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자취방, 그리고 건너편 그녀(2)

17살 소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그 봄날의 기억

by 알바스 멘탈코치

[잊을 수 없는 나의 아드린느]

-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풀어놓은 그 시절 이야기.

Chapter1 첫 자취방, 그리고 건너편 그녀


17살 소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그 봄날의 기억(2)



[1편에서 이어짐]


야, 그때 얘기 말이지. 지금도 생각하면 심장이 괜히 두근거린다. 그 봄날 밤 말이야.

지현이는 아랫목에 앉아서 무릎에 담요를 덮고 라디오 강의를 들으면서 교재에 완전 몰입하고 있었어. 그냥 원피스 잠옷 입고 말이야, 머리카락은 하얀 목덜미까지 내려와서 그 모습이 어찌나 단정하고 이쁘던지. 나는 옥상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고개를 쭉 빼고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지. 바람이 꽤 차가웠으나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어.


누나가 넷이나 있어도 그런 야릇한 감정은 처음이었거든. 그날 밤부터였지, 나만의 몰래 데이트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밤마다 그렇게 그녀를 바라봤어. 근데 그녀가 대학 시험 끝내고 나서는 그 밤들도 끝이 나버렸지 뭐야.


그러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을 거야. 아침밥 먹고 멍하니 있는데 창밖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뚱땅뚱땅, 어디서 많이 들어본 리듬. 바로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였지. 좀 서툴렀어. 틀리기도 하고 리듬도 좀 엇나갔고. 근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마음을 파고들더라고. 그냥 그 순간, 피아노 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훤히 그려졌어.


휴일마다 그 곡만 들려왔어. 다른 곡은 치지도 않더라고. 나 혼자 상상했지. ‘혹시 옆방에 있는 나 들으라고 치는 건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면서도 말이야. 그래도 그 시간이 좋았어. 세상에 나랑 그녀밖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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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날 오후, 낮잠 자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랐잖아. 창문에 검은 그림자가 스치는 게 보였거든. 실눈으로 봤더니 누가 내 방을 보고 있더라니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어. 그게 누구였을까?

누굴까? 도대체 누가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실눈을 뜨고 밖을 슬쩍 살펴보는데, 누군가 있다는 느낌은 오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더라.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쯤 그 그림자는 슬며시 사라졌고, 나는 궁금해서 벌떡 일어나 창문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지.


그랬더니 주인집 쪽으로 누군가가 황급히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더라니까.

그 존재는 바로 지선이었어.

늘 내 눈을 피하듯 도망치던 그 둘째 딸, 지선.


“하, 이거 봐라. 앙큼한 게 말이야.”


지선이는 대체 몇 번이나 나를 훔쳐봤던 걸까?

나는 언니인 지현이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는데, 지선이는 그런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니, 참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냐.


그저 중학교 2학년짜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춘기 소녀일 거라 생각했는데, 나라는 존재가 그 아이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그리고 또 어느 날, 지선이 오빠 윤기가 내게 슬쩍 말해주더라.

동생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윤기가 우연히 지선이 일기장을 봤는데, 거기 내 얘기가 그렇게 많이 적혀 있었대.

그렇게 해서 나는 언니를 마음에 두고, 동생은 나를 마음에 두는 묘한 삼각관계가 이어진 거지 뭐.


그러던 어느 날, 큰딸 지현은 근처 W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을 하고, 우리 가족도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


친구 집에 잠시 얹혀 있던 터라 누나 혼자 이사를 했고, 지현이네 가족들과도 별다른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그렇게 멀어졌지.


사실 멀어졌다기보단, 그냥 서로 다른 곳에서 살게 된 것뿐이었지.

우리가 주고받았던 건 고작 일방적인 눈길, 그리고 창문 틈새로 스며들던 피아노 선율이 전부였어.

말 한마디 못 나누고, 그렇게 우리는 멀어졌던 거야.


지현의 내 마음속 이미지는 온전히 나 혼자 부여한 의미였고, 그녀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 그게 궁금하기도 했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고3을 마치고 W대 건축공학과에 입학을 했어.

지현이 다니던 바로 그 학교 말이야.


대학에 들어가 보니 고등학교 때랑은 완전히 딴판이더라.

남자애들만 바글대던 고등학교와는 달리 예쁜 여학생들이랑 같이 수업을 들으니까 세상이 달라 보였지.


공대라 여학생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건축공학과에는 여학생이 30명이나 되더라니까?

알고 보니 공대 중에서도 건축공학과가 여학생들한테는 인기 최고더라고.

그렇게 대학 생활이 시작됐고, 우연히 학생회관에 붙은 바둑 동아리 모집 벽보를 보고는 얼떨결에 가입하게 됐어.


바둑 좋아하던 나로선 딱 맞았지.

동기, 선배들이 다들 괜찮았고, 나름 재밌게 지내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그 바둑 동아리 옆 독서 동아리 복도에서 지현을 딱 마주친 거야.

와...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


지현은 대학 3학년이 돼 있었고, 여전히 착실한 학생처럼 보였어.

우린 가벼운 인사말만 나누고 말았지만, 그 순간 옛 감정이 스르르 되살아나더라.

그렇다고 예전처럼 막 가슴이 뛰고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아련한 기억 같았지.

그 후로 동아리를 오가며 지현을 몇 번 스치듯 마주쳤는데, 어느 날은 지현이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반가워하며 다가오더니,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뭔가를 꺼내 주더라.

연한 민트색 봉투에 들어 있는 꽃 편지였어.

나는 그걸 받아들고 잠깐 멍해졌지.

‘설마... 지현이가 나한테?’

근데 그게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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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는 지현이가 아니라, 지선이가 쓴 거였어.

지현이 통해 내 대학 소식을 들은 지선이가 반가워서 보낸 편지였던 거지.


지선이는 고등학생이 돼 있었고, 학교 잘 다니고 있다며, 나 잘 지내라는 짧은 안부를 전한 거였어.

그 시절엔 휴대폰도, 무선호출기도 없던 때였으니까, 그 편지가 얼마나 뜻밖이고 충격이었는지 몰라.

나도 그냥 무심할 순 없어서, 짧게 안부 글 적어 지현에게 전해줬지.


“5월 축제 때 시간 있으면 놀러 와.” 이 말도 적고 말이야.

그리고 진짜로, 지선이가 친구 경하를 데리고 축제에 왔더라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렇게 몇 년 만에 마주한 지선이는 이제 제법 여고생 티가 나는 아이로 자라 있었어.

데리고 온 경하도 발랄해서, 우리 동아리 애들이랑 어울리며 파전도 사주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줬지.

캠퍼스는 5월의 꽃들로 가득하고, 그날 참 화창했었어.


우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그 옛날 언니가 연주하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얘길 꺼냈는데,

지선이가 빙긋 웃으며 말하더라.


“그거 언니가 연주한 거 아니야. 나였어.”


와... 그 말 듣는 순간,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지.

난 그 곡을 들으며 별별 상상을 다 했었는데,

그 주인공은 지현이 아니라 지선이었다니.


그날 이후 지선이의 편지가 두어 번 더 왔지만,

내 대학 생활은 정신없이 바빴고,

솔직히 지선이에게 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그렇게 서서히 멀어지게 되더라.


지금쯤 지선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 이 글은 《잊을 수 없는 나의 아드린느》 집필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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