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정학적 체스판, '결합된 경쟁'의 시대
초연결 세계화의 시대가 저물고,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구조적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분리(decoupling)가 아닌, 깊은 상호의존성 자체가 무기가 되는 '결합된 경쟁(Coupled Competition)'의 양상을 띱니다. 미국은 달러 기반 금융 시스템과 핵심 기술이라는 '병목(chokepoint)'을, 중국은 희토류 등 핵심 원자재 공급망 지배력을 무기화하며 맞서고 있습니다. 본 칼럼은 이 거대한 전환의 핵심을 지정학, 경제·기술, 그리고 통화·금융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압축하여 분석하고, 다가올 10년을 위한 전략적 시사점을 제시합니다.
제1장: 재편되는 글로벌 패권 경쟁
미국은 중국을 장기적 핵심 도전자로 규정하고, 동맹 네트워크를 복원하여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전략적 경쟁' 기조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 중국은 내수 시장과 자체 기술 혁신에 기반한 '쌍순환(Dual Circulation)' 전략으로 외부 압력에 대한 경제적 내성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군사적 긴장으로 이어집니다. 대만 해협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사 활동 일상화로 가장 위험한 인화점이 되었으며 , 남중국해에서는 중국 해경과 해상 민병대를 동원한 '회색지대(gray-zone)' 전술로 주변국과의 산발적 충돌 위험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에 대응해 일본, 필리핀 등과 3자 및 다자 협력 체계를 강화하며, '얽힘을 통한 억제(deterrence by entanglement)' 전략으로 중국의 군사적 행동 문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제2장: 경제 및 기술 전쟁의 최전선
2025년 현재, 미중 간의 관세 전쟁은 언제든 재개될 수 있는 불안한 휴전 상태를 유지하며 글로벌 경제에 '불확실성의 상시화'라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 기업의 대중국 투자는 급감했으며 , 글로벌 기업들은 저비용의 '효율성' 대신 공급망 다변화를 통한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기술 전쟁의 핵심은 반도체입니다. 미국은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 반도체 제조 장비(SME), 설계 소프트웨어(EDA)의 대중국 수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봉쇄는 역설적으로 중국의 기술 자립을 가속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중국은 475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펀드를 조성하고, 미국의 제재를 우회하는 자체 AI 칩(화웨이 어센드 910C) 개발에 성공했으며, 광자 칩과 같은 '도약 기술'에 집중 투자하며 추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술 봉쇄가 장기적으로는 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중국 기술 생태계를 키우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3장: 통화 및 금융 전쟁의 미래
달러 패권 역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첫째, 중국은 위안화 국제화를 국가적 과제로 삼고, 달러 중심의 SWIFT를 대체할 수 있는 자체 결제 시스템 CIPS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위안화의 국제 결제 비중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둘째, 디지털 화폐의 등장은 통화 전쟁의 새로운 전선입니다. 이 영역은 두 개의 상반된 흐름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민간 주도 혁신 (미국식 모델): 비트코인은 현물 ETF 승인 이후 제도권 자산으로 편입되었고 , USDT·USDC와 같은 민간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달러' 역할을 하며 달러의 영향력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를 규제(GENIUS 법안)를 통해 제도권으로 포섭하며 '달러 패권 2.0'을 꾀하고 있습니다.
국가 주도 혁신 (중국식 모델):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인 e-CNY(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결제 시스템의 효율성과 통제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중국, UAE,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참여하는 도매용 CBDC 플랫폼 '프로젝트 엠브리지(mBridge)'는 최소기능제품(MVP) 단계에 도달하며, 달러와 SWIFT를 우회하는 실질적인 비달러 결제망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국제 금융계에서 가장 의미 있는 지정학적 변화일 수 있습니다.
결론: 다가올 10년을 위한 전략적 시사점
향후 세계는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피하지만, 경제·기술·금융 영역에서 치열한 경쟁이 지속되는 '장기적 냉전 2.0' 시나리오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다극화된 경쟁 구도 속에서 기업, 투자자, 정책 입안자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기업: 저비용의 '효율성'에서 공급망 다변화를 통한 '회복탄력성'으로 경영의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합니다.
투자자: 포트폴리오에 '지정학적 리스크'를 명시적으로 반영하고, CBDC와 스테이블코인이 가져올 새로운 금융 지형을 이해해야 합니다.
정책 입안자: 동맹 관리와 함께 국내 기술 및 경제 역량 강화에 집중하고, 다수의 통화와 결제 시스템이 공존하는 복잡한 세계에 대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21세기 패권 경쟁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기술 표준, 공급망, 그리고 화폐의 미래를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체스판에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난 민첩하고 전략적인 대응이 필수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