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패션 알려주는 남자입니다.
낭만.
쉬워 보이지만 어렵고, 아는 듯 하지만 모르겠는 그런 추상적인 단어입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나도 빠르고 여유도 찾기 힘듭니다.
바쁘게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감성에서 멀어져 이성에 가까워지고, 이성에 지친 심신은 휴식의 시간을 거쳐야 하기에 다른 여유가 사라집니다.
그렇기에 낭만이라는 것은 추상적이지만 현실의 사회는 이를 사치의 것으로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며 그러므로 점점 우리와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치를 즐기려면 몇몇 조건이 필요합니다.
위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했듯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재화와 시간입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현실에서 떨어져 낭만이라는 것을 찾을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낭만을 찾는 행위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나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가는 행위]
이 정의의 이유는 일단 낭만이라는 것을 찾으려면 현실의 나와 멀어져야 합니다.
그다음은 진정한 나와 마주하는 행위가 이루어져야 낭만이라는 것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나를 조금 설명하자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하는 행동(재화 벌이 등 사회생활)을 주(主)로 하는 나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나는 나를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나를 의미하죠.
그렇다면 여기 재화와 시간을 대입해보겠습니다.
현실의 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한에 달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재화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재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행동을 시간을 사용해서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시간을 다른 곳에 쓸 수 없는 상황이 발생됩니다.
이것을 조금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시간을 쓸 수 없는 것은 여유를 만들어 낼 시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나는 이와 많이 다릅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재화 벌이 행동은 사라지고 재화를 오히려 사용하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재화를 투자하는 행동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지며 그에 따른 소비는 나에게 즐거움과 정신적 풍족함을 가져옵니다.
현재의 사회는 현실의 나와 진정한 나와의 갭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납니다.
절대적 시간과 상대적 시간의 차가 너무나 크기에 그런 것이죠.
절대적 시간은 물리적으로 정해진 절대적인 물리량의 시간을 의미하고 상대적 시간은 내 주변으로 흘러가는 사회의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사간입니다.
상대성이론과 비슷한 느낌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생물, 무생물)에게는 동일한 속도(등속)의 시간이 제공됩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시간이 [시간 x n(n>1 자연수)]이라는 공식하에 n명으로 구성된 군집을 이루게 된다면 이들의 시간 총량에 따른 시간 속도는 개인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개인을 1 중력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군집은 [절대적 중력/n(개인의 중력이 뭉치면 어떠한 목표가 가진 중력을 약화시킨다고 가정])으로 이루어져 시공간을 뒤틀고 속도 또한 빨라, 나라는 개인이 판단하는 시공간보다 이들의 것이 훨씬 빠르게 계산됩니다.
개인이 이런 군집을 바라보게 된다면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시간의 개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속한 사회에서는 개인이 이들의 시간속도를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적 시간의 총량이 부족하게 됩니다.
앞에 말한 갭 차이는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노동력과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상심리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이 보상심리들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함으로 소비가 되지만, 사실상 공부를 통한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여유마저 공부할 시간의 부재) 겉핥기식의 가벼운 소비나 휴식을 위한 소비가 주로 이루어집니다.
100% 진정한 나를 마주하기엔 마주하러 나가는 시간조차도 부족하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낭만이라는 것을 현재의 우리가 품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낭만은 사람으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중세부터 시작된 낭만이라는 단어의 담론은 사람의 감정으로 나오는 예술품들의 문화 창조로 시작됩니다.
예술품이라는 것은 개인의 스킬들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 이상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분위기와 철학이 그곳에 묻어나기 때문이죠.
‘미드 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를 보시면 아주 재밌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1920년대를 동경하고 그것이 낭만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로 그 세상에 들어가 여러 예술가들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는 낭만과 철학을 공유합니다.
그는 거기서 어떤 여성을 만나는데 그녀는 주인공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이전 시대인 벨 에포크가 낭만적이라 말합니다.
주인공은 거기에 반발하죠.
하지만 그녀와 같이 흘러들어 간 벨 에포크에서 만난 예술가들은 르네상스가 완벽하게 낭만적이라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듣고 주인공은 현재로 돌아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에 새로운 사랑을 만나며 그녀의 [Actually, Paris is the most beautiful in the rain]라는 대사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장면들을 보고 저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또한 1900년대 초중반이 가장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때에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와 같이 그 시절의 사람들은 또 그 이전의 시대를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하겠죠.
저는 그래서 [과거에서 우리는 낭만을 찾는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가 아닌,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주 가볍게 플라톤의 이데아를 언급하자면 이는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닌 지성의 지각에서 오는 사회(육안으로 확인 불가한)입니다.
현재는 우리가 ‘경험’ 할 수 있지만, 과거는 공부를 통한 ‘지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이상이 발생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것은 낭만적인 [시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개인을 봐야 합니다.
제가 시대를 이야기한 이유는 우리가 그들의 낭만을 배우고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에 감사합니다.
[Actually, Paris is the most beautiful in the rain]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의 해석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파리라는 도시는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앞서 말한 시대들의 문화가 녹아든 그런 도시지요.
그렇기에 2020년대 현재의 우리는 그 모든 시대를 즐길 수 있습니다.
[공간에서의 존재]라는 개념 하나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죠.
그렇기에 파리는 아름답고 과거에도 내렸던 그 비가 내렸을 때, 우리는 그 시대들의 파리에 더욱 가깝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큰 문화론적인 발전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그 이전의 아름다운 문화들을 다 즐길 수 있는 지금 시대에 살아간다는 것은 말했듯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낭만의 시대에 살아온 멋진 사람들이 쌓아오며 후세에 남긴 생활방식을 공부하며 체화하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
좋은 식당을 찾는 일, 사랑하는 사람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이유 없이 선물하는 것,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예의, 좋은 음악을 듣는 것, 옷을 잘 입는 방식, 사랑의 표현법, 배려하는 법 등등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랫동안 낭만적인 사람들이 지켜오며 후세에 물려주던 이 개인적인 낭만은 우리가 어딘가에 시간을 투자하여 공간으로 즐기지 않아도 일상생활에서 가능한 것들입니다.
더하여 너무 따뜻한 것들이죠.
낭만이란 이렇듯 따뜻한 것입니다.
따뜻함의 시작은 무언가를 향한 사랑과 존중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텅 빈 어두운 장소에 작은 성냥이 켜지는 것이고, 이 성냥의 불빛이 양초로 넘어가 불을 살리는 일은 존중의 시작입니다.
결과적으로 낭만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낭만은 그렇게 멀리 있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작은 불빛을 유지해주는 것이죠.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들에 집중해보시길 바라겠습니다.
그 다양한 사랑이 나를 낭만적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현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이 사랑을, 아니 낭만을 잊지 않는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우리도 이 낭만의 불빛을 잘 보존하여 후세가 가진 양초에 잘 넘겨주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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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OCT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