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힘! 생활인구와 로컬관광 전략』 세번째 이야기
사람이 걷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 누군가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그저 바람을 쐬기 위해 걷는다.
하지만 걷기 길이 단순한 이동 경로를 넘어 ‘치유 콘텐츠’가 되는 순간은 조금 다르다.
그 길이 주는 풍경, 소리, 냄새,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가 여행객을 오래 붙잡는다.
나는 여러 지역의 걷기 길을 걸어봤다.
잘 닦인 산책로도, 풀과 나뭇가지가 길 위로 드리운 비포장 오솔길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길은 화려하게 포장된 코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지역만의 자연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길이었다.
시골 마을을 가로지르는 좁은 흙길, 계절 따라 색이 바뀌는 논두렁, 그리고 길가의 장독대와 고양이. 이런 풍경이 여행객의 마음을 풀어주고, 속도를 늦추게 한다.
첫째, 길 자체가 이야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예쁜 경치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길을 걷다 보면 “이 길은 예전엔 아이들이 학교 가던 길이었다”라든지, “저 느티나무 아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던 곳이었다” 같은 이야기가 들려야 한다.
걷는 사람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상상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함께 걷게 된다.
둘째, 걷는 속도를 조율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치유는 천천히 걸을 때 온다. 중간에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나 나무 그늘, 작은 정자 같은 쉼터가 있어야 한다. 나는 한 번, 강가를 따라 이어진 걷기 길에서 이런 쉼터를 만난 적이 있다.
오래된 평상 위에 누워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니, 머릿속이 서서히 비워졌다.
그 순간이야말로 치유였다.
셋째, 오감을 자극하는 요소가 중요하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 풀 냄새, 손끝에 닿는 거친 나무껍질,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까지.
걷기 길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런 감각적 경험이 쌓일수록 그 길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로컬관광에서 걷기 길은 큰 예산 없이도 지역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훌륭한 자원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 길을 안내하느냐이다.
주민이 직접 동행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간단한 안내문을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길의 가치는 몇 배가 된다.
예전에 지역의 한 시골 마을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마을 뒷산 길로 이끌었다.
길 중간마다 멈춰 서서
“여긴 내가 시집올 때 신랑이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던 자리야”,
“저 아래 논은 우리 아들이 처음 쟁기질하던 곳이지”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또한 걷기 길은 지역 경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길의 출발점이나 도착지 근처에 카페, 작은 기념품 가게, 지역 특산물 판매점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소비로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그 소비가 억지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걷기 경험의 연장선으로 느껴져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걷기 코스를 마친 뒤 마을 카페에서 마시는 국화차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방금 걸은 길의 향기를 다시 음미하는 순간이 된다.
걷기 길이 치유 콘텐츠가 되는 또 하나의 순간은 계절이 길을 바꿔놓을 때다.
봄에는 벚꽃잎이 발밑을 덮고, 여름에는 매미 소리가 길을 채운다.
가을에는 낙엽이 길을 물들이고, 겨울에는 눈길이 모든 소음을 덮는다.
이렇게 계절에 따라 변하는 길은 여행객에게 매번 다른 이유로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을 준다.
나는 로컬관광에서 걷기 길을 단순한 ‘코스’로만 두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역의 숨결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하나의 무대다.
길 위에서 만난 바람, 사람, 그리고 기억이 여행객의 마음을 천천히 풀어준다.
그렇게 풀린 마음은 돌아가서도 오래 간직되고, 그 지역을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이 된다.
결국, 걷기 길은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모두가 치유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차이는 ‘사람의 온기’와 ‘이야기의 깊이’에서 나온다.
그 두 가지가 길에 녹아든 순간, 그 길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공간, 그리고 다시 돌아오고 싶은 이유가 된다.
다음에 길을 하나 만들거나 정비할 계획이 있다면, 예쁜 경관보다 먼저 그 길이 품은 이야기를 찾아보자.
그리고 그 길 위에 잠시 앉아 쉬는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해 보자.
그 표정이 편안하다면, 그 길은 이미 치유 콘텐츠로 완성된 것이다.
- 멘토 K -
