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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영화의 욕망·폭력·구원

〈어쩔 수가 없다〉를 중심으로 본 한국영화의 윤리와 미학〉

by sonobol







박찬욱 영화의 욕망·폭력·구원


〈어쩔 수가 없다〉를 중심으로 본 한국영화의 윤리와 미학


서론: 한국영화의 성적 시각화와 금기의 경계


한국영화는 오랜 시간 ‘검열’과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진동해 왔다.

1990년대까지의 영화 윤리 규정은 신체 노출이나 성적 묘사를 사회적 금기로 간주했고,

2000년대 이후 그 틀이 허물어지면서 ‘에로티시즘’은 영화적 언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성적 표현은 예술과 선정성 사이의 경계 위에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박찬욱은 한국영화의 금기를 지속적으로 교란시킨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신체는 단순히 욕망의 표면이 아니라, 폭력과 구원, 죄의식과 욕망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그리고 최근작 〈어쩔 수가 없다〉에 이르기까지,

그는 성적 장면을 단순한 자극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도덕의 틀을 시험하는 미학적 실험이자,

억압된 인간 내면의 해방을 탐구하는 윤리적 질문이다.


박찬욱의 미학 핵심 – 욕망과 죄의식의 공존


박찬욱의 영화에는 반복되는 이중 구조가 있다.

욕망과 죄의식, 사랑과 살인, 구원과 파멸이 언제나 공존한다.

그의 인물들은 선악의 구분을 거부하며, 죄를 짓지만 동시에 구원을 갈망한다.


〈박쥐〉의 신부 상현은 신의 법을 어기고 피를 마시며, 사랑을 택한 죄인이다.

〈아가씨〉의 숙희와 히데코는 착취의 체제 속에서 욕망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탐정 해준이 진실을 쫓다가 결국 사랑의 심연에 빠져든다.

〈어쩔 수가 없다〉의 주인공은 그 연장선 위에서, 도덕과 생존 사이의 모순을 살아간다.


박찬욱에게 인간은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도덕적 불가항력”을 그린다.

인간은 옳음을 알면서도 그릇된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이해 가능하다.

이것이 그가 반복해서 던지는 메시지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음’의 철학 – 생존과 책임의 윤리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부터 철학적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구조적 운명론을 압축한다.

기업은 위기에서 구조조정을 택하고, 개인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버린다.

인간은 생존의 이름으로 윤리를 유보한다.


영화 속에서 ‘개를 버리는’ 장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붕괴의 은유다.

한때 가족이었던 존재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존재를 희생시키는 사회적 습속을 드러낸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잔혹한 이면을 시각화한다.


이처럼 그의 영화에서 폭력은 ‘타락’이 아니라 ‘현실의 단면’이다.

〈박쥐〉에서의 살인은 사랑의 왜곡,

〈아가씨〉의 복수는 억압된 욕망의 폭발,

〈어쩔 수가 없다〉의 해고와 버림은 생존의 잔인한 질서다.

모두 “도덕적 선택이 불가능한 세계”에서의 인간의 초상이다.


남편 살해 모티프의 계보 – 통제와 해방의 상징


박찬욱 영화에는 일관된 ‘남편 살해’ 모티프가 존재한다.

〈박쥐〉의 탈출, 〈아가씨〉의 복수, 〈헤어질 결심〉의 자멸,

그리고 〈어쩔 수가 없다〉의 또 다른 변주까지 이어진다.


이 모티프는 단순히 ‘범죄 서사’가 아니다.

남편의 죽음은 ‘가부장제의 해체’를 의미하며,

여성의 행위는 사회적 구속에서의 주체적 해방을 상징한다.


〈아가씨〉에서 히데코는 남성 중심의 성적 폭력 체제를 파괴하고,

〈어쩔 수가 없다〉에서는 가정 내 억압 구조가 해체된다.

이 모든 살해는 단순한 복수나 분노가 아니라,

‘자기 결정’의 극단적 표현이다.

박찬욱의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행위자’다.

그는 여성의 욕망을 죄로 그리지 않는다.

그 욕망은 체제를 전복하는 에너지로 변한다.


성적 시각화의 미학 – 노출이 아닌 언어


박찬욱의 영화에서 성적 장면은 언제나 서사적 장치다.

〈아가씨〉의 동성 간 장면, 〈박쥐〉의 욕망 표현, 〈어쩔 수가 없다〉의 관계 묘사 모두,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 아니라 감정과 권력의 교환 구조를 시각화하는 수단이다.


한국영화에서 여성의 몸은 오랫동안 소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박찬욱은 카메라의 시선을 역전시킨다.

그는 ‘보는 자’의 권력을 해체하고,

‘보이는 자’의 시선에서 욕망을 재구성한다.


〈아가씨〉의 클로즈업은 남성의 욕망이 아니라 여성 간의 시선 교환을 중심에 둔다.

〈어쩔 수가 없다〉의 경우, 신체 노출은 불필요한 자극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드러내는 감정의 해부학이다.

박찬욱은 “노출”을 통해서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탈피시킨다.

그는 육체를 통해 영혼을 본다.


박찬욱의 색채와 음악 – 감정의 구조


박찬욱의 연출은 회화적이다.

그의 색채는 항상 심리의 표면으로 기능한다.

〈박쥐〉의 푸른 필터, 〈아가씨〉의 녹색과 분홍,

〈헤어질 결심〉의 청색 안개,

〈어쩔 수가 없다〉에서는 회색과 흙빛의 현실감이 중심이다.


음악 또한 의미의 핵심 축이다.

〈어쩔 수가 없다〉에 삽입된 배따라기의 〈불 좀 켜주세요〉,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는

단순한 레트로 감성이 아니다.

이 곡들은 욕망과 회한의 시간적 층위를 만든다.

불을 켠다는 것은 ‘진실의 드러남’이고,

잠자리는 ‘순수의 퇴색’을 상징한다.

박찬욱은 익숙한 대중음악을 통해 관객의 무의식을 자극한다.


제목과 언어의 심리학


〈어쩔 수가 없다〉라는 제목은

한국어 특유의 운명론적 체념을 내포한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도덕적 판단을 중지시키는 언어다.

이 말은 변명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한국 사회의 윤리적 현실 진단이다.


영화 제목의 언어학적 분석에서도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다’로 끝나는 제목의 한국 영화가 흥행에 약하다는 통계적 관찰은,

언어의 리듬이 감정적 여운보다 ‘종결’에 가깝기 때문이다.

〈끝까지 간다〉, 〈그놈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모두 완결형 문장이다.

반면 〈헤어질 결심〉, 〈기생충〉, 〈명량〉처럼

‘명사형’이나 ‘결심’의 여백을 둔 제목은 관객의 해석 여지를 남긴다.

박찬욱이 이번에 택한 제목은, 그만큼 냉소적이고 무겁다.

그것은 작품 전체의 감정 톤을 압축한다.


사회적 은유 – 버려진 존재들의 초상


영화 속 개 버림 장면은 사회 현실을 투사한다.

기업의 해고, 가족의 단절, 국가의 무책임.

모두 ‘살기 위해 버리는 행위’로 수렴된다.


〈어쩔 수가 없다〉는 동물 학대나 가족 해체의 사실적 묘사보다,

그 뒤에 있는 정당화의 언어를 겨냥한다.

“형편이 안 돼서”, “회사가 어려워서”, “나라가 힘들어서.”

모두 동일한 문장 구조다.

박찬욱은 이러한 언어를 윤리적 회피의 상징으로 포착한다.


그는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지만, 폭력의 구조를 해부한다.

〈박쥐〉의 살인은 신앙의 부패,

〈아가씨〉의 폭력은 욕망의 해방,

〈어쩔 수가 없다〉의 버림은 생존의 결과다.

그의 카메라는 늘 죄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해부도다.


‘박찬욱적 세계’의 확장 – 도덕 이후의 인간


〈어쩔 수가 없다〉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극단적 미장센보다 일상적 절망의 리얼리즘을 택했다.

박찬욱은 더 이상 피와 복수를 미학 화하지 않다.

대신 현실의 무감각, 감정의 피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의 인물들은 죄를 짓고, 변명하고, 살아남는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완전히 파멸하지도 않는다.

그 사이에 ‘어쩔 수 없음’이 있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자, 감독이 직시한 세계의 본질이다.


이 작품은 결국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체념의 철학을 다룬다.

선택은 있지만, 구원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이 무표정한 윤리의 시대를, 박찬욱은 가장 냉정한 미학으로 기록했다.


결론: 윤리와 미학의 경계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박찬욱 세계관의 결정체다.

그의 영화는 폭력을 미화하지 않고, 욕망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대신 죄의 구조를 보여주고, 도덕의 모순을 질문한다.


〈박쥐〉의 초자연적 죄,

〈아가씨〉의 사회적 폭력,

〈헤어질 결심〉의 감정적 도피,

〈어쩔 수가 없다〉의 현실적 체념은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왜, 알고도 그렇게 행동하는가?”


그 질문 앞에서 박찬욱은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인간의 모순을 비춘다.

그의 영화는 윤리의 해체이자,

동시에 인간성의 마지막 남은 잔광을 포착하는 작업이다.


한국영화의 윤리는 여전히 현실과 타협한다.

그러나 박찬욱의 미학은 타협을 거부한다.

그의 영화는 불편하고, 냉혹하며, 아름답다.

그것이 바로 박찬욱이 제시한 오늘의 한국영화 윤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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