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계꽃 Aug 15. 2022

무너지고 깨어짐

이쯤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음을.

심리상담센터에 들어서는 내 마음은 흡사 피고인을 단죄하려는 검사의 그것과 같았다. 전문가의 입에서 상대의 잘못이 객관화되어 공표되기를 기다리는 마음 말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 묵히고 묵혀 발효되기 직전의 말들, 대화와 설득, 호소, 발악, 울부짖음에도 상대에게 가닿지 않던 그 말들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고, 내 생각이 맞았다고, 내가 옳았고 저 사람이 틀렸다는 사실이 마침내 밝혀지리라. 물론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갈등을 풀러 온 것인지, 재판을 받으러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냉랭한 기운을 뿜으며 대기실에서 물만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상담실에 들어서며 되뇌었다. 울지 말자. 절대로. 제발 눈물만은. 할 수만 있다면 나 자신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었다. 시시비비가 가려질 엄숙한 자리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얘 또 우네, 라는 눈빛이 주는 모멸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저 사람이 심판받는 날이며 그런 자리여야 하니까. 내가 눈물을 보임으로써 이 심판의 엄중함이 단 0.1%라도 희석되는 건 허락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온갖 힘을 쥐어짜 이성과 논리, 냉정으로 무장한 채 의자에 앉았다.


2년이 흐른 지금 당시 상담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왜 이혼 이야기가 나왔으며 서로에게 원하는 것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초기 상담에서 흔하게 나오는 이야기들을 했겠지. 중요한 건 결국, 나는 또 울고 말았다. 울면서도 내가 지긋지긋했다. 이상하게 상담 선생님의 질문이 나에게로 향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묵힌 말들이 모두 눈물로 액화한 것인지 질문에 몇 마디 답하다 울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울고, 나중에는 입을 꾹 닫고 울기만 했다. 그렇게 엄중해야 할 심판의 자리는 내 눈물로 얼룩져버렸다.


초기 상담 후 우리는 상담을 계속 받아보기로 했고, 심리검사와 더불어 몇 번의 개인 상담이 함께 진행되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자질구레한 기싸움을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회의감이 밀려와 이럴 바에야 그냥 이혼해버리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여기에는 상담의 방향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도 한몫 차지했다. 선생님은 상대의 가부장적이고 비합리적인 요구의 부당함 대신 자꾸 내 개인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이건 예상한 흐름이 전혀 아니었다. 회기가 진행될수록 당황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심지어 나는 거의 모든 회기에서 눈물을 보였다. 도대체 나란 인간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서른이 한참 넘도록 자기감정하나 전달 못하고 눈물만 질질 짜는 것인지 화가 치밀었다.


"표현을 하려고 해도 잘 안돼요. 눈물부터 나요 선생님. 저도 알아요 제 문제점. 감정표현 잘 못하고 참고 참다가 나중에 폭발하거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거. 사실 저도 차분하게 제 감정을 말하고 싶은데, 입을 떼면 그냥 눈물부터 나요. 진짜 울기 싫은데 조절이 안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대답은 명료했다.



"억울해서 그래요."



벽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줄 알았던 성이 실은 모래성이었다는 뼈 아픈 진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내가 상대에게 느끼는 주된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당신은 왜 나의 노력을 몰라주는 거야? 왜 나의 진심을 몰라주는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야기하는데 왜 인정해주지 않는 거야? 내가 이렇게 납작 엎드려 당신을 처절하게 붙잡았는데 왜 고마워하지 않는 거야? 다 떠나서, 당신은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거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방식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내 감정보다 상대의 감정을 우선시해 가끔은 내가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지 의심할 정도로, 아니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하다 지쳐 어쩌면 모든 게 내 탓인 걸까, 내가 부족해서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힘들어하는 걸까, 그렇게 나를 채찍질하며 상대가 바라는 사람이 되고자 전전긍긍하며 아등바등하기를. 그러다 내 색깔을 잃게 될지라도 그게 우리의 색깔이 된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를. 참다 참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그건 내 문제니까, 내 속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지금 당장 당신이 웃으니까, 우리가 행복하니까. 만약 내 생각이 여기에서 그쳤더라면 우리는 계속 행복한 부부로 살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당연히도 그렇지 못했다. 애초에 부부건 커플이건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일방적으로 맞추기란 순간 이동이나 시간여행처럼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억울했다. 내가 참는 만큼 상대도 참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참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것도 대단히 사회적인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 의사소통 기술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참는 게 배려고 사랑이라 믿었던 어리석은 난 그런 상대가 내심 부러우면서도 얄미웠다. 감정이 격해지는 날이면 그의 감정 표현이 이기적인 행동이라 비약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내담자분 본인만 참았다고 생각하시죠?
아니에요. 실은 남편분도 내담자분만큼 참았던 거예요."



  마디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곧이어 지금까지 내가 구축해온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실처럼 갈라진 틈은 점점 벌어지더니 질주하는 도미노처럼 어떻게    없이  전체를 무너뜨렸다. 무참하게 산산조각  자의식의 잔해를 허망하게 바라보다 마침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참는  배려가 아니었다. 사랑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하게 끔찍한 자기 파괴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쯤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대단히 잘못 살아왔음을.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마음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