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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진화, 기술과 학문 그리고 지혜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어들을 기반으로 해석하는 개인의 의복 행동

by 남자의 옷장
Scuola di Atene(1509~1511), Raffaello Sanzio, 출처 : 나무위키

안녕하세요. 패션 알려주는 남자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첫 페이지 첫 문장입니다.


그가 말하는 앎은 도대체 무엇이고 이것은 어디서 시작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저는 이것을 의복 행동으로 도대체 어떻게 확장을 시켜야 할까요.


저는 여태까지 ‘경험’이라는 단어를 개인 의복 행동 확장의 가능성으로 계속하여 주창하였습니다.


하지만 경험은 개인 의복 행동 완성의 첫 발자국일 뿐입니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동물의 한 종인 인간이기에 오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경험이라는 것을 오감을 통해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의복은 그중 시각을 통해 처음으로 인식이 되고, 개인의 경험의 시발점이 됩니다.


우리가 경험을 하고 싶건, 않건 눈에 어떠한 상(像)이 맺히는 순간 무(無)에서 유(有)로 머리에 인식이 됩니다.


무언가를 인식했을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것이지요.


어떤 존재가 실존하건 말건 개인의 주체가 그 존재를 인식하기 전까지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인식을 한 뒤로 그것의 존재 유무가 드러나고 속성이 파악되기 때문에, 그다음에서야 존재의 존재에 의미가 생깁니다.


시각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시각이 이 중 큰 틀 안에서의 속성 분류를 가장 완벽히 하는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무의 경험을 한 개체를 가정한다면 그 개체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경험으로 인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시각 없이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을 통하여 어떤 존재의 형상화를 시킬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없습니다.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은 직관적인 실체화와 형상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시각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의복의 경우에는 이 본질을 시각을 기반으로 기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시각의 경험으로 인하여 인상과 기억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감각의 확장이 진행되었을 때 우리는 경험의 직접 개인화를 할 수 있습니다.


시각이라는 것 만으로 한 경험은 [아는 것]이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고, 이때 [아는 것]은 간접적 경험으로 인한 간접 개인화입니다.


의복으로 따지면 시각을 넘어서 옷을 만져보며 원단을 느끼고 그다음은 입는 행위로 넘어가 의복이 몸에 감겨지는 느낌과 원단들마다의 특성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뇌에 입력되어 쌓이게 된다면 이를 통한 학습이 진행됩니다.


학습이라는 것은 기술과 학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술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단어로 이야기한다면 [실무]이고 학문은 말 그대로 [학문]입니다.


기술과 학문은 결과적으로 경험이 쌓여 나온 어떤 것이지만 색이 조금은 다릅니다.


똑같이, 이론에 따른 결과를 갖고 있지만 기술의 경우 삶을 영위하는 것에서 이론과 결과값이 발생이 되고, 학문은 삶에서 벗어난 여가의 형태를 띤 것에서 이론과 결과값이 발생하게 됩니다.


비슷하지만 서로는 적대적인 관계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무시할 수 있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죠.


의복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세탁에 있어, 기술자들은 ‘울(wool)을 세탁할 때 중성세제를 써야지 다른 세제를 쓰면 옷이 줄어든다.’(수단)


학문을 전공한 자들은 ‘울은 단백질이라 산과 염기에 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세제를 사용했을 때는 단백질이 변성되어 옷이 줄어드는 것이다.’(이론)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예시에서 보이는 차이는, 같은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중간값이 다르다는 겁니다.


물리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스칼라 값은 다르고 벡터 값이 같다.’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해보자면 같은 결과에 대해 기술자들은 ‘이거 해봤는데 원래 그래’이고, 학문을 전공한 자들은 ‘이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래’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에서 더 나아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혜]로의 확장입니다.


지혜는 3차원적인 것입니다.


1차원은 경험, 2차원은 경험이 만들어 낸 기술 혹은 이론, 3차원은 기술의 집합 혹은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에 도달한 인간들은 ‘지혜롭다’라고 불리웁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지혜가 존재할까요?


학자들이 추구한 앎의 가치는 선한 지혜이며 그들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기술이 뛰어나거나 다양하여 그로 인하여 많은 것을 전수할 수 있는, 실천을 통한 삶으로의 경험을 이룩한 기술자를 '지혜롭다’라고 하며 ‘그것이 선한 지혜이며 이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 누구도 먼저가 되지 않고 누가 선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이 논쟁에서 선한 지혜를 가진 자는 전지전능한 절대자(기독교의 경우 하나님)뿐 밖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두 방향의 지혜를 사회로 설명하자면, 기업과 연구소(대학교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기업에서 인물들(기술자)은 실무적으로 상당한 우수성을 띕니다.


이는 실무적으로 지혜롭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무를 경험하지 않은 대학교나 연구소 등의 인물들(학자)은 실무에서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 기업에서 다루는 어떠한 학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기업에 종사하는 인물들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지혜롭다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이 두 군집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가 낫다고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의 방향성(벡터)은 같지만 중간값(스칼라에서 띄는)이 다르기 때문이죠.


특화된 지혜가 다르기 때문에 ‘저들은 부족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복 쪽으로 이야기를 넘어와 진행을 해보자면, 학자와 테일러의 차이일 겁니다.


학자들은 수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론들을 통하여 패턴학적으로 기술을 해놨고 그것이 어떻게 구성이 되는 지도 알아 지혜롭지만, 오랜 시간 테일러링을 해오며 쌓아온 경험으로 디테일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테일러들의 지혜로움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서로는 이해를 못합니다.


테일러들은 책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이야기를 할 테고, 학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책에 기술된 의복의 형태(수트 그 이상의 다양함)가 더욱 많으니 우리가 더욱 많은 것을 안다고 이야기할 테니 말이죠.




저는 앞에서 개인의 의복 행동이 어떻게 확장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경험’, ‘기술’, ‘학문’, ‘지혜’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개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의복 개인행동은 욕구로부터 탄생합니다.


의복에 개안(開眼)이 되면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앎의 시작이죠.


따라서 1차원인 경험은 시각적 경험으로 많은 매체를 통하여 진행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촉각으로 경험의 확장이 됩니다.


시각적 경험은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는 것이라면 촉각적 경험은 이 만년필로 점을 찍는 것이죠.


이것을 2차원으로 확장하는 것은 1차원에서 느낀 경험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의복(주체)들이 가진 기술과 이론을 각 의복에 대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맞춰지기 시작하면 선이 그어집니다.


장르라는 것이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이 그어졌으면 3차원인 공간으로 우리는 확장해야 합니다.


2차원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되었다면 이것을 자신에 맞게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학자나 기술자를 생각해본다면 그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가 있고 그 위치에서 지혜롭습니다.


전문성이라는 것을 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의복 행동은 자신의 위치를 찾아 그 위치에 맞는 경험을 확장시켜 이론을 공부하고 이론을 대입하여 ‘나’라는 3차원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불리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차원에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만약 1차원에서 2차원을 못 본다거나, 2차원에서 3차원을 보고 있지 못한다면 경험과 이론과 기술 그리고 학문으로 나 자신을 적분하여 차원을 높여가시어 결국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 글 등 패션 알려주는 남자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패션 알려주는 남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29OCT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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