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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ux May 24. 2024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시인을 품은 마을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박인환, ‘목마와 숙녀’ 중에서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태백산맥을 품고 있는 인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악 지방이다. 어쩐 일인지 이 지역의 이름에는 동물들이 자꾸 등장한다. 고구려의 일부였을 적에 이곳은 저족현(猪足縣)이라 불렸는데 저족은 ‘돼지발’이라는 뜻이다. 이후 통일신라의 영토가 되며 현의 명칭이 ‘돼지발굽’이란 뜻의 희제(狶蹄)로 바뀌었다. 그러다 고려 시대 이후로는 ‘기린발굽’이란 뜻의 인제(麟蹄)로 바뀐 것이다. 어째서 지역의 이름이 이리 되었는지에 대해선 지형이 동물의 발굽 모양이라서란 설과, 이곳에 많이 서식하는 사슴이 기린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서란 설이 있다. 동물의 발굽이나 기린의 생김새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는 두 설 중 어느 쪽에라도 고개가 갸우뚱해지긴 한다. 한때 강원도에서 가장 넓었던, 홍천에 일부를 떼주었어도 여전히 넓은 인제군의 지도를 몇 번이고 보면서 도대체 어디가 발굽이란 걸까, 하고 궁금해할 뿐이다.


 인제의 역사와 지리, 문화를 학습하기엔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을 가보는 게 좋다. 국내 최초로 산촌을 테마로 하여 설립된 박물관으로서 인제터미널 근처에 있어 찾기도 쉽고, 내부가 넓고 쾌적하며, 전시 구성이 잘 되어 있다. 같은 사계절을 산촌에 사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 보내는가를 디오라마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고, 다양한 야생 동물 박제도 구경할 수 있다. 내가 본 기획전시에서는 삼을 캐는 심마니를 주제로 하여 심마니의 작업 방식, 사용 도구, 캐는 작물 등을 설명하고 있었다. 야외 전시장도 있는데, 목기를 만들던 도구인 갈이틀이나 기린정보다도 눈여겨봐야 할 유물은 ‘김부대왕당’이라는 제당이다. 인제군 상남면 김부 1리에 군사훈련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에 있던 대왕당을 이전 복원해놓은 것이 눈에 띈다. 대왕당에선 김부대왕(金傅大王)을 모셨는데, 김부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본명으로서 김부대왕을 경순왕이라 믿는 이도 있고, 망국 이후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던 그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김부대왕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고 한다. 유독 인제에 마의태자 전승이 많은데, 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해지는 바위, 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의 지명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민속박물관 옆에는 인제가 낳은 시인 박인환의 문학관이 있다. 비록 박인환은 인제에서 초등학교만을 다니다 서울로 전학을 갔기에 그가 인제에 머문 시간은 길진 않으나, 그는 31세에 요절했기에 나름 인생의 반절 정도는 인제에 지분이 있다고 봐도 괜찮겠다. 시인답게 어린 시절을 보낸 인제를 그는 늘 추억 속에서 그리워했다고 한다. 문학관은 인제에 있지만, 박인환이 시인으로 개화한 인생의 나머지 반절은 서울에 있다.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녔으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에 내려온 그는 종로구 낙원동에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며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마리서사는 친했던 선배 시인 오장환의 남만서점을 물려받은 것으로서, 박인환은 여기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그의 아내도 이곳에서 만났다. 박인환 문학의 산실이 된 마리서사를 비롯한 몇몇 점포들은 문학관 1층에, 당시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대포집 은성은 문학관 2층에 1940~50년대의 모습과 유사하게 재구성되어 있다. 이 시절 문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EBS 드라마 ‘명동백작’이 2004년 전파를 타고, 박인환의 손녀가 드라마 감상평을 남기면서 한동안 박인환 본인도 유명세를 탄 바 있다.


 시인으로서 박인환보다 훨씬 더 유명한 또 다른 인물도 인제를 거쳐 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죽는 날까지도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었던 한용운이 바로 그 인물이다. ‘용운’은 흔히 한용운의 필명 혹은 예명으로 여겨지나, 사실 용운은 평생을 승려로 살았던 그의 법명이다. 한용운은 1925년 백담사에서 시 창작에 매진하였고 이듬해 서울의 회동서관에서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였다. <님의 침묵>은 침묵의 시대인 일제강점기를 극복하여 회복의 시대인 광복으로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은 저항 문학의 대표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 체포된 이후 무수한 고초에도 불구하고 민족 의식을 지키고자 노력하였으며, 불교의 교리를 대중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 잡지를 발간하고 종교계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등 불교 개혁에도 앞장섰다. 한용운은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 교육기관 ‘명진학교’의 1회 졸업생이기도 한데,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 동국대학교 측에서 백담사가 위치한 인제에 만해문학박물관과 문인의 집, 만해학교, 광장과 산책로 등을 갖춘 만해마을을 만들었다. 숙박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청소년 수련이나 만해문학 관련 행사를 종종 만해마을에서 주관한다. 만해마을과 인근의 한국시집박물관, 여초 김응현 서예관, 백담사까지 묶어 구경하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만해문학박물관 내부 모습.  출처: 네이버 블로그

 한용운이 출가하여 수계를 받은 장소도 백담사이고, <님의 침묵> 뿐 아니라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장소도 백담사이기에 그와 백담사 간의 인연은 아주 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는 별개로, 한용운이 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진 이후로도 산기슭 깊숙이 위치한 백담사란 사찰 자체는 그리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오히려 백담사란 사찰의 이름을 언론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내리게 한 사람은 따로 있다. 그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러르는 한용운과 달리, 독재 정권을 수립하여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그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은 그를 치를 떨며 미워한다. 얼마 전에 그가 일으킨 쿠데타를 소재로 한 영화도 개봉되어, 많은 관객들에게 다시금 그의 만행을 상기시킨 바 있다. 그는 다름아닌 제11대~12대 대통령을 역임한 전두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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