 생활에서 최대한 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해보고 싶어졌다.

정말 신기했다.


이 공란을 채우기 위해, 제대로 된 답을 이제라도 찾기 위해 이 지난한 여정이 지속되었던 것 같았다.

지금껏 가지고 있던 내 습성은 절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며,

이 우울감과 외로움은 절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어서야 할, 나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맥없이 휩쓸리지 않을 동아줄이 생겼다.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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