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빅. 고객님. 새로운 환경을 다운로드하였기에 이동합니다.”
“네? 새로운 환경이요? 사용설명서는요?”
당황한 당신은 안내 음성을 향해 다급하게 묻는다. 그러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친절한 목소리가 당신의 귓가에 상냥하게 속삭인다.
“고객님, 그런 건 없어요.”
이상적인 멘토란 유니콘 같은 존재다
드라마에서는 서툰 주인공이 낯설고 두려운 상황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반드시 등장한다. 마음껏 울 수 있도록 큰 손으로 숨겨주기도 하고, 내내 투덜거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또 어느 순간에는 가슴을 울리는 명대사로 주인공을 각성시켜 주기도 한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 반대편에는 계략과 음모의 고수들이 등장해서 주인공을 끌어내리려고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밋밋하다. 일터에서는 이상적인 멘토나 나를 끌어내리려는 강력한 빌런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럭저럭 배울 만한 면이 있는 동료와 신경에 거슬리는 동료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일테면 건포도 백설기와 콩 백설기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나 할까.
아, 그러고 보니 건포도 백설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들을 위해 다른 비유를 들자면, 꿀 송편과 검은콩 송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지금까지 검은콩 송편을 두어 번 먹어봤는데 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어쨌든 이 비유의 초점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다들 어디 하나가 아쉽고 부족하다. 업무 지식은 해박하지만 기존 방식만 고집해서 답답한 사람, 일은 똑 부러지게 하는데 너무 바빠서 후배들을 신경 쓰지 못하는 사람, 혼자서는 성과를 잘 내지만 같이 일할 때는 주변을 힘들게 하는 사람, 배울 게 많긴 하지만 나에게는 잡무만 맡기는 사람 등등. 롤 모델로 삼을 멋진 멘토는커녕 그럭저럭 도움 되는 동료를 만나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절로 한탄이 나온다.
“회사에는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배우고 따르고 싶은 롤 모델이 없어.”
“아니, 제가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업무를 멀쩡하게 알려줄 사람이면 된다고요!”
이렇게 하소연하는 사람을 위해 씁쓸한 통계를 보여주겠다. 일터에서 중간보다 약간 나은 수준으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상위 30%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설명을 제대로 해주는 사람 역시 30%로 잡자.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1 x 0.3 (30%) x 0.3 (30%) = 0.09 (9%)
100명 중 9명이다.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업무를 알고 있고 설명을 제대로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말이다. 우리 생각에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소박하기 짝이 없는 요청이 사실 이처럼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던 셈이다(어쩐지 주변에 멀쩡한 인간이 별로 없더라니).
이제 우리는 울분을 가라앉히고 심란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가르쳐줄 멘토는
없는 게 정상이다.
내가 배워서
답을 찾아내야 한다.
만약 당신이 회사에서 정말 친절하고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주고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일터를 소명(calling)으로 생각하는 종교인이거나, 당신을 자기 자리에 성공적으로 꽂아두고 잽싸게 퇴사하려는 사람이다.
유니콘은 없어도 말, 뿔, 날개, 달리기로 나눠 배울 수는 있다
<스타워즈>의 루크에게 요다가 있고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에게 아이언맨이 있는 것처럼 회사에 가면 나를 이끌어줄 존재가 기다릴 거라는 환상은 접어야 한다. 물론 그런 사람이 지구 어딘가에 있긴 하겠지만 우리가 속한 조직에, 부서에, 마침 같은 시기에 존재할 확률은 너무나 희박하다.
결국 우리는 이상적인 멘토가 없는 채로 고만고만한 장단점이 섞인 동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없는 완전체를 찾는 대신 여러 존재에게서 장점을 나눠 배우는 법을 찾아야 한다. 세탁과 건조, 다림질까지 완벽하게 되는 가전제품을 기다리느니 각각을 따로따로 구매해서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배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니콘을 기다리는 대신 말, 뿔, 날개, 달리기 등으로 나눠서 배운 후 내가 원하는 유니콘에 가깝게 구성하면 된다. 일종의 유니콘 커리큘럼이라고나 할까.
어른이 되면 학창 시절과 달리 스스로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배워야 한다. 필요한 지식과 자원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배움에서도 졸업한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일하는 사람의 공부는 학생의 공부와 다르다. 다행히도.
자기가 속한 업계, 기업, 부서, 담당 업무가 정해져 있으므로 배워야 하는 분야가 한정적이다. 그러니 자기 앞에 놓인 과제부터 공부하면 된다. 일종의 최소유효지식(Minimum Viable Knowledge)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만 제대로 해도 충분하다. 내공을 쌓을 수 있는 더 넓고 깊은 영역은 그다음에 공부해서 점차 나아가면 된다. 이게 일하는 사람의 공부가 지닌 매력이다.
게다가 완전체가 없을 뿐이지 망망대해에 우리만 덜렁 있는 건 다행히도 아니다. 우리를 도와줄 반짝이는 조각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완성형의 업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우리는 변변한 사용설명서와 멘토가 없는 환경에서 새롭고 낯선 분야에 적응하고, 성과를 내고,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누군가가 옆에 앉아서 조곤조곤 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빠르게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공감할 것이다. 해본 적 도, 배운 적도 없다는 주장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답을 찾아
사람들을 인도할 유일한 담당자가 바로 당신이다.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해온 나 역시 비슷한 막막함을 느끼곤 했다. 회사의 동료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은 20%도 되지 않았다. 낯선 상황에서 도움을 줄 사람들을 찾아내서 빠르게 공부하고, 일정한 궤도에 오르고,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얻게 된 능력이 있다.
혼자서도 완성형의
업무를 하는 것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움은 언제나 많이 필요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에서 시작해 10까지 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와 실력을 갖고 있고, 그 길을 잘 가기 위해 도움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된다는 의미다. 이 능력이 왜 중요한 지 알려면 ‘1부터 7까지’ 아는 사람이 있고, ‘3부터 10까지’ 아는 사람을 떠올려보면 된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는 상황이라면 전자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없고, 후자는 여정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어느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든, 완성형의 업무를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의 기초과목이 있다. 예를 들어 제약 회사에 다니다가 AI 유전자 분석 스타트업 팀장으로 가게 됐다거나, 해본 적도 없는 메타버스 마케팅을 맡게 됐다거나, 쇠락하는 독립서점을 부흥시켜야 하는 매니저가 됐다거나 등 우당탕탕 상황에서 답을 찾아야 할 때 자신의 등을 받쳐줄 역량들 말이다.
내가 생각할 때 가장 필요한 기초과목은 네 가지 영역이다.
▶ 과제를 만났을 때 멋진 답을 찾아내는 ‘아이디어’
▶ 머릿속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해내는 ‘실행’
▶ 다른 사람의 능력까지 끌어와서 성과를 만드는 ‘협업’
▶ 길을 잃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는 ‘커리어’
이 네 가지야말로 조직의 후광이 없을 때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멘토와 사용설명서가 없을 때도, 당신이 똑바로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다리가 후들거리긴 하겠지만). 혼자서도 완성형의 업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 해본 적 없는 낯선 상황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내 다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사람들을 위한 능력이다.
회사형 인간이 되기는 싫지만 휘둘리지 않을 진짜 실력은 갖추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에 자그마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장하고 변화하는 조직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처음으로 맡기 시작한 3년 차부터, 낯선 상황에서 업무를 이끌어야 하는 리더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내용을 쓰려고 한다.
가장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답을 찾아가야 하지만 변변한 멘토도, 사용설명서도 없는 대표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웠지만, 모두가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비슷하게 우당탕탕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책을 쓰기로 했다. ‘서른네 살, 경력 7년 차에 유망한 성장 기업에서 일하게 된 평행우주의 또 다른 나’에게 보내주고 싶은 글이기도 하다.
또 다른 나에게 응원의 마음을 담아, 그리고 지금도 일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담아 글을 보낸다.
스스로 적응하고
배워나가야 한다.
나의 성장이 ‘책임’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나 외에는.
제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여기에서 습작처럼 조금씩 선보이던 글들이 책으로 나옵니다. <일하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
* 출처 : <일하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박소연, 더퀘스트
* 책 정보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2338522
책에 있는 내용 중 흥미로운 내용들을 골라 올릴 예정이에요.
그리고 나서는 <Better Work, Better Me>라는 이름으로 매주 연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실 제 전용 블로그에 연재할 예정인데, 여기에도 같이 올리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자주 뵈어요!
박소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