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이면 늘 일찍 잠에서 깼다. TV를 켜면 디즈니만화동산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가 나왔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하며, 몇 편의 만화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곤 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오후 한시쯤 나오는 만화까지 봤다. 낮 만화는 kbs1에서 했는데 전국노래자랑이 끝난 후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전국노래자랑이 빨리 끝나길 바라곤 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참 길었다.
만화를 보고, 점심을 먹고 나면 밖으로 나갔다. 비슷한 또래 친구들과 형들이 부르거나, 아니면 같이 나가거나. 함께 놀고 해가 지기 전이되어갈 즈음엔 집에 들어가곤 했다. 아니면 밖을 향해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때나.
그런 날을 보내던 중 옆집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왔다. 그때 알게 된 1살 많은 형과 자주 놀았다. 형의 집에는 100가지가 넘는 게임기가 있었고, 드래곤볼 만화책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100가지가 넘는 게임 중 몇 가지 게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비슷한 게임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게임 실력이 형보다 부족했던 터라 난이도가 낮은 게임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때의 나에겐 다른 게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있었다. 게임을 함께 한다는 건 좋았지만, 언젠가 내게도 게임기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무렵 드래곤볼 만화책을 처음으로 산 것도 그 형처럼 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산 드래곤볼 27권을 보고, 또 봤다. 그런데도 몇 번이나 보고도 지겹지 않았다.
하루는 외갓집에서 게임을 하는 삼촌의 모습을 봤다. 삼촌은 옆 집 형처럼 TV에 게임기를 연결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기 모델은 달랐다. 하지만 100가지가 넘는 게임팩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게임스틱을 잡고 삼촌처럼 게임을 했다. 삼촌은 몇 개 더 해보라고 했다. 나는 옆 집 형에서와는 달리 100가지가 넘는 게임을 하나씩 눌러가며 해보기 시작했다.
그 후 우리 집과 그리 멀지 않았던 외갓집을 엄마와 함께 가는 것이 좋았다. 형의 집에서 늘 비슷한 게임을 하는 것과는 달리 이제 나도 내가 원하는 게임을 골라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외갓집에서 잘 때면 아침 일찍 일어나 게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이 우리 집에 게임기를 들고 왔다. 최초의 게임기는 그렇게 생겼다.
형 집과는 달리 우리 집에선 딱히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옆집 아줌마는 우리 집에 놀러를 왔어도 나는 늘 형의 집으로 갔다. 형에게도, 내게도 그쪽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게임기가 생긴 후에는 달라졌다. 형도 형에게 없는 게임 때문에 우리 집에 놀러 올 수 있었다. 나는 형이 오면 1P를 양보했다. 하고 싶은 게임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함께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형도 매번 같은 게임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게임을 하고 동네에 나가서 놀다 오면 하루는 금세 지났다. 평일에는 하지 못한 놀이를 주말에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일기엔 오늘은 재밌었다.라고 쓸 만큼 함께 노는 시간이 즐거웠던 것 같다.
다른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형과의 했던 대화 중 뚜렷한 기억이 한 장면 있다. 아마도 동네에서 먼 놀이터에서 달이 보일 때까지 어두운 밤에 있었던 날.
"엄마한테 혼나겠다. 형아야는?"
"나도 혼나지."
"빨리 들어가야겠다."
"조금만 더 있자. 어차피 늦었는데."
"그래."
그런 대화를 하고 나서 집에 들어갔다. 내 예상대로 혼이 났는지, 아님 넘어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6학년이 되고 형이 중학생이 되면서 형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형은 이사를 가면서 몇 개의 장난감을 주었다. 아쉬웠지만 무덤덤히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후 옆집에 새 이웃이 이사를 왔다. 새 이웃은 신혼부부였고, 맞벌이라 그런지 아줌마가 했던 것처럼 우리 집에 놀러 올 일은 없었다.
매번 하던 게임기도 지겹기 시작했다. 그때 내게 최대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건 늘 비슷한 위치에서 죽는 내 게임실력 때문이었다. 1차, 2차, 3차를 가면서 소진되는 생명을 늘릴 수는 없었다. 또 오락실처럼 동전을 넣어 연결할 수도 없었다. 모든 생명이 다하면 그냥 게임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게임 실력이 늘지 않는 한, 다음 스테이지를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매번 같은 자리, 같은 스테이지, 같은 패턴에 당하곤 했다. 어쩌면 지겨워졌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친구들과 오락실을 자주 갔다. 그때 오락실엔 형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자주 가진 못했다.
시간이 더 지나고 어른이 돼서 좋은 점은, 내가 원하는 게임을. 내가 원하는 기다림을. 내가 원하는 귀가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드래곤볼도. 그때보다 확실히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기다림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일지도. 분명 어떤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흘러가는 많은 일중에 하나를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기다림의 종류도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게임을 하고, 많은 경험을 하고,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하지만 유독 형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은 멈춰있는 것만 같다. 가끔은 그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시간도 있다. 그 시절과 지금의 나는 지구와 달처럼 서로를 맴돌고 있다. 그리고 그게 충분히 괜찮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