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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지 Aug 29. 2021

늙어가는 몸에 대하여

 어떤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한다고 해서 결과가 동일하거나 변화가 미미하다면, 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나의 몫이 아닐뿐더러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게 “만약”이라는 가정은 흥미로운 질문이 아니다. 만약에 불로장생을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예쁘게 생겼더라면, 내가 연예인이라면, 복권에 당첨된다면 같은 것들. “노화”라는 주제도 마찬가지다. 매년 하나씩 늘어가는 주름을 없애기 위해 피부과에 가서 시술받고, 병원에서 암을 제거할 수 있을지언정, 그 누가 시곗바늘을 멈출 수 있겠는가. 내가 건강히 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받기, 주기적으로 운동하기 정도일 뿐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안락사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친구를 만나게 되어, 처음으로 노화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 인간의 평균수명이 과도하게 길어졌고, 나이가 들수록 고개가 뻣뻣해지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하는 어른들을 답습하기 싫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었다. 그녀는 혼자서 고독하고 아픈 상태로 삶을 끝내고 싶지도 않지만, 누군가에게 말년의 추한 모습을 보이길 몸서리치도록 싫어했다. 그래서 정신이 온전할 때 좋은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이야길 내게 건넸다. 그녀를 잘 아는 나는 그 선택이 그녀의 성향에 기인할 것으로 짐작했다. 평상시 힘든 일이 있어도 꾹 참고 일이 다 끝나고 얘기한다거나,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기를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그녀가 본인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를 가장 두려워하리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거나 잔병치레가 많거나 혹여나 큰 병을 앓게 된다면, 유아 때와 맘먹는, 혹은 더한 노동력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몸과 정신이 하나하나 기능을 잃어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겠다. 집에서 태어나고 죽는 게 당연하던 확대가족의 시대를 지나, 산업화를 거치며 병원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는 핵가족, 혼자서 삶의 끝을 마주하기도 하는 1인 가구의 시대가 도래했다. 죽는데도 시간과 돈이 든다. 그렇기에 죽는 것도 자격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행위로 느껴지기도 한다. 노년기엔 돌봄 노동이 필요하기에 가족에게 엄청난 짐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축복받으며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격체에게 허락된 마지막이 눈치 보는 삶이라니…

 눈가의 주름, 검버섯, 구부정한 다리. 자본주의에 물든 세상이 당신이 어떤 상태이건 간에, 결국은 당장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마당에, 점점 노쇠해가는 몸의 가치는 바닥을 친다. 나무의 나이테는 고된 시간을 견뎌냈다고 칭찬받는다. 노년기의 쇠약한 몸도 사실은 잘 살아냈다고, 잘 버텨냈다고, 모든 힘을 쏟아부어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칭찬받을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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